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제 5강 4월 4일 "교회 교육 솔루션의 기획"

예림의집 2013. 4. 13. 14:15

 

<교회 교육 솔루션의 기획>                 안영혁

 

 첨부파일 제 5강 4월 4일.docx

 

들어가기

. 성경교수학

. 성장발달이론과 연령별학교

Ⅲ. 교수학

. 교육과정론

Ⅴ. 교육역동론

. 교육 컨설팅

Ⅶ. 세례문답교육

. 예수님의 교육

Ⅸ. 기독교교육의 역사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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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교육이 물 흐르듯 흘러가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 말은 교회 교육이 그렇게 쉽사리 잘 흐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필자는 기독교 교육학 연구자로서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였다. 이 글을 적는 것은 이 쉽지 않은 일, 교육의 흐름을 강물처럼 흘려가는 작업을 해보겠다는 시도이다. 이 작업을 하는 데 필자는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을 기본 지침서로 취하였다. 기독교교육이란 그 근원이 원래 무엇인지를 그 어떤 책보다 잘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재 교회들의 교육현장을 다루려고 했기 때문에 현대 한국 교회의 현장론인 박상진의 교회교육현장론에 자꾸 시선을 보냈다. 그리하여 전통적 교육학의 이론과 교육 현장에서의 교육의 흐름을 만나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을 필자는 이미 실제 교육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 솔루션이라는 개념으로 담기로 하였다. 한편 은준관은 기독교교육현장론(2007, 한들출판사) 에서 가정, 교회, 기독교학교, 사회라는 현장 전체를 담으려 노력하였다. 은준관의 노력은 오히려 그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현상학적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그것은 현장의 현상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어쨌든 살아 있는 교육을 말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는 개혁교회 신학이라는 기본에 서서 오늘 사회가 어떻게 변하여 가는지를 지켜보는 관점에서 이런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C.S.루이스의 논조는 거의 칸트의 이성주의에 가깝지만, 그는 그것으로 현대의 누구보다 훌륭한 신앙고백을 해내지 않았던가? 미리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철학적 신학적 족적을 덮어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전은 솔루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용자가 요구한 어떤 문제점에 대한 해답이나 해결책을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등에 반영해 재구축하는 일.”[1] 원래 솔루션은 이렇게 디지털 시스템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교육적 흐름에 유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고, 이미 적용되고 있다.

 

필자는 처음 이 글을 시도하고 거의 1년이 지난 후에 적잖이 놀랄 일이 있었다. 필자가 시도한 솔루션의 흐름이 로렌스 리차즈의 창조적 성경교수법과 기본적인 의도에서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교육의 솔루션이 문제가 된다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중대한 동조자를 얻었다는 뜻이다. 먼저 성경 연구를 한 후에 그 다음으로는 학생에 맞추어 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으로는 교수학과 교육과정을 다루었다. 그리고는 다시 실제 교실에 대한 묘사를 하였는데, 이 묘사가 그리 고전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해도 매우 구체적이다. 그 누구도 쉽사리 적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런 자리에서는 차라리 소설가의 재능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교육 현장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와 그와 관련된 실제적 추이를 narrative로 적어 내릴 수 있는 능력이 리차즈에게는 있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그의 이 교실 묘사는 이미 40년이 지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적혔다. 필자 또한 이런 묘사를 리차즈보다 더 잘 해 보고자 하는 교육학자의 꿈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 소회는 접어두기로 하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여기 전개되는 순서나 방식을 잘 익혀 두자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교회 교육 이해의 출발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1.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성경을 출발점으로 구원을 가르치는 기관이다.

1.1. 가능한 한 모든 시작이 성경이 되고, 모든 마무리가 성경이 되며, 또 모든 핵심이 성경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단지 권위적 문서가 되어서 방법적 시도들을 구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2]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빈틈 없는 성경 교수법에 도달하기까지 성경 교육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이해하는 것이다.

 

1.2. 성경이 계시의 책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데서 성경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성경 자체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고 이미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일단은 중요하다(딤후3:16). 조직신학자들이 성경을 자증적이며 충족하여 완전하다고 가르치고 있거니와[3], 우리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또한 그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실존적 상황 가운데서,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책이라고 인정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7:24-25). 인간 실존이 하나님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성경을 계시의 책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래서 성경 연구에서는 여타의 책과는 달리 특히 관찰이 강조되어야 한다[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오셔서 우리를 향하여 하신 피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 말을 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성경은 논리적 필연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체적 불가피성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1.3. 성경 해석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성경만이 가진 해석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감각과 이성과 신앙이라는 3가지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다.[5] 인식 기능으로서의 신앙이 있다는 것은 감각으로 알 수 없고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인식하는 데 신앙이라는 인식의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신앙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말은 사실 너무 허약하다. 본회퍼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현실을 가지고 인간의 현실 속으로 들어오셨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현실인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라고 한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말인데, 일단 인문학적 분류방식은 인정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신앙은 종국적으로 신앙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 이해는 바로 성경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성경 해석이 중요하며, 교육학적으로는 성경 교수학이 중요한 것이다.

 

1.4.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의 작업은 기독교의 역사만큼 긴 기간 동안 이어왔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는 관찰의 관점에 치중했던 성경 비평학마저 바로 해석의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6] 한편 성경 해석학이 출발점이 된 해석학의 발전은 성경을 통한 인간 이해가 무엇인지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성경 연구는 아니라 할지라도 해석학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비평학은 원래 매우 과학적이었으나 이제는 이 또한 해석학이 되었고, 한편 해석학은 원래 철학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만약 비평학이니 해석학이니 해서 지나친 신학과 철학 논의에 빠져 버린다면, 그것은 교육학적 의도를 넘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교육학적 의도를 가진 간략한 정리가 오히려 요청된다. 요컨대 해석학은 의미의 이해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 핵심 개념에 충실하면서 성경 해석을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에 함께 통하는 일반적 의미를 얻는 것이 기본이다.

한편 성경 각 권의 서론적 이해를 통해 성경 전체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의 서론적 이해에 있어서도 주경 신학에 미치기 보다는 그 간략한 교육학적 제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데 유의해야 한다. 형성된 정경을 주요 관심사로 삼는 정경비평의 방법은 그 세세한 논쟁점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좋은 전망을 제공한다.[7] 그와 함께 성경을 읽던 처음부터 해 왔던 관찰-해석-적용이라는 틀을 출발점으로 성경 교육의 기초를 이해하여야 한다.[8] 요컨대 비평학, 해석학, 성경 개론[9], 교수학이라는 네 국면이 성경 이해와 교수에 요청된다.

 

2. (성장발달이론과 연령별 학교) 2010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가족 실태조사에서 청소년들이 아버지와 고민을 상담하겠다고 한 비율이 0.9%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머니와 상담하겠다는 비율은 29%라는 결과도 함께 나와서 보다 충격적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함께 있는데, 연령별 격차와 함께 남녀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만한 차이가 있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미 100년의 세월 동안 발달이론을 전개시켜 왔다. 코메니우스가 연령별 학교를 제안한 것이 1600년대니까 이미 4백 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역사가 얼마이든 과연 우리는 나이가 다르다는 것에 착안해서 사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차이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교육을 얼마나 실제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2.1.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이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성육신은 그 중 대표적 사실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여 계시하시고, 결정적으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뜻을 이 땅에 알리기 원하셨다. 이것이 오직 교육적 국면만 가진 것은 아니지만, 교육적 국면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인간을 교육하려 하신다.

 

2.2.1. 우선 하나님은 그것이 가장 명확한 진리라 할지라도, 사람의 이해력에 맞추어 가르치려 하셨다. 성육신의 사실은 이 사실에도 맞아 든다. 선지자들의 끝없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체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교육하려 하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교육 방법으로 기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렌스 리차즈와 게리 브렛펠트는 성경교수의 기본 영역을 설명한 후에 그 장을 맺으면서 이제는 학생들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주 분명하고도 대중적인, 그리고 매우 교육학적인 상식이다.[10]

 

2.2.2. 일반교육학이다 기독교교육학이다 구분할 것이 없이 교육학은 그 구체적 자리에서 연령별 구분을 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학계는 늘 확인하여 왔다. 그리하여 연령별 학교 이론 혹은 성장발달 이론이 형성되었다. 교육받아야 하는 대상을 이해하는 데는 무엇보다 이 발달 이론이 가장 기본적인 연구 영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로 인간과 자연이 있는 세계에서, 감각과 이성과 신앙이 자라가는 것이 바로 인간 발달의 상황이다. 누구보다 먼저 구조적[11] 의미의 발달 이론을 펼친 피아제는 감각과 이성의 성장을 기술한 인지발달이론을 내 놓았고, 이것이 인간 사이의 일에 반드시 연계된다는 면에서 콜버그 등이 도덕성발달이론을 내 놓았다. 이런 움직임들에 비하면 가장 늦게 제임스 파울러는 신앙발달이론을 내 놓았다. 신앙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연속적 발달로만 접근하는 파울러와는 달리 신앙 발달의 불연속성과 그 불연속성 내면의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제임스 로더의 발달이론 또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한 측면이다.[12] 한편 전체로서의 인간성의 발달이라는 면에서 감정발달이론을 펼친 에릭슨의 공헌도 작지 않다. 기독교교육학의 아버지 코메니우스는 사실 감정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편이다. 그는 인간성에 대해서도 주로 지혜와 의지와 행동이라는 3요소를 중심으로 표현하였고[13], 감정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격정들을 솟구쳐 내는 원천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교육학의 시대성으로 여겨진다.[14] 프로이트에 와서 감정을 담담하게 혹은 격렬하더라도 피할 길 없이 인간성의 한 요소로 보는 관점이 형성되었으며, 에릭슨은 이런 학문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발달이론가이다.

 

2.2.3. 특히 성장발달이론은 철학적 배경을 필요로 한다.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이론을 펼치면서 그 기본 틀을 칸트에게서 취한 것으로 보이며, 콜버그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학문적 이상으로 삼았다[15]. 파울러는 미국의 종교학 연구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가 통찰력을 많이 얻은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Wilfred Cantwell Smith는 다원종교 상황의 미국에서 종교학을 연구한 말하자면 가장 현대적인 철학 사유자라고 할 수 있다.[16] 감정 발달이론가 에릭 에릭슨은 프로이트의 영향 아래 있는데, 프로이트의 심리연구는 칸트에게서는 해명된 바가 없는 감정이나 무의식 등을 해명하는 인식론 철학의 특출한 부분이다. 누구나 성장발달이론을 중시하면서도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해명들이 늘 부족한 상태로 흘러가는 것은 이 발달이론 내부에 들어 있는 인간 근저의 일이 희미한 채로 머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단지 내용적으로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깊은 철학적 논의가 널리 파급되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인간 이해라는 면에서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다. 근자에 존 가트맨 등이 감정코치라는 개념을 내어 놓고 있는 바[17] 상황에 따라서는 프로이트나 에릭슨을 제쳐두고 그 방법을 배운 후에 다시 저 대가들에게 되돌아 갈 수도 있다고 본다.

 

2.3. 오늘 문화를 몸짱 문화라고 표현하기까지 하는데,[18] 신체 발달에 관한 논의를 완전히 던지고 갈 수는 없다. 어쩌면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교육학적 관점에서 몸을 바라보는 것은 그 발달의 단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또한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는 영성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몸과 함께 이해하기 위하여 이른바 몸으로 드리는 기도등도 하나의 작은 관심 분야로 형성되고 있다.[19] 신체 발달은 반드시 지정의인격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진지한 연구가 요청된다.

