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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변증학 시험 예제 및 예답

예림의집 2013. 3. 7. 14:03

개혁주의 변증학 시험 예제 및 예답

 

①기독교 변증학의 의미를 설명하라.

변증이라는 단어는 빌립보서 1장 7절에 나오는 "변호하다(to defend)"라는 변론의 의미다. 넓은 의미의 변증학은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좁은 의미의 변증학과 하나님의 사역과 기독교 교리를 증명하는 험증학으로 나눌 수 있다. 변증학은 무신론자나 철학자, 무신론 과학자와 이단들에 대해서 성경을 통하여,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과학을 통하여, 한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명한다. 변증을 하기 위해서는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해명하는 글은 변증학이 아니다. 또한 변증학은 기독교에 대한 공격과 비판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고 기독교의 변호와 증명을 위하여 존재하는 학문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교리적이며 윤리적인 공격과 비판에 답변하는 글인 변해서와 구별된다.

 

②변증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라.

우리에게 변증학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나의 신앙의 확증을 위해서. 둘째, 신자들에게 바른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셋째,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넷째, 이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다섯째, 종교 다원주의, 통합주의 등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기 위해서. 여섯째,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지 않고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일곱째, 무신론자(과학자, 사상가)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하나님을 변증하기 위해서. 여덟째, 성도들의 여러 가지 상담들에 대한 올바를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아홉째,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예배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은 필수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오로지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뜻을 바로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에도 열중해야 하지만 영성에도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이다.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주님의 일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또한 우리가 배우는 개혁주의 변증학은 대부분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리들을 살펴보며 간략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지 않고 하나님을 확실하게 변증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③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온건파들의 견해를 서술하라.

첫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신은 인격도 없고, 동작도 없고, 사고도 없고 무 인격적인 존재로 보아 신을 부인 하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존재하는 신으로 주장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우주에 빗대어 이야기 하여 기독교의 하나님 하고는 동떨어진 신을 말한다. 그는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둘째, 데모크리투스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진 않았지만 원자를 신으로 보았다. 이 우주는 작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작은 원자가 바로 신이라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유물론에 소한다.

셋째, 칸트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생각을 했지만, 절대 이성을 강조함으로 실존주의 사상을 끌어들였다.

넷째, 루돌프 볼트만은 비신화 신학인 실존신학을 주창했다. 탈 신화 작업 즉, 신약 신학 안에 있는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제거하고 윤리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신학이 철학의 시녀로 역전되는 현상을 낳았다.

 

④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노골파들의 견해를 서술하라.

첫째, 볼테르(Voltaire 18C)는 성경은 난센스이고 유치하다고 하였다. 앞으로 100년 후에는 성경이 판매되지 않을 거시다는 당시로서는 용감하고도 무모한 발언을 하였다. 기독교를 도덕 종교화, 계몽 종교화 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아 나는 지옥으로 가는 구나,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회에서 성경공부를 많이 했으나 이신론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에 대한 삐딱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신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정하지 않고, 일반 계시는 인정하나 특별계시는 인정하지 않으며,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의 기사는 다 인정할 수 없어 기적, 동정녀 탄생, 오병이어, 바다 위를 걸으심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페인,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헤겔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있었으나 절대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신국론)에서 원리들의 핵심을 따와 역사철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목저론적 사관은 인류의 역사가 목적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일직선적 사관이다. 인류 역사란 절대 정신의 자기전개(자기지 획득)라 보아서 그것을 획득한 그 때가 인류의 종말의 때라고 주장했다. 그 절대 정신이 자기지를 획득할 때 까지는 아직은 온전한 절대자가 될 수 없고, 그가 주장하는 자기지는 성경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셋째, *마르크스(Marx 19C)는 “성경은 아편이다”고 하여 기독교를 부인 정도가 아니라 박해했다. 그는 헤겔의 절대 정신을 절대 물질로 대치함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자의 시조가 되었다. 정신이라는 가치를 빼어 버리고 물질로 대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존재가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그는 윤리, 도덕, 종교를 배제하고 물질만능으로 빵의 철학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인류 종말은 무상계급