 

2.4.1. 한편 우리는 학생들의 이해를 단지 성장발달이론으로 끝낼 수는 없다. 성장발달이론을 기초로 하는 연령별 학교에 대한 이해에로 진전해야 한다. 발달의 단계들을 계통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교육학적 인간학의 한 부분이 되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교육의 내용이 바로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성장발달이론에서 연령별 학교가 연역되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 자체와 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발달의 단계와 이러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한편 교육의 내용들을 얻어내고, 또 이해하여야 한다.

 

2.4.2. 코메니우스는 연령별 학교를 태아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죽음의 시기, 여덟 학교로 나누었다. 현대로 오면서는 유아기가 영아기 및 유아기로 나누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 되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9개의 시기를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죽음의 시기에 대하여는 퀴블러로스가 보여준 죽음 직전의 시기 인터뷰를 통해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20] 죽음은 단지 죽음의 순간만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4.3. 코메니우스는 혜안을 가지고 연령별 학교를 아주 상식적으로 분류하였다. 오늘에 이르러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훨씬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태아기는 기본적으로 코메니우스의 관점이 압권이다. 그리고 영아기는 무엇보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연구가 기념비적인 것이며, 교육학자인 피아제의 연구는 유아기에까지 연결되고, 역시 가치 있다. 한편 이 시기의 교육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교회 배경의 유치원 교육과 연계하여 실제적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아동기와 청소년기는 긴 시간 동안 교회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 각각의 내용 및 형식들에 대한 정리는 연령별 학교의 규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아동기의 아이들은 이야기 가운데 자라며,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자신 안에 정립되어가는 개념의 능력 즉 이성의 능력으로 어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지만, 어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시기 인지발달의 중요성, 그와 함께 개념의 명확성 및 개념적 자기 이해인 정체성 형성 등이 중요한 교육 과제가 된다. 청년기학교는 현대의 변화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옳다. 어느 시대나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만, 특히 현대 문화는 청년이 향유하는 문화이다. 그래서 청년 연구는 단지 청년 연구로 끝나지 않고, 시대의 연구에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성장기의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유아기에는 감각적으로 아동기에는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청소년기에는 개념적으로 청년기에는 의지를 담은 언어로 배우는 것이 요청된다. 장년기의 연구는 이 모든 교육에 가장 견고한 바탕을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변화하는 현대 속에 있지만, 지난 전통들이 가진 의미를 중시하여, 혹은 향수를 가지고 혹은 여전히 그것들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더 잘 활용할 방안들도 세워낼 수 있다. 도덕발달이론가인 콜버그가 인습이후의 도덕 수준을 말하고, 파울러 또한 그를 따라서 결합적 신앙, 보편적 신앙을 말하는 것은 어쨌든 이 장년기를 말한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노인이 많은 시대를 맞고 있기 때문에, 노년기 학교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3. (교수학) 코메니우스는 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하였다.[21] 그래서 교육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용이한 것이라고 그의 범교육학에서 거듭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교수학이 단 한 가지의 절대적 관점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Fenstermacher 같은 사람들이 교수학의 접근법을 기본적으로 3가지로 취하는 것은[22] 수용할 만하다. 그는 관리적 관점과 촉진자적 관점과 자유정신적 관점이라는 3가지 접근법을 내 놓았다.

 

3.1. 관리적 관점은 거칠게 말하자면 학생을 he she가 아니라 it으로 생각하는 관점이다. 잘 관리해서 교육 당국이나 교사가 원래 목적한 바를 이루면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 기본이 비인간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교수법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시험을 친다, 일제고사를 본다, 체벌을 한다, 숙제를 낸다, 적중문제를 연습한다 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관리적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부단히 그리고 꾸준히 훈련 받는 것이 교육에서 중요한 국면이기는 하지만, 코메니우스는 오히려 이 숙련을 위한 훈련을 교육의 최종적 단계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훈련이란 대단히 인간적 특성을 깊이 고려한 교육적 단계라는 말이다.[23] 그러므로 저런 관리적 관점으로 훈련을 시키는 방법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더 인간화되어야 할 국면에서 더 비인간화되는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1.1. 학생 관리는 가능한 한 학생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교육은 그 목적이 학생의 변화에 있다. 그 변화를 일상화 혹은 제도화하기 위해 학교와 교사의 일방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랑하라는 말씀을 오늘의 실행으로 상대를 공감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고 할 때, 한 주간의 하루하루 표적이 되는 사람(부모, 혹은 형제 등)에게 공감의 표현을 했는지 체크하도록 하는 등이다.

 

3.2. 촉진자적 관점은 학생의 인간성을 중심으로 교수하는 방법이다. 성장발달이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촉진자적 관점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또한 교육학적 인간학의 관점[24]을 가진다거나, 개인적 상담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도 이런 교수법과 관련된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난 학생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돌봄의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 자신의 모습을 발전시켜 갈 수 있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교육은 기본이 이 촉진자적 관점에 서는 일이다. 말하자면 교육은 늘 관리적 관점에 머물려고 하는 타성이 있는 바, 그 관리적 관점이 갖는 장점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촉진자적 관점에로 지향하여 나간다면 그것이 적절한 교수법일 것이다.

 

3.2.1. 철 지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코메니우스는 일단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귀족의 자녀들이 남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로서 특별히 잘 교육받아야 할 것을 유연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장애를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교육을 받아 장애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관점을 보인다. ‘들판의 아이를 교실로라는 그의 슬로건은 교육을 통하여 아이의 최선이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2.2. 오늘날은 오히려 학교가 아이들을 압박하여 학교와 학업으로 인하여 자살하는 예가 줄을 잇고 있다. 학교 안에 경찰력을 결부시키는 것은 당장의 문제에 보일 수 있는 부분적 접근으로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돌봄으로서의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시대 교육 철학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기본은 사회철학적이어야 한다. 오늘 학교의 어려움은 경쟁 사회의 반영이다. 경쟁에 앞서기 위해 부모들은 차츰 더 일찍부터 경쟁에 입각한 교육을 제공하기 원하고, 그 성인의 경쟁을 일찍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청소년들은 그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행을 저지르거나 자해적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교육적 터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비록 경쟁이 있다 할지라도 평화를 우선하는 교육적 태도, 혹은 지성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신앙과 생활과 감성을 균등하게 중시하는 교육적 태도에로 나가야 한다. 사실 현재 세계는 그런 교육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중요성에 있어서 본말을 바꾸어 놓는 터치가 요청된다. 적어도 교회는 그런 교육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슈가 되는 두 요소 가운데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3.3. 자유 정신적 관점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이 방법은 어떤 분야의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학생이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고 비약하는 일을 돕고 때로 기획하는 것이다. 경제로 말하자면 일종의 혁신을 일으키는 것인데, 주지하는 바 혁신에는 한편으로는 그 혁신에 연계된 부작용도 나타나게 되어 있다. 헤어바르트는 일찍부터 천재의 불행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기반으로 인간 일반의 한계성을 훌쩍 넘어설 수 있지만, 반면에 천재성을 나타낸 국면에서만 지나친 독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재는 인간으로서의 전체성을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25] 헤어바르트는 오직 보편적 천재가 의미 있다 하였다.

 

3.3.1. 뱅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가 다시 피겨 세계선수권으로 돌아온 일은 그 일 자체만으로 볼 때는 애석한 일이다. 평창 올림픽 유치와 같은 피겨 외적 활동에 성공을 거둔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으나, 자신의 본마당은 여전히 피겨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 같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미 한 사람이 평생 이룰 것 이상을 이루었지만, 인간 김연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다른 접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부디 다음 동계 올림픽 후에는 꼭 떠나기를 바란다.

 

3.4. 교수학이라는 국면에 다가서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관심은 교사론이다. 과연 교사는 어떤 것을 갖춘다면 저 모든 종류의 교수법을 이해하고, 자신이 대한 학생에게 가장 적절한 교수의 원칙을 정하고 효율적으로 교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코메니우스는 실제의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3가지를 학교와 책과 교사라 하고, 특히 그 중에 교사가 중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다.[26] 교사는 교육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 중에 가장 핵심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왠가 하면 이미 본 대로 교사는 학생을 그냥 관리만 할 수도 있고, 인간적으로 대할 수도 있고, 자유의 세계로 향하여 훨훨 날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4.1. 코메니우스는 훌륭한 교사의 자격으로 첫째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학생의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며, 둘째는 학생을 가르칠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셋째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모델적이며, 교수학 방법론을 알고, 그것으로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교사의 출발선이다.[27]

 

3.4.2. 교사는 위와 같은 성품을 기반으로 하여 학생의 지혜와 감정과 의지와 행위를 돌보아서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지혜는 앞서 말한 바 인식 기능의 3합이 잘 이루어지는 상태다. 즉 감각과 이성과 신앙을 결합시켜, 그 인식의 대상이 무엇이든 가장 적절히 판단해 내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의지를 행위와 결합시키기도 하지만, 코메니우스는 의지를 지혜가 행위로 나가기 전에 거쳐 가는 단계로 보았다. 이 의지는 이웃 혹은 타인을 향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언어가 의지와 관련되는 것을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학에서 보여주고 있다.[28] 또한 이 의지는 오히려 하나님께 굴복되어야 하는 것임도 그는 역설한다. 행위는 지혜와 의지의 실현인데 이는 내적인 힘을 안일에 굴복시키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역동적으로 애쓰는 것이라 하였다.[29] 감정은 인간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감정은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및 안정감과 관련되는 것이다. 교사는 이 부분 또한 돌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사는 결국은 학생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오늘날은 보통 인격을 지, , 의로 규정한다. 코메니우스는 상대적으로 감정적 부분에 대해서 주의를 덜 기울인 편이고, 근현대를 거치며 형성된 인격 이론은 관념화하여 인격에 있어 행위의 중요성을 놓쳐버린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사가 솔선수범하는 모델적 사람으로 교수학 방법에 최선을 다하여 학생의 지, , , 행을 돌보아 그의 인격을 세우는데 도움을 제공하는 이라고 그 핵심을 정리하여 둘 수 있겠다.

 

3.4.3. 교사의 중요성은 교육에서 절대적이다. 교사는 지식을 사물에 대한 것으로 머물러 두지 않고 인격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모델이자, 거기서 다시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와 교육에서 교육목회학이 강조되고 교육의 개혁이 요청되며 학생 교육의 문제점이 지적될 때마다, 그 구체적 해결 방안으로서 선두에 서는 것은 교사교육이었다. 교사가 어떤 사람으로 서느냐에 따라서 교육을 통한 결실은 달라진다. 오늘날의 학내 폭력 등도 학생들의 상태만을 가지고 말하기보다는 교사가 제공하여 주지 못하는 인격적 요소가 무엇인지 되돌아 봄으로써 해결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교사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육에 있어서 제1주체는 분명 교사이다. 교사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것까지도 학교에서는 책임지는 주체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사도 꼭 마찬가지다.

 

3.4.3.1 교사는 말하자면 교육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전달자이다. 교사가 어떤 사람으로서, 어디서 출발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결국 어떤 결실을 얻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그것이 바로 교육의 흐름이다. 지금 우리는 교육이라는 행위의 흐름을 얻고자 하는데, 교사는 그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 박상진이 그의 교회교육현장론에서 교사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제시한 후 시행되어야 할 교사 교육의 방향성에 대하여 교사교육의 세가지 차원이라는 제목으로 제시한 것은[30] 코메니우스가 교육학의 기본으로 삼는 지덕경을 재론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코메니우스의 지덕경 개념은 교육학사에 기념비적인 것이라 여겨지며, 어쨌든 우리는 교사 교육 역시 이 기본 관점을 따르면 된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는 셈이다.

 

3.4.3.2. 한편 코메니우스는 교사는 철저한 교육을 위하여 요청되는 존재라고 하였는데,[31] 이것은 현대에 와서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교사의 철저성이란 이제 한 명 한 명의 학생을 챙기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의 전체적 흐름을 컨트롤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개혁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교사를 개혁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교사 교육을 어떻게 하는가는 교회 교육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교육을 둘러싼 환경은 천차만별로 다르겠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교사의 위치는 중요하다. 그는 교육 솔루션을 흘러가게 하는 핵심인자인 것이다.

 

3.4.4. 한편 흐름을 중시하다 기초를 잃어버릴까 우려된다. 코메니우스는 배움이란 결국은 지식을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교육의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말하는 바로 그 교사론을 논하는 장의 후반부에서 많은 부분을 연역과 귀납의 지식을 논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가 말하는 비교연결법(혹은 종합비판의 방법)은 결국은 연역과 귀납을 함께 해낼 수 있는가에 달렸다. 지식이론적으로 말해서 사람의 지식은 연역적 지식이 아니면 귀납적 지식이다. 코메니우스는 물론 귀납적 지식에 훨씬 강조를 두었지만, 연역적 지식을 던져버린 것은 아니다. 교사가 교육 방법의 총체요, 철저한 교육의 중심점이라고 할 때, 이른 바 방법론의 기초는 바로 귀납적 지식과 연역적 지식이다. 말하자면 교사는 연역적 지식과 귀납적 지식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필연성을 가진 지식과 관찰 실험 경험과 교제를 필요로 하는 지식을 두루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3.4.5. 귀납에 대해서는 좀더 말할 부분이 있다. 신기관이란 이름으로 귀납법을 처음 내놓은 베이컨에서부터 귀납적 방법은 연역의 단계를 원래 가지고 있다. 귀납과 연역의 차이는 초기 원칙을 연역적으로 구하는가 귀납적으로 구하는가에 달렸다. 연역은 말하자면 초기 지식부터 연역적 틀 안에서 구한다. 베이컨이 이런 지식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방법은 견고할지는 몰라도 새로운 지식의 증가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연역되지도 않는 것을 연역이 되는 것처럼 허위의 지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베이컨은 그것에 반대했고 맞는 이야기다.[32] 귀납의 전체는 귀납과 연역의 연결이다. 먼저 귀납의 단계에서 원칙을 얻으면 그것으로 다른 사태에 적용하는 연역의 단계에로 돌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운동을 할 때, 몇 분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또 이 때 사용되는 열량은 몇 칼로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원래 연역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운동을 하다 보니 가장 적절한 시간과 가장 근사한 에너지 소비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귀납을 통하여 원리를 얻게 되면 그 다음에는 각각의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이것은 논리적 단계로 말하자면 연역의 단계이다. 귀납으로 원칙을 얻은 후에 그것을 적용시키는 과정이 연역이며, 이 귀납과 연역의 결합이 바로 귀납적 체계이다.

 

3.4.6. 현대는 귀납을 하지 않는 지식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로 주어진 말씀은 그 자체로서 연역의 출발점으로서의 원칙의 자격을 가진다. 주어진 것으로서의 계시적 지식의 흐름은 연역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온전히 연역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계시의 말씀으로 주어졌어도, 그 계시들의 결합으로 우리는 보다 견고한 원칙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이 계시의 말씀에도 귀납적 체계의 원리는 작동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의 학문체계는 바로 이런 연역적 체계와 귀납적 체계의 합인 것이다.

 

3.4.7. 요컨대 교사는 이와 같은 연역과 귀납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좀더 확장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거기에 학생의 입장을 결부시키는 것은 이미 있는 원칙을 적용시키는 것일 수도 있고, 원칙을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는 연역의 단계를 작동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귀납의 단계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권위적이고 후자는 참여적이다. 교사는 자신의 행위가 연역적인지 귀납적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학생과의 공감 혹은 교육의 역동성 및 효율성 등은 모두 이 귀납과 연역의 원활한 작동과 연계된다.

 

3.5. 방법의 기초와 방법의 전체라는 면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코메니우스는 교수학 즉 교육적 방법의 실행을 인간 인식의 기능에서 출발시켰다. 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신앙을 작동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중세를 갓 벗어난 시기의 사람이지만 자신의 교육을 두고 인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는 교육이 그 나름의 과격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탈인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감각과 이성과 신앙이 제대로 발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첫 걸음인 셈이다. 그는 그러나 이런 인간화를 방임의 상태로 보지는 않았고, 모종의 질서가 있어서 그 질서를 따르는 것이라 보았다. 말하자면 감각과 이성과 신앙이 조화되게 작동한다면, 그 자체에서 질서가 솟아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화는 수용하고 무질서와 어리석음은 물리치는 것은 가르치는 방법의 첫 걸음이 되는 것이다. 이 자체가 중요하다. 좋은 것에만 치중하거나, 나쁜 것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서 이미 받은 것에 근거하여 조화를 이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무질서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사론에서 이미 말한 바대로 지혜와 감정과 의지와 행동에서 학생이 자라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33]

 

3.6. 코메니우스 교수학의 핵심은 한 마디로 비교연결법(종합비판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헤어바르트는 그의 일반교육학에서 수업에서의 분석적 방법과 종합적 방법을 나누어 설명한 바가 있다.[34] 헤어바르트는 칸트의 선천적종합판단이라는 이념에 의존하여 이런 교수법을 전개한 바 있지만, 교육학적 선배를 말하기로 한다면, 적어도 헤어바르트는 코메니우스를 언급하거나, 그에게 신세 진 바를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코메니우스의 종합비판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헤어바르트가 말하는 분석적 방법과 종합적 방법의 교차적 실행이다.[35] 코메니우스의 탁월한 유아교육서 세계도해는 종합비판적 방법의 상징적 서적이다. 코메니우스는 여기서 이른바 시청각 교육을 보여주는데, 그림을 통하여 일단 전체를 보여준 다음 그 전체와 관련하여 있는 개별 사물을 보여준다. 그렇게 개별 사물에 다가가게 되면, 학생은 다시 그 전체의 그림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게 된다. 분석만 하는 것도 아니고 종합만 하는 것도 아니고 분석과 종합을 교차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전체 및 부분에 대한 이해를 함께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철저히 배워야 한다는 코메니우스의 교육철학은 다름 아니라 이와 같은 방법론을 지향하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이와 같은 종합비판적 방법론을 범교육학의 교사론에서 다루고 있는데,[36] 이것은 확실히 중세 이후의 교수학에서 골자가 되는 부분이다.[37]

 

3.6.1. 여기서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종합비판의 방법이라는 그 명칭과 의미 자체이다. 이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따라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기 전에,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원래 전체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전체는 뜬금없는 형이상학적 전체가 아니라, 개별자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그 개별자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 개별자들은 전체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금은 낡은 듯한 holism 처럼 보이지만, 이를 더 과격하게 심화시키지만 않는다면 이는 기독교적 교리와 세상의 실제 및 인간 실존을 연결시키는 명료한 교육론이 된다.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은 나를 전체와 연관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실존이 문제된다면, 그 때에는 빨리 개별자로서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될 것이다. 그러다가 나 자신의 협소함으로 인하여 의미가 가로막힐 때는 다시 나를 전체의 그림 위에 놓으면 그 길을 얻게 될 것이다. 학생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다시 그 변화가 새로운 형태의 안정감 위에 서기 위해 이런 순환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은 그런 반복은 어떤 형태로든 늘 일어나고 있는데, 교사는 바로 그 순환을 잘 알고 학생들을 이해하고 돕는 존재인 것이다.

 

3.7. 코메니우스의 교수학을 다 돌아보고 나면, 그의 교수학은 결국은 귀납과 연역의 결합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쯤에서 필자는 이 귀납과 연역의 결합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현대적 기독교교수학에로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Sara Little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사는 교수 행위를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책임을 떠맡게 된다. 즉 자기네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알고 점차로 그 진리를 적절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할 책임뿐만 아니라, 학술의 구조와 과정을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도 떠맡는다. 그리고 이 구조와 방법은 그 자체로서 진리에 대해 증거하며, 또한 학습자들이 수용하는 법, 지식을 축적해 가는 법, 진실하게 다른 사람들과 상호 반응하는 법 및 그들이 발견한 의미에 의해서 변화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38] 사라 리틀은 말하자면 교수학을 통해서 교육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교수는 가르침의 내용과 방법 그리고 교수가 몰고 올 인격적 변화까지가 고려되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바로 이 교수학적 시각은 코메니우스의 종합비판의 방법-연역과 귀납의 결합으로서의 교수학 방법-의 현대적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보다 훨씬 간결한 인상비평적 개념을 이야기하고 지나가야겠다. 교육이란, 특히 지적 교육이란 연역적 지식과 귀납적 지식의 교차인데, 대체 이 연역과 귀납을 어떻게 함께 버무려서 우리는 교육을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내러티브이다. 어떻게 하든 연역과 귀납을 함께 버무려서 우리는 이해하고 혹은 교육하여야 하는데, 바로 그 버무리는 작업의 가장 자연스런 방식은 내러티브라는 것이다. 내러티브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연역이든 귀납이든 또 그 종합이든 얼마나 흥미 있는 내러티브가 되는가 하는 것이 교육의 성패를 갈라놓을 것이다. 교사는 그런 면에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4. (교육과정론) 교육 과정론은 개념상 가르침의 전체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는가 하는 논의이다. 필자는 범주를 논하는 모든 논의에서 교육과정론의 시도를 엿보게 된다. 희랍철학이 신, 인간, 자연으로 존재자를 나눈 것은 그들 나름의 범주 분류이며, 그것 자체가 교육학은 아니어도 교육의 내용과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어서 10개의 범주를 두고 그것으로 세계를 해명하여 보려고 했다.[39] 칸트는 오성의 개념을 12개 범주로 제안하여 인간 인식의 영역을 설명하려 했다.[40] 그런데 이런 일에 대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은 그 기본의도는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 결과물들은 매우 생경하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온 세계 중에 하나님이 포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현실 전체를 그리스도의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위임이라는 개념으로 범주화했다. 본회퍼가 말한 위임의 범주는 노동, 혼인, 정부, 교회의 네 영역이었다. 본회퍼는 구체성의 세계로 이것을 제안했을 뿐, 교육학적 의도는 별로 없다. 그러나 본회퍼의 입장을 충분히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이것은 그대로 교육의 내용 전체가 될 수 있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교육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범주적 논의들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부분 생경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현실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득하다는 것, 혹은 서술해 놓고 나니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 등이 결부된다. 교육과정론 앞에서 교육학자가 기가 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만 하면 다 될 것 같은데, 이것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인가 하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다. 그래도 교육과정론자들은 이것을 논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만 하면 될 것이니까. 교육과정론이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교육과정 이야기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사이, 산업이 발전하여 이 과정들을 매체로 담아내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바로 교육공학이 된 것이다. 공학은 피할 수 없이 구체화를 넘어 파편화되고, 전체의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채 그냥 그릴 수 있는 개별의 그림이나 부분의 그림을 그려가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교육과정론이 교육 전체의 영역을 그리지 못한 채, 부분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오늘 교육의 현실이 된 것이다. 이것은 교육공학자들이 미리 법석을 떤 것도 아니고, 교육과정론자들이 게으름을 피운 결과도 아니다. 능력의 한계이고, 인간의 한계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다른 학자들이 이미 형성시켜 놓은 교육과정에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교육과정에 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교육과정을 보고 얼마나 분명하게 기독교적인 통찰을 펼쳐갈 수 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다시 교육학자의 능력이나, 목회자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 셈인데, 교육학자의 역할은 상황을 그렇게 두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 마디 붙일 말이 있다. 교육과정을 통찰하는 것은 개개의 능력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잘 파악하는 데 있다. 출판된 많은 교육과정이 있는데, 우리는 그 많은 과정 가운데서 가장 신학적인 것을 찾아낸다기보다는, 우리의 형편에 가장 적합한 과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신학적 입장이나 학생들의 발달 수준 그리고 오늘 세계의 정황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많은 교육과정이라는 한 집합과 우리의 형편이라는 한 집합을 만나게 해서 최대한의 공통부분을 찾아낸 그것이 바로 교육의 과정이다.

 

4.1. 교회 교육의 흐름을 기술해보고자 노력한 박상진의 교회교육현장론은 교육과정을 기술해 가면서 그 과정의 한 부분으로 교수학을 기술하였지만, 필자는 오히려 교수학적 관점으로 인해 교육과정의 구조화가 요청된다고 본다. 교육과정은 교수학적 관심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교수의 전체 과정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애초에 가졌던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철저히 배워야 한다는 그 관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4.1.1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 범교육학의 모든 것에 대한 기술은 뛰어나고 창의력이 넘친다. 그는 12가지를 배우면 다 배우는 것이라 하였다. 12가지는 반복하며 발전하는 나선형식 전개가 탁월한 교육 내용의 열거이다. 그 열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범교육학 3장 모든 것, 11항에서 12개의 인간의 선천적 욕구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고리와 같이 연결되어 있는 범지학적 열거이다.[41] 그냥 사람에게는 이런 욕구 12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12개항을 열거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은 범지혜가 인간에게 들어와서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그것은 범지혜의 자연적인 관철이기도 하다. 12항은 다음과 같다. 1)존재 2)건전한 존재가 얻는 건강 3)건강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깨어있는 의식 4)잘 아는 명석함 5)명석함에서 오는 자유 6)자유로운 행위 7)행위들을 통한 소유 8)소유한 것의 사용 9)좋은 사용을 통한 탁월성과 존경심 획득 10)언어를 통한 지식과 의지의 전달 11)선한 의지 전달을 통한 평화의 공동체 형성 12)기쁨이요 영생의 확신이며 자비이신 하나님을 만남.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아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확인되면, 강하게 되려고 한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의식이 깨어 있게 된다...... 이런 식의 연결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아는 데까지 이른다. 6항까지가 인간 존재와 관련된 자연적 국면이고 7항부터 11항까지는 사회적 국면이며 12항은 신앙적 국면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심리적 신체적 신앙적 성장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범지혜를 획득하게 되고, 그 가운데서 모든 것 즉 모든 대상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의 의미는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신앙적 성장 가운데서 겪는 경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은 세상에 널브러진 모든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에 따른 경험에 관련된 대상들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한 코메니우스의 열거는 인간학적이다. 이 국면에서 필자의 깨우침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코메니우스의 모든 것의 열거는 교육과정론의 효시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의미에서 코메니우스의 교육과정론은 신학적이자 인간학적인 교육과정의 제시라는 것이다. 셋째는 이 기술이 갖는 한계성에 대한 인식인데, 이것을 교육과정론으로 해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내용적 과정론으로서 시간적 전개 즉 연령별 학교는 아직 결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의 연령별 학교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열어두어야겠다. 그의 연령별 학교는 학생들의 연령을 고려한다는 면에서 성장발달이론의 전개이기도 하지만, 연령에 따른 교육의 내용을 열거하는 교육과정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 함께 얻는 깨달음은 연령별학교 이론은 성장발달이론과 교육과정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교육과정론이 워낙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점차 연령별 학교라는 말보다는 교육과정론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는 것은 교육학 역사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4.1.2. 브루멜른은 도예베르트의 것이라고 하면서 15개항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수량에서 출발하는 훨씬 과학화 된 제시이다. 1)수량적 2)공간적 3)물리적 4)생물학적 5)심리적, 정서적 6)심미적 7)논리적 8)언어적 9)사회적 10)경제적 11)정치적, 법적 12)윤리적 13)고백적 영역의 학문이 있다는 것이다.[42] 코메니우스와 브루멜른의 제시를 비교하는 것은 좀더 많은 관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제시방법이 흡사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평생의 교육과정인 셈이다.

 

4.2. 앞서 연령별 학교라는 말보다는 교육과정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고 했는데, 교육과정론조차 무색하게 하려는 개념도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 공학이다. 교육 공학이란 그 출발점에서는 교육을 위한 공학적 도구들과 그 사용법 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로 교육상의 문제점을 찾고 해결하려 하던 교육 공학은 현대적 도구의 장점에 힘입어, 점차 교육의 전분야를 그 활동영역으로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8년에 이르러 미국 CIT(Commission on Instructional Technology: 교수 공학 위원회)는 교육공학은 1)학습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연구에 바탕을 두면서 2)인적 물적 자원을 통합하여 3)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4)교수 학습의 전과정을 설계하고 전개하며 평가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렀다.[43] 교육학계에서 아직까지 교수공학이 교육과정론을 아우를 자리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것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교육학이 기본적으로 방법의 학이라고 한다면, 교육공학의 중요성은 자꾸 더 커질 것이고,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교육 방법론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주제적 관심이 교육과정론이라 하더라도, 함께 교육공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4.3. 일언이 폐지하고 교육과정이란 그 기본이 준비와 실행과 평가라는 것이 교육 과정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다. 우리가 교육 과정을 갖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단계의 반복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한 과목의 과정 설계에 맞는 시각이다.

 

4.3.1. 교회 교육과정 전체의 설계는 다르다. 그 전체는 교회에서 성도의 성장을 위하여 수행해야 할 모든 가르침을 열거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의 여러 주일학교 연합회들이 통합 공과 계획을 세웠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44] 정일웅 교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주제를 따라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교회 교육 과정을 제시한 바 있다.[45]

 

4.3.2. 파즈미노는 그의 책 “Foundational Issues in Christian Education”에서 이 모든 과정을 열거하기보다는 도입되는 과정의 정당성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7개의 기본 질문을 제안하는데 6하원칙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1)특별히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

2)이 부분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왜인가?

3)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는 곳은 어디인가?

4)그것은 어떻게 가르쳐질 수 있는가?

5)다양한 영역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언제인가?

6)배우는 사람은 누구이며,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7)이 모두를 결합시키는 유기적인 원칙은 무엇인가?[46]

 

4.4. 한편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중시한다고 할 때 그 모델 자체를 배울만한 것이 있는데, Richard J. Edlin“The Cause of Christian Education”에서 소개한 Geraldine Steensma Harro van Brummelen의 동심원 모형이다.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고, 그 바깥에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두되 그 사이에 기독교와 성경적 연구를 두어서 배움의 전과정이 성경 및 기독교 세계관의 틀 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47] 이것은 마치 네오플라토니즘의 유출설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러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존재의 결핍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성에로 나아간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4.5. 기독교 교육 과정에 대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선 나는 여전히 코메니우스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를 내 제안의 기본 틀로 할 수밖에 없다. 코메니우스 범교육학의 교육과정 틀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코메니우스는 또한 배움의 3가지 책으로 자연과 인간 이성과 성경책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교육 과정의 한 가운데 계시다고 본다면 그 다음의 셋은 두 번째 동심원에 있는 요소들이다. 코메니우스는 그리고는 12가지 항목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그러면 그 12가지는 3번째 동심원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코메니우스는 두 번째 동심원의 요소인 자연 인간 성경에 맞추어 과학과 철학, 윤리학과 정치학, 그리고 신학을 가장 기본적인 학문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저 12가지 항목들에 맞추어서도 학문의 분야를 배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리차드 에들린은 중심원에서 바깥원으로 나오면서 바깥원과 바로 그 안쪽 원의 관계에 주의하면서 학문들을 열거하였다. 학문마다 성격이 있으니 그런 착상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싶다. 그냥 바깥원은 바깥 원대로 그 내용들을 열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12가지 항목 중 존재는 반드시 신학에 결부시킬 수도 없고, 자연에만 결부시킬 수도 없고, 또 인간에는 결부 시키지 않는 방식을 취할 수도 없다. 존재는 저 두 번째 원 3가지 요소 모두와 결부된다. 그래서 바로 안쪽 원의 특별한 항목과 연관됨이 없이 열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번째 원은 존재론적 분류이고, 세 번째 원은 인간학적 열거로 보면 되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3번째 원을 2번째 원의 하부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의도가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의 드러나지 않은 특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만약에 인간학적으로 꼭 새로운 분야로 분류해야 되는 요소가 있다면, 12라는 숫자가 깨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13번째 혹은 14번째 요소로 추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들은 안 쪽 원의 3요소 모두와 일정의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른 바 조직적이면서도 열려 있는 내용적 교육 과정을 우리는 얻게 되는 것이다.

 

 

4.6. 한편, 박상진 교수는 그의 책에서 학교형태의 커리와 교육목회학적 커리를 구별하여 커리에 대한 이해를 출발시켰다. 양자의 장단점은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학교 형태의 커리는 하부까지 보다 체계적으로 짜여 져서 책임 있게 이루어져야 하는 반면, 경직되기 쉬운 커리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정도의 전문적 커리를 교회에서 교육 책임자들이 견지해 내기도 어렵고, 학교와 다르지 않은 교회의 교육과정으로 인해서 쉽사리 학생들이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교육목회학적 커리는 예기치 않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까지도 스며들어갈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말한다. 성령께서 교육의 과정 가운데, 그리고 목회의 과정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역사하실 길을 열어 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그런 관점에서 마리아 해리스는 교회 교육이 디다케에 집중되는 것을 우려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이 교육의 대상임을 각인토록 하였다.[48] 그리하여 그가 제안하는 교육과정은 코이노니아, 레이투르기아, 디다케, 케리그마, 디아코니아[49] 이다. 이 과목들은 어린 시기부터 노년이 되기까지 늘 추구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이 과정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연령에 따른 변화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내용들에 관련된 일정 시기의 교육 내용들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규정해야 할 것이다.

 

4.7. 교육목회학에 다시 눈을 모아 보아야 하는 것은 마리아 해리스가 제안하는 커리가 어떻든 기독교 성인교육에 보다 적합하다는 것 때문이다. 교육목회란 원래 목회자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교육적 관점을 가지고 목회하여 가는 것에 대한 연구 분야이다. 당연히 생의 전 단계가 교육목회와 관련되지만, 교육목회학적 관점이 갖는 개방성으로 인하여, 이미 폐쇄적 커리를 통한 교육을 경험한 세대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마리아 해리스의 저서는 그 교육목회학적 수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교육목회학적 커리는 성인 기독교인 커리로서 매우 훌륭하다.

 

4.7.1. 교육목회학의 커리는 말하자면 일정의 자유 안에 떨어진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아예 교육목회라는 관점이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이른바 자유에서의 도피처럼 정해진 성인교육의 틀을 원하게 된다. 장년부의 커리를 완결적으로 가진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열려 있되 존재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지난 약 20년에 걸쳐 한국 교회에는 영성에의 요구가 많았다. 그것은 아무런 가르침이 없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틀에 짜여서도 안 되는 성인 교육목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여기서 예를 들어보면 리차드 포스터는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50]이란 책을 내 놓았다. 이것은 제자훈련의 틀에 영적 훈련을 내용으로 집어 넣은 것인데, 13주제를 다루었다. 마조리 톰슨은 영성 훈련의 이론과 실제[51]에서 7가지 주제를 제시하고 매우 훌륭하게 이 문제들을 다루어 주었다. 또 다른 예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52]는 우리 시대의 갖가지 생태, 사회, 문화적 문제들을 다루어 놓았다. 좀더 신학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영적 경험과 관련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 문제가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본회퍼의 그리스도의 현실 개념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우리 앞에 문제로 나아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온갖 것을 귀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장년부 시기에 와서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귀납적 성경공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4.7.2. 마리아 해리스는 물론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을 가지고 장년부 교육목회 커리를 잘 제시하였지만, 장년부 커리는 말할 수 없이 그 범위가 넓다. 장년부에 와서 이렇게 커리가 넓혀질 수 있을 때 교회는 교육을 이해할 수 있고, 자녀를 가르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러 보면, 왜 교회에서 늘 자녀교육이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어른들이 어린아이들 교육에 무력감을 느끼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어른들이 아직 진정한 의미의 귀납을 모르고, 여전히 어른으로서 무엇인가를 지도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득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른들이 교회에서 세계를 귀납할 수 있고 스스로 배울 수 있다면, 교회 교육은 진정으로 성장하여 갈 것이다. 장년부가 온 세계를 돌보고 지켜야 할 책임을 지닌 세대라고 할 때, 장년부 교육에서는 이런 것을 깨닫는 것에서도 큰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4.8. 교육과정론은 늘 그 광범위한 관련분야 때문에 기술하기에 곤란함을 느낀다. 여기까지에서 교육과정의 이해는 그 기본이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것을 반복할 수 있도록 전체적 조망을 가지는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 및 세계관을 담되, 특히 교회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학교 형태의 커리를 염두에 두되 교육목회학적 관점을 요구한다는 것 등을 말하였다. 또한 교회의 커리큘럼은 어떻든 하나의 개방적 커리큘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복잡한 틀을 우리가 단순하게 그려낼 수는 없다. 교회는 따라서 교육과 관련된 정관이나 교육과정표 등을 두어서 늘 그것을 살피고, 또 개정하여야 한다. 표로서 만족할 수는 없으며 그 교육과정의 정신이 무엇인지는 반드시 서술되어야 한다. 이 교육과정의 정신을 돌이켜보고 지키고 개정 발전시킴으로써 교회 교육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역초기부터 바로 이런 면을 적절히 시행함으로써 우리는 교육적 리더십을 세워갈 수 있다고 하겠다.

 

5. (교육 역동론-경험과 전략) 교회의 교육을 어떻게 흘려갈 것인가 생각하며 몇 가지 주제와 그 하부 주제를 흘려 보았다. 그럼에도 아직 다 흘려내지 못했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여기서 다시 고려해야 하는 하나의 인상은 이런 것이다. “사역의 역동성과 교육의 역동성은 구체적으로는 어디서 확보되는 것인가?” 필자는 이 역동성의 문제를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이 역동성 부분을 현실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그 내용과 실제적 수준이 어떠하든 교회가 교육을 실행해 나가며, 또 이를 통해 목회를 활기차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1. 앞서의 몇 가지 주제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교육적 역동성을 얻는 방안이 반드시 어느 한 자리에 긴박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삶의 일반적 이치는 결코 연역만으로도 귀납만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연역적 요소와 귀납적 요소를 함께 고려하고서만 사태 자체에 다가설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한 교육 솔루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크게 다섯 가지로 이어져 온 주제들은 얼마간 연역적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53] 그러면서도 결코 첫 번째 주제만이 가장 중요한 주제여서 모든 요소가 그 원천에서 솟아나는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얼마간 연역적 흐름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주제가 제시될 때에는 앞서의 주제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내용들이 도출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주제의 귀납적 흐름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 많은 주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하여 배타적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귀납과 연역의 결합을 경험이라는 말로 표현해 내고 있는 편이다. 경험이 문제 되는 한은 우리의 이 문제를 결코 단선적 논리의 연계로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54]

 

5.2. 우리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사역의 현상에 대하여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 과연 우리 사역의 현상은 이 여러 가지 주제 중에 어디와 더 잘 만날 수 있는 것인가? 필자는 이것이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필자는 현재까지 성경교수학-성장발달이론과 연령별 학교- 교수학일반- 교육과정론의 네 주제를 들추어 보았다. 성경교수학에서는 성경과 관련된 신학 및 철학의 문제가 잠재되어 있고, 성장발달 이론에는 철학적 심리학적 인간학적 요소들이 들어 있으며, 교수학에는 무엇보다 학문 방법론 및 교사론의 문제가 들어 있으며, 교육과정론에는 어떻게 전체를 볼 것인가가 늘 문제이다. 과연 우리 교회는 이 많은 내용들 가운데 어느 지점과 연계하여 교육에로 들어갈 것인가? 교육을 담당한 사람은 그것을 판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교회는 그 개개의 상황에 따라 이 여러 분야 중 어느 하나에 강한 가능성 내지는 적용성을 보일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가 복잡한 고리들에 뛰어들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 역동론은 공동체 이론과 만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공동체를 잘 세워가기도 해야 하지만, 우선은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에서의 판단이 아니라, 이와 같이 교육적 공동체를 꾸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그 교육적이라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의 주제를 고려의 선상에 올려 놓은 다음, 공동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기에 따라서는 명료하기도 할 것이고, 희미하기도 할 것이다. 혹은 단순할 것이고, 혹은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거듭하는 가운데 교회의 교육이 자리 잡히고, 교육 사역도 자리 잡히며, 목회도 바른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학문의 계열로 말하자면, 전통철학적 방법이 아니라 문화적 방법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문화적 방법이란 철저한 논리적 입증이 없는 채로, 현저히 존재하는 현상에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그 현상의 본질을 찾으려는 접근이다. 혹은 문화 현상 자체로 만족하면서 본질 자체를 소거하기도 한다. 기독교교육은 원래가 이렇게 본질을 아예 던져버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논리적 방법이 아니라 문화적 방법을 취하는 것은 교육의 역동을 위하여 반드시 요구된다. 마크 드브리스는 새로운 청소년부가 온다」에서 시스템에서 문화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전개되는 가운데 시스템이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55] 시스템은 논리적이지만 문화는 그냥 흘러가 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5.2.1. 이것은 물론 필자의 가설이다. 그러나 절실한 필요를 느낀다. 오늘날 목회와 관련하여 경험주의적 신학이란 관점까지 동원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 때문이다. 역동적 교육은 교회에 늘 역설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개된 교회 교육은 타일러 스타일의 전통적인 학교형의 교육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아직도 많은 부분 사역자들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목회를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에 대한 많은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 교육은 목회에 부속되어 있고, 목회를 이끄는 교육적 관점은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 신세대의 모습에서 느끼고 있다. 신세대들은 구세대들의 카리스마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총체적으로는 다시 저 교육의 연결 고리들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연결고리들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잘 준비된 사역자와 적절한 회중의 규모들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 요청들을 채울 수 있는 교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들도 많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들은 어떻게 이 문제에 대면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이다.

 

5.2.2. 예를 들어 마크 드브리스는 일정 기간 아예 청소년부의 정례 주일 모임을 정지한 사례도 보여준다. 오늘로 말하자면 청소년부의 주일 집회를 없앤 것이다. 그런 처방을 하면서 일종의 이벤트성 활동을 벌이면서, 거기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낸 다음 원래의 청소년부 활동으로 되돌아갔다. 한국 교회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청소년부 학생들은 말하자면 신인류이다. 주일성수는 교회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청소년부 모임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문화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 덩달아 어른들이 이런 문화를 던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과의 공감적 만남은 그들의 문화 속에 함께 젖어 들어가는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청소년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들의 문화에 젖기도 하고, 마침내는 신학적으로 해석도 해내야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청소년부라는 교회의 체계보다 현실적으로는 선행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흔들리며 무엇인지도 모르며 고통하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어른들이 이런 문제로 흔들리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교육적인 일이 될 것이다. 물론 드브리스가 청소년들의 문화로 제기한 것들은 그리 많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화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받아낸 후에 그 문화를 돕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애쓰면 절로 시스템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드브리스의 관점이다.

 

5.3. 이미 기술한 교육학적 영역과 교육의 문화적 터치를 결합하여 필자의 제안은 아주 단순하다. 교육학적 영역들의 연결고리의 어디든지 치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말자는 것은 아니고, 이미 언급한 바 교회 교육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는 인지하면서, 그러나 현실적으로 잘 할 수 있거나 적용성이 있는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잘할 수 있는 일, 절실한 일을 하면서 만들어야 하는 체계를 형성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육적 역동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교회는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어떤 교회는 바야흐로 아동부를 강화시켜야 하는 상황에 있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교회는 교육학적 지식에 흐트러짐이 없이 연령에 따른 교육을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데 힘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교사 교육을 철저히 기획함으로 교회 교육을 단단히 다져가고자 하는 교회도 있을 것이다. 혹은 교수학적 원칙을 따라 교회가 책임 있게 하나 하나 견고히 해갈 준비가 된 교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교회는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교육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주제들을 다루다 보면 교육과정이란 주제에 당연히 닿게 되어 있지만, 하여간 교수학적 방법론을 우선하는 교육체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교회의 규모상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는 교육과정론을 형성시킬 수 있다면 그에 따라 교육을 흘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솔루션이란 이름으로 불릴 만하다. 비슷하다 해도 전혀 같지는 않다는 것이 우리가 오늘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비슷해 보여도 솔루션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각 교회는 각기 다른 교육적 솔루션을 갖는 것이다.

 

5.3.1. 이것은 우리의 교육학적 조상인 코메니우스의 교육학적 의도와도 합치한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교육철학에서 교육실천까지를 함께 논한 그의 책 범교육학에서 계속하여 교육의 용이성에 대한 주장을 한다. 교육은 쉽사리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이성의 근거를 주로 방법의 다양성에서 찾았다. 교육을 하려고만 한다면 방법은 많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복잡성을 거친 후에도 코메니우스의 바로 그 상상력이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기쁨을 느낀다. 피할 수 없이 경직되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교육목회를 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빠져드는 것이 교육의 방향성은 아니다. 교육은 하려고만 하면 많은 방법론이 이끌려 나올 것이며, 교육목회 또한 그럴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가능성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 거기가 어디든지 교육을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관점에서 길이 열리면 교육 전체의 가능성에로 열려 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대충 교육하자는 말은 아니다. 교육은 그 기본이 쉬운 일이라는 이상에 충실한 것이며, 오늘 우리가 만나는 상황을 가장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이다. 교육은 이미 교육적 관점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건, 혹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역에 돌입했으나 교육적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건, 방법이 없지 않고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역동성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어느 경우 보다 교육이 그 역동의 문제를 풀어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교회 교육과 관련된 귀납과 연역의 결합이다.

 

5.4. 교육이 역동성을 갖기 위한 방법론적 통찰은 많을수록 좋다. 앞서 필자는 어느 방향이든 개개의 교회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핵으로 해서 교육의 전 체계를 형성시켜가자고 하였다. 여기서는 교육학적 실마리(tip, clue)에 주목하자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이미 교육을 잘 하고 있는 교회를 경외감으로 바라본다거나, 현저한 이론을 가진 사람을 아득하게 여기는 일이 교육 현장에서는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의 어려움이 제기될 때마다 다시 이론의 부족과 인력의 부족과 창의력의 부족으로 한탄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 모든 조건은 교육을 잘 풀어가기에 나쁜 조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내가 속한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돌출해 나온 팁이 있다면 그것을 끄집어 내서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사소한 것이지만, 교회 교육을 실천해 내는 일에 있어서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한 실마리를 얻으면 그것을 잘 시행하면서 바로 그 실마리가 교회 교육의 어떤 주제와 관련되었는지 숙고하고, 다시 그것에서 교회의 교육적 활동을 확장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는 일이 될 것이다.

 

5.4.1. 이것은 물론 나태해져서 뭐든지 내가 잘 하는 것으로 하면 되니까 이론이니, 트랜드니 하는 것은 내가 관심할 바가 아니라는 독단으로 빠져들자는 것은 아니다. 규모를 갖춘 교회들도 많지만, 일을 하고는 싶어도 방법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사역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일 말고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교육학 전체의 체계로 보자면 큰 책의 몇 줄 정도에 불과할 내용이지만, 이 일의 중요성을 짚어두려 하는 것이다.

 

5.4.2. 은연 중에 필자는 작은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작은 교회는 구조보다는 개별적 진실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개별성의 극단은 상담의 상황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필자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해명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은 보기보다는 들어야 하고, 강의를 위해서 사례가 제공될 수 있고, 환자와 만날 수도 있지만, 정신분석의 상황 자체를 보여줄 수는 없다고 한다.[56]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 분석의 상황이 극단적으로 사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또 필연적으로 어떤 귀납적 창의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공적이자 또 사적이기도 한 것이다. 교육이 역동성을 갖는 위해서는 이미 논의된 공적 구조들 외에 이런 사적 경험과 창의력들이 관련될 수밖에 없다.

 

5.4.3.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일도 하나 기술해 두고 싶다. 프로이트는 아주 사소한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그가 실수 행위라고 부른 일과 관련되었으니, 교육과 직접적 연관성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특히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전체와 연관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아 그런 것은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작은 실수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해명하는 실수들이 오히려 한 사람에 대하여 아주 중대한 비밀을 담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57] 그렇게 사소한 것도 전체와 연관된다는 말이다. 교육이 늘 그렇게 지엽으로 흐를 수는 없지만, 그리고 심리학이 무의식의 일이라면 교육은 아주 분명히 보다 의식의 일이라고 할 때, 이 사실을 너무 확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는 분명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으며, 교육이 의식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때일수록 바로 이 사소함도 돌아보아야 한다.

 

5.5. 크게는 교육적 활동의 어느 지점이든지 치고 들어가고, 작게는 그 어떤 것이든지 실마리를 끌어내어 교육하는 것에 대하여 역동론이란 이름으로 기술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참으로 그렇게 사소한 것만은 아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육적 방법론에서 학생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방책으로 쉽게, 빠르게, 재미있게라는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어떤 실마리를 끌어내는 것조차 어렵게 여길 상황에 있다면, 이 원칙을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학생과 함께 쉽게 갈 수 있는 길, 아니면 빠르게 갈 수 있는 길, 또 아니면 재미있게 갈 수 있는 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실마리만 찾는다면 그 실마리를 출발점으로 우리는 교육적 활동에로 나아가야 하고, 거기에서 오롯한 교육에로 진전하여 가야 하는 것이다.

 

5.6. 교육의 역동이란 주제는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데, 이 장을 맺으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는 교육 행정에 관한 부분이다. 가르쳐야 할 내용도 있고, 연령별 이해도 없지 않고, 성경이 더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교수학적 관점에서 교사의 중요성도 알고 있는데, 이 많은 구슬들을 현실에 맞게 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교육 행정의 분야이다. 교육 행정은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구조로 하는 것이 옳다. 행정이 방만하면 실제 내용이 거기에 묻혀버린다. 반면 필요한 행정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육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교회에 어떤 의미이며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로 흘러갈 것이다. 예를 들어 가장 단순한 교육 과정으로 준비-실행-평가를 시행한다고 하자. 그럴 때에 가장 필요한 문서는 세련된 교육적 문서가 아니라, 어떤 교사라도 간략하게 자신의 교육과정을 기록할 수 있는 단정한 문서들이다. 준비-실행-평가에 맞추어 교육계획서-강의안-교육평가서를 사용할 수 있을텐데, 이 때 이 문서들은 세련된 문서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간결한 문서들인 것이다. 이런 문서들로 통하여 실제적이고 발전적인 교육적 피드백이 일어날 것이다. 교육 행정이란 말하자면 이런 고리들을 찾아 내어 문제들을 해결하는 교육적 조치로 작동하여야 한다. ‘과연 우리는 구원의 교육을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잘 하고 있는가?’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교육 행정에서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요컨대 교육행정은 교육적 원칙과 개개 교회의 교육적 특성을 결합시키는 융합의 기술이다. 교육 행정의 영역에서 교회 교육은 말하자면 디자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박상진 교수가 그의 책에서 교육 컨설팅을 언급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58]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는 여러 국면에서 교회 교육의 건강성에 대하여 물을 방도를 말하고 있다. 이 컨설팅의 관점은 단지 컨설팅을 해낼 수 있다는 관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교회가 고려해야 하는 여러 종류의 단계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평가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유기적인 평가의 관점이 있다. 이것은 단지 평가의 방편으로만 사용될 것들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당장의 교회를 돌아보는 관점을 제공하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교회의 발전 방향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의 역동을 위해서는 바로 이런 컨설팅의 관점이 더 요청될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디부터 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 그런 것을 되물어 보는 데도 이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컨설팅은 결국 교회의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인데, 평가는 바로 교회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차라리 평가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 평가의 중요성을 깨닫는 그만큼 평가의 방법들에 대한 관점도 갖고 있어야 한다. 평가란 원래 출발할 때 가졌던 목표가 잘 이루어졌는지를 살피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런 컨설팅의 관점을 가지고 평가의 항목들을 세련시킨다면 그것은 교회의 교육발전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필자의 역사 속 스승인 코메니우스의 교육철학 흐름 전반을 따른 컨설팅 자료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교회 교육에서 하나님 형상 회복이라는 큰 타이틀 아래, 지정의라는 인격 요소들이 고루 다루어 지는지, 그 안에 신앙은 어떻게 반영되는지, 학생들은 이런 배움을 실행과 연결시키며 살고 있는지, 이런 모든 문제와 관련된 코메니우스가 제안한 바 모든 것의 교육이 고루 잘 시행되고 있는지, 그와 관련하여 학교는 원활하게 움직이는지, 교사는 적절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7. (세례 문답 교육) 평가를 보다 교육의 흐름과 연관시켜서 한다는 의미에서 교육 컨설팅을 논함으로써 필자는 일단 교회교육의 기본 흐름에 대한 기술을 마친 것으로 본다. 여기서부터는 중요하지만 솔루션이란 관점에서 아직 토의되지 못한 영역을 짚어두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교수학이나 교육과정이란 관점에서 이미 거론된 것들이긴 하지만, 그 특별한 중요성을 시대적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서 기술하기로 하였다. 무엇보다 세례문답 교육은 꼭 짚어두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연령별 학교라는 관점에서 청소년 정체성교육과 연관될 수 있는 부분이다. 청소년기는 이성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이고 바로 그 연령 상황에서 기독교교육이라는 정체성 관점상 요청되는 것이 세례문답교육이기 때문이다. 교회교육은 결국은 구원의 교육이다. 교회교육의 모든 내용이 이 기본 위에 서 있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방법론에 휘둘리다 보면 이 기본적인 중요성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교회의 교육은 구원 교육이어야 한다. 출발점을 성경교수학에서 잡았던 것도 당연히 이것과 연결된다.

 

7.1. 그런 의미에서 그 중요성을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세례문답 교육이다. Christian Grethlein의 예배학 개론(Grundfragen der Liturgik)은 예배학 개론서로서는 바로 이 면에서 이채롭다.[59] 그는 여타의 예배학자들과는 달리 성찬보다는 세례식을 강조한다. 세례와 관련하여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실은 오늘의 예전은 세례문답교육과 세례식을 분리시킨 채로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즉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벼락처럼 한 순간에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세례식이다. 그런데 세례식은 단지 하나의 중요한 예식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결부된 긴 시간에 대한 이해를 그레트라인은 요청한다. 그의 요지는, 거듭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장시간 교회와 신자 본인이 애쓰고 배우는 세례문답교육은 세례의 중요성과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7.2. 세례문답교육의 기본 형태는 교회의 교리교육이다. 성경이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 축이라면, 교리교육 또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교회교육의 체제이다. 그 특성을 가장 상식적인 용어로 기술하자면, 전자는 귀납적이고 후자는 연역적이다. 교회에서 연역적 공부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진리 전반에 깊이 연관되는 필연적 사항을 할 수 있는 한 짧은 시간에 터득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심오한 진리와 그 세계관을 짧은 시간에 다 터득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역사 내내 이루어온 세계관 공부인 교리교육을 하는 것이다. 연령별 학교로 말하자면, 청소년기가 교리교육의 적기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때에 인간은 최초로 온전히 이성으로 개념들을 조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 바 형식적 조작의 시기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교리교육은 말하자면 믿음의 사실을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그 이해를 위하여 이미지를 동원하거나 감각적인 교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 내면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교리적 개념이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교리교육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 자신과 자연 세계를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교육이다. 독일교회 등에서 이 교육을 담임목사의 책임으로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것으로 기독교 세계를 제시할 뿐 아니라, 바로 그런 관점에서 학생의 영혼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 담임목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바로 이 교리교육으로 그 기본이 세워진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담임목사가 책임적으로 이 문제에 다가가야 한다. 이것을 잘 감당할 때 교회는 실로 교회다운 것이다.

 

7.3. 교육목회의 틀이 교회 전체의 교육 체계에 관한 것이면서도, 성인교육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면, 교리교육은 교회 전체 교육의 기초이면서도, 청소년기 교육 체계로서 중요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교회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의 교육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교육목회 과정이요, 또 하나는 교리교육의 과정이다. 물론 교육목회가 보다 포괄적인 사역의 틀이지만, 교리교육 또한 처음 교회에 들어와서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단계들을 해명하는 체제이다. 교육목회의 과정과 교리교육의 과정을 교회 교육 과정의 기본 두 커리로 확인해 두는 것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7.3.1 교육목회와 교리교육은 느슨하게는 교회 교육의 귀납적 국면과 연역적 국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다시 덧붙여야 할 교육 사항이 있다. 그것은 거듭남 교육이다. 거듭남교육은 교리교육의 핵심부에 해당하지만, 초신자가 처음에 받아야 하고, 기독교인으로 사는 중에 다시 확인해야 하는 사항이다. 특히 교리교육이 원활하게 잘 되지 않는다고 보면 거듭남 교육은 보다 필수적이다. 거듭남 교육의 기본은 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동원하여, 그러나 초신자가 수용하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대개 초신자 성경공부 형태로 이것이 운용되고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거듭남 교육은 교리교육과는 다른 교육이다. 화급하게는 거듭남 교육을 하여야 하고, 교리교육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쳤다 싶으면 교육목회적 관점이 다시 적용되어야 한다.

 

7.4. 다시 교리 교육에로 되돌아 와서, 한가지 어려운 문제는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교리교육을 실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선은 우리 교육은 늘 연역적 지식과 귀납적 지식을 교차적으로 전달 공유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지성 못지 않게 감정과 의지도 성장해간다는 발달적 상황을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 사역을 위해 교리공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사역에 대한 전반적 이해 가운데 교리공부를 올려 놓는다는 사고를 하여야 한다고 본다. 정일웅 교수는 교육학자 코메니우스의 신학 사상을 정리하면서, 성경관, 신관, 기독론과 구원론, 역사관, 종말론과 희망의 신학, 교회론과 교회연합의 순으로 주제를 열거한 바 있다.[60] 교사로서는 이런 교리의 열거 자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고, 교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특히 이런 부분에 유의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교리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 시기에도 청소년들이 갖는 교리적 의문들에 대하여 단 한 가지 사고방식으로가 아니라 교리의 여러 주제로부터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칼빈 세미너리의 교육학 교수인 에드워드 실리는 청소년을 만나서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형성하여 가야 하는 책임과 함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교리적 체계를 열거하였다. 그가 열거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종말론이다. 그의 관점은 청소년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다른 사역들이 요청되겠지만, 이 신학적 이해가 가장 기초라 하는 것이다.[61] 담임목사가 책임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기르고, 교회에서 배울 뿐 아니라 배우지 않을 때도 이 틀을 따라서 생각하게 되는 교리의 체계는, 교사의 숙지사항이자 교육 목회의 핵심 사항이다. 당장 세밀한 방법론을 찾기보다, 사역자와 교사는 이런 교리적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고백과 지식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 청소년들과 관련하여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야 한다. 요리문답의 해명하기 어려운 난제로 씨름하기보다는 전체 교리의 흐름에 대하여 이해하는 가운데, 그 교리 속에 청소년들을 부드럽게 품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교리는 세계관이며, 청소년들은 거기 설명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8. (예수님의 교육방법) 성경에 비하여 교리교육이 보다 짧은 시간에 핵심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앞서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세계관의 핵심이 구원이며, 구원의 결정적인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이런 면에서는 예수님이야말로 교리보다도 더욱 교리적이다. 그런 한편 예수께서는 단지 교리 속의 존재만은 아니고, 실제 활동 가운데 계시다. 특히 그의 교육적 활동은 특별하다. 수많은 사람이 교리를 배워서 기독교와 교회를 이해하지만, 정서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활동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예수님의 교육적 의미를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비유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오랜 옛날에 이미 지성 중심의 개념적 교육을 넘어서는 교육적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교리공부가 개념을 세우는 것이라면, 비유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교육 방법이다. 단지 이미지라는 말로 환원할 수도 없다. 비유의 여러 국면에서 교육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62] 전무후무한 비유의 교사셨던 예수께서는 바로 그 방법으로 자신의 교훈을 생동감 넘치게 하고, 반응을 불러 일으키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신기한 새로움의 세계에로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갔다.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하다. 그런 교육의 모델이신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그의 비유가 가진 교육적 효과에서 출발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본다. 확실히 비유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많은 비유 연구가들의 글에서 보는 그대로 비유는 아주 특별한 교육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비유는 또한 그 내용의 인격적 특성도 보여주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면도 확인할 수 있고, 우리는 또한 그것이 얼마이든 배울 수 있다. 비유에서는 예수님 자신의 목소리(ippsisma vox Jesu)를 들을 수 있다는 평가는 매우 적절하다.[63] 이 점에서 비유 연구가 예레미아스는 20세기 그 영향력이 상당했던 루돌프 불트만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유는 원래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가르침의 단위라는 해명을 하였다.[64] 바로 그 예수님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배우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우리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8.1. 예를 들어 J.T.Dillon은 그의 책 “Jesus as a Teacher”에서 예수님의 교수방법을 하나의 표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교훈과 상호작용과 활동의 방법 및 여타의 방법적 요소들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비유는 이야기 교육에 포함시켜 교훈의 방법 중 하나로 분류하였다.[65]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비유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 비유가 탁월했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듣는 순간 우리는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을 생각하고, 새가 깃들이는 나무가 될 겨자씨 비유를 할 때에는 금방 나무에서 짹짹거리는 새 한 마리를 연상한다. 예수께서는 그런 탁월함으로 가르쳤고, 그런 선생은 전무후무하다. 비유를 예수님 교육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이것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교육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8.2. 필자는 예수님의 교육에서 내용이라는 면에서 아주 자극적인 예를 하나 본다. 그것은 바로 본회퍼의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다 듣고 보면 하나님나라를 기독론적으로 해명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현실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현실에로 들어오신다. 이 때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현실과 세속적 인간의 현실로 세계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현실이 된다. 이는 그대로 성육신에 대한 설명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의 몸이란 단지 육체를 의미하는 것만 아니라 모든 세속적 누추함이 결부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런 인간적 누추함에 오셨음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도 교회가 성도의 교제 즉 사람들이 교제인 까닭에, 그런 모든 인간의 누추함이 그리스도에게서 용납됨을 알려준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인 것처럼 자신도 타인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누추함과 모든 멸시와 지혜 없음과 문벌 없음 능하지 못함과 같은 모든 부족을 다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현실이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로 추상적인 분리 가운데 있지 않고 오직 하나인 세계로 이 땅에 존재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현실이 구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체성은 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다운 결단을 요구하는데, 결단이란 즉 이미 완결된 선과 악 사이에서 선에 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아는 그대로 세상은 늘 선을 가로막고 악을 감춘다. 그래서 선과 악은 은폐되어 있는데, 결단은 바로 이 은폐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은폐를 넘어서는 결단은 신앙을 통해서 감행된다. 이 신앙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대로만 보는 단순성에서 출발하고, 그 단순성은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를 가져다 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리스도의 현실이며, 이 그리스도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신앙적 결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

위의 내용은 본회퍼의 그리스도의 현실을 요약한 것인데, 기독교교육은 말하자면 이런 내용적 지향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틀로 수용한다. 그런데 그 전체에 깊이 배어 있는 세계 이해가 바로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9. 기독교교육의 역사

그러고 보면 기독교 교육의 기초 혹은 핵심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또 한 가지의 스펙트럼이 있다. 바로 기독교 교육의 역사이다. 구약 시대의 교육적 전통도 그 기본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살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통이다. 구약 시대에서 예수님의 시대로 건너오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던 회당의 전통은 예배의 전통이자 아울러 교육의 전통이다. 회당은 국가를 잃고 유리하는 형편이 된 민족이 유지한 체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앞서간 교육적 전통이다.[66] 어쩌면 우리는 이 회당의 교육적 정신을 그냥 신학에서 독립된 하나의 교육적 전통으로 접근해서 밝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야만 그것이 오늘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아킬레스건처럼 존재하는 유대인의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로마서에서 이미 거론된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는 기독교인으로서는 매우 마음이 복잡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회당에 대해서 거론하며, 유대인들의 교육법에 마냥 열광하는 어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명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9.1. 이 기독교 교육의 역사가 어떻든 예수께로 이어져 오는 바, 예수님의 교육적 의미를 제대로 잘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의 교육적 태도가 우리 자신에게 선명하게 드러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성경 해석에서 보다 적절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교육적 태도는 그의 모든 말씀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줄 것이다. 그 백성의 구원이 목표라는 가장 핵심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결국 세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모든 일들을 예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를 추적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미 추구되지 않은 바가 아니지만, 기독교 교육의 근본적 중요성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우리는 여기까지 효율적 교육을 위하여 교육을 어떻게 흘려내어야 좋은 것인지를 추적하여 왔다. 그래서 솔루션이라는 개념을 동원하면서 실제 교육의 흐름에 대하여 숙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만큼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적 의도의 중요성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솔루션의 목적이 바로 그 예수님의 교육적 의도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 어떻게 잘 흐르기를 원하셨나?

 

9.1.2. 진리란 진리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진리에 대하여 수많은 해석이 있고, 그 해석들의 균형 가운데서 그 진리를 구하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보이신 교육적 의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 교육적 의도는 우리에게 해석의 방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문제는 있다. 과연 그렇게 독립적으로 교육적 의도를 연역해 낼 만한 본문들이 존재하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목적은 아니고 예수님의 교육적 의도를 알기 위한 주경을 시도하여, 거기서 예수님의 교육적 의도를 도출하여 낼 수 있다면, 그간의 많은 신학적 의도가 담긴 해석보다도 훨씬 의미 있는 한 해석의 방향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경의 교육학적 해석학이 될 것이다. 수 많은 다른 탐구들에도 불구하고, 바삐 이 탐구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다. 상당히 신학적인 부분에 대하여 이와 같이 교육의 역사를 논하는 가운데 말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교육의 역사에서 예수님의 위치를 다시 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미 모든 것이 정립되었다면, 그것을 믿을 만한 견고한 논의로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9.2. 예수님의 시대를 지나면, 그 시대의 정신과 진행을 따라 교육은 바뀐다. 코메니우스라는 한 교육학의 인물을 보게 되면 우리는 성경 시대를 지나서 진행된 교육의 내용이 어떤 것인 지 대략 짐작하게 된다. 코메니우스 교육학이란 원래 기독교교육학일 수밖에 없다고 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이 그 일에 찬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의 한 정서였고, 그 이전 시대에도 기본적으로 그런 정서가 깔려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9.3. 헤어바르트는 일반교육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 말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말한다면, 그것은 오늘 한국에서 기독교교육학을 하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헤어바르트는 분명히 신학과는 독립된 교육의 내용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칸트의 유풍이다. 칸트는 결코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에서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기술하기를 보류하였다. 그가 말하는 순수이성이니 도덕이성이 하는 것은 그것이 신학이 아니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인식과 도덕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자신은 거기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것이다. 헤어바르트는 칸트의 그와 같은 철학적 견해를 교육학에 받아들인 것이다. 자연과 인간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는 바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일반교육학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하자면 기독교교육에서 신학에 관한 부분만 제쳐내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기독교교육학은 저런 일반교육학적 내용과 신학적 내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먼저 시작되었고, 일반교육학이 기독교교육학에서 신학적 내용을 제하면서 떨어져나간 셈이다. 교육학의 전개에 있어서, 기존의 일반교육학과는 다른 영역으로 기독교교육학이 따로 성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교육학이 보다 큰 영역으로 있고, 일반교육학은 여기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 사실 자체가 당장 어떤 큰 의미를 몰고 올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 우리에게 항상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독교 교육학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보다 차분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투쟁적이지 않으면서도, 믿음에 견고한 교육학이 될 것이다.

 

9.4. 필자가 보건댄 저런 문제와 관련하여 현대 기독교 교육학에서 밝혀야 하는 사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저 일반 교육학 혹은 인문주의 교육학이 어떻게 발전하였고, 그것이 마침내는 기독교교육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계시중심적 사상을 가진 개혁교회는 과연 교육을 어떻게 전개하려고 하였는지를 찾는 것이다.[67] 이 정도를 밝히고 나면, 큰 틀이 드러난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들에 대하여 상술한다거나, 미래의 교육을 의미 있게 진단해 보는 일들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결어

교회 교육의 실제를 진행시켜갈 수 있는 기독교 교육의 체제에 대하여 주제가 떠올라 오는 대로 기술한 것이 크게 9가지 주제를 들추게 되었다. 1개의 장에서 꽤 중요한 여러 개의 주제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런 논문을 쓴 의도는 기독교교육학이 학문으로 체계화되는 가운데, 그 개개의 분야가 독립적 요소가 되고, 그 여파로 실제에서 교육을 기획하는 이들이 기독교교육의 큰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게 된 상황을 넘어가 보고자 한 것이다. 또 기독교 교육에 처음 들어서는 이들에게는 교육학이 난삽한 여러 주제의 조합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필자는 이 논문이 기독교교육의 연구가 난삽해져서 길을 잃을 때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약도로 사용되기를 기대한다. 허약하나마 이런 흐름도가 우리에게 확보되어 있다면, 우리는 삶과 관련하여 기독교 교육을 단지 교육 지침서가 아닌 교육신학 및 교육사상으로도 받아들일 여지를 얻게 될 것이다. 교육은 교회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시 인간 실존에 어떤 형태로든 답을 남겨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랬을 때 교육신학이라는 말이 성립할 것이다.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는 기독교교육학자의 시야에서 교회 교육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도 확인하여 두고 싶다. 교육을 실행하는 것은 이미 권위 있게 형성된 이론에 근거해서, 다시 그 이론을 체계적으로 엮은 다음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이 아니다. 분명히 이런 국면을 가지고 있지만, 교육의 더 핵심적 자리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교육은 말하자면 하나의 창조 행위이다. 자꾸 새로운 대상 새로운 현장이 나타나며, 여러 상황의 조합들은 또 다시 새로운 접근법을 요청한다. 이 때에 우리는 이미 있는 어떤 이론을 들이댈 것인지를 찾기도 해야 하지만 이미 있는 이론들의 구름 사이에서 새로운 빛을 찾아야 한다. 또한 할 수 있다면 이런 접근이 교육계에 보고 되어야 한다. 교육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담아서 이 글을 썼다. 필자도 독자도 이 글을 한편 수용하고 한편 비판하며, 오늘 우리는 교육을 잘 흘려가고 있는가 하고 아침마다 묵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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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후 백과사전 솔루션”.

[2] 본회퍼의 윤리학을 보라. Dietrich Bonhoeffer, 윤리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37-74.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현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현실을 가지고 인간의 현실 가운데 들어오신 것이라 하였다. 성경과 함께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일과 같다.

[3] Louis Berkhof, 권수경, 이상원, 조직신학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0), 174-181.

[4] Lawrence Richards, Gary J. Bredfeldt, Creative Bible Teaching, 안영혁, 이순옥, 창조적 성경교수법, (서울: 그리심, 2010), pp.377-8. 리차즈는 특히 미취학의 영아기에도 교회 교육의 핵심적 중심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이것은 물론 근대 인식론을 만나면 영역이 달라지거나 이름이 바뀌거나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식의 기능을 표현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분류가 없다.

[6] Louis Berkhof, 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윤종호, 송종섭, 성경해석학,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65).

[7] Stephen R. Haynes, Steven L. McKenzie, 김은규, 김수남, 성서비평방법론과 그 적용,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189-210(7.정경비평).

[8] Howard G. Hendricks, William D. Hendricks, 정현,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연구, (서울: 도서출판 데모데, 1993);  J. Scott Duval, J Daniel Hays, 류호영, 성경해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9).

[9] 관찰에서 배경관찰, 문맥 관찰 등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잘 정리된 성경 서론으로 커버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10] Lawrence O. Richards, Gary J. Bredfeldt, Creative Bible Teaching, (Chicago: Moody Publisher, 1998), p.89.

[11] 여기서 구조적이란 인간의 지적 기능 가운데 그 발전이 진행되는 영역이 생득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12] James Loder, The Logic of the Spirit, 유명복,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인간 발달, (서울:CLC, 2006).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발달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강력한 변화의 힘 아래, 성격상 문제나 강박증적인 충동성 패턴이 인내, 철저한 업무 능력, 절약 생활, 학문적인 열심과 같은 미덕들의 기초가 될 수 있다.”(p.188).

[13] 범교육학 제4장 모든 방법,을 참고하라. Jan Amos Comenius, 정일웅, 범교육학<(수정2>,(서울: 그리심, 2005).

[14] 전혀 덮어둔 것은 아니다. 그는 범교육학 제7장 범교사론에서 교사란 학생의 정신과 마음과 화술과 손을 발전시키는 책임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마음은 영어로 heart로 번역되며, 감정과 연결성이 있다. 범교육학 7.1.

[15] Lawrence Kohlberg, 김민남, 김봉소, 진미숙, 도덕발달의 철학, (서울: 교육과학사, 2000), pp. 68-90.

[16] James W. Fowler, 사미자, 신앙의 발달단계,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7), p.14.

[17] John Gottman, 정창우, 존 가트맨식 감정코치법, (서울: 인간사랑, 2007).

[18] 박상진, 교회교육현장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8.10), 138ff.

[19] Celeste Snowber, Embodied Prayer, 허성식, 몸으로 드리는 기도, (서울: ivp, 2002);  Mary Jones, God's People on the Move, 박영애, 크리스천 댄스, (서울: 도서출판 바실, 2000).

 

[20] Elisabeth Kübler-Ross, 성염, 인간의 죽음, (경북 칠곡군: 분도 출판사, 1979).

[21] 코메니우스는 그의 범교육학에서 거듭 용이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용이성은 방법이 적지 않고 많다는 데 기인한다.

[22] G.D. Fenstermacher, Approaches to Teaching, 이지헌, 가르치는 일이란 무엇인가?, (서울: 교육과학사, 1994).

[23] 범교육학 7.16.

[24] 교육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면을 고려하는 접근.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철저히 배우도록 돌보는 돌봄으로서의 교육이라는 면에서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교육학적 인간학의 훌륭한 모델이다.

[25] Johann Friedrich Herbart, 김영래, 일반교육학, (서울: 학지사, 2006), pp. 209-10.

[26] 범교육학 7.1.

[27] 범교육학, 7.3.

[28] 범교육학 7.1. 7.14.을 비교해 보면 화술의 항과 의지의 항이 병행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9] 범교육학, 7.14.

[30] Op. cit., 박상진, pp.218-221.

[31] 범교육학, 4.19.

[32]발견을 위해 논리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논리학은 오직 명목적으로만 당면 과제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논리학이 하는 일은 원리나 핵심 공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나 핵심공리와 일치한다고 생각되는 명제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원리 혹은 대전제가 되는 공리들의 증명과 발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논리학은 그냥 그렇게 믿으라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판에 박은 대답만 되풀이 한다.”(신기관1-83)

 

[33] 범교육학, 4.12-18.

[34] Jahann Friedrich Herbart, Allgemeine Pädagogik, 김영래, 일반교육학, (서울: 학지사, 2006), 103ff.

[35] 필자는 이것이 바로 연역적 지식과 귀납적 지식의 능력이라고 해명하는 것이다.

[36] 범교육학, 176ff.

[37] 코메니우스의 대교수학에서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교수법을 제시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합비판의 방법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자연주의적 교수법은 자연에서 배우자는 것으로 자연의 개개의 사물에서 출발하여 개념화를 이루고 그 다음 다시 개별 사물에로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Jan Amos Comenius, 정일웅, 대교수학, (서울: 창지사,2002), 16장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확실한 교수 학습의 원칙.

[38] Sara Little, 사미자, 기독교교육 교수방법론,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p.17.

[39] 실체, 성질, 분량, 관계, 공간적 규정, 시간적 규정, 능동, 피동, 자체, 상태.

Sterling P. Lamprecht, 김태길, 윤명로, 최명관, 서양철학사 (서울: 을유문화사, 1963), p.95.

[40] -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실질성, 부정성, 제한성; 관계-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성; 양태-가능성과 불가능성, 현실성과 부재, 필연성과 우연성: 강영안,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서울: ivp, 2001).

[41] 범교육학 3.11.

[42] Harro van Brummelen, 이부형, 기독교적 교육과정 디딤돌, (서울: ivp, 2006), pp.100-102.

[43] 교육학 대백과사전, 서울대교육학 연구회편.

[44] 오인탁, 주선애, 정웅섭, 은준관, 김재은, 기독교교육사, (서울: 한들출판사, 1992), pp.314-319.

[45] 이 시도는 현재 예장 통합 공과에 얼마간 투영되어 있다.

[46] Robert W. pazmino, Foundational Issues in Christian Education, (Grand Rapids: Bacer, 1997), pp. 226-8.

[47] Richard J. Edlin, The Cause of Christian Education, 기독교학문연구회 교육학분과, 기독교교육의 기초, (서울: 그리심, 2004), pp.198-199.

[48] 박상진, pp.261-264.

[49] Maria Harris, Fashion Me a People: Curriculum in the Church,(1989) 고용수, 교육목회 커리큘럼,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50] Richard M. Poster, 보이스사 편집부, 영적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서울: 보이스사, 1999), 수정2.

[51] Marjorie J.Thompson, 엄성옥,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 (서울: 은성, 1996).

[5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생명살리기운동10년위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2010).

[53] 일언이폐지하고 성경에서 출발하는 것은 계시 중심적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분히 연역적이다.

[54] 실천신학과 관련하여 경험의 관점을 신학적으로 전개한 책으로 다음의 책을 들 수 있다. James. N. Poling, Donald .E. Miller, 박근원, 교역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55] Mark de Vries, 안영혁, 새로운 청소년부가 온다 (서울: 그리심, 2012), 103-124.

[56] Sigmund Freud, 임홍빈, 홍혜경, 정신분석 강의():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집1, (서울: 열린책들, 1997), pp.17-20.

[57] 상게서, pp.33-35.

[58] 박상진, 303ff.

[59] Christian Grethlein, Grundfragen der Liturgik, 김상구, 예배학 개론, (서울: CLC, 2006), pp.241-78..

[60] 정일웅, 코메니우스 교육신학사상의 현대적 의미, 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홈페이지, pp.4-21. 이 논문의 신학적 제시는 단지 교리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여기 기록한 것 이외에 유럽 경건주의와의 신학적 관계등도 기록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61] Edward D. Seely, Where Reformed Theology Meets and Shapes youth Ministry, Calvin Theological Journal 41(2006), pp.331-346.

[62]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연구, (서울: CLC, 1993), pp.15-32.

[63] 상게서, p.18.

[64] 상게서, p.36.

[65] J.T.Dillon, Jesus as a Teacher, (Bethesda: International Scholars Publications, 1995)p.181. 그는 특별한 기준 없이 누가복음 10:25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그 한 예로 들었다.

[66] 오인탁, 기독교교육사, pp.32-42.

[67] 이에 대하여는 필자의 논문 하나를 참고하라. 안영혁, 개혁교회교육학의 신학적 변호, 신학지남 2009년 여름호, pp17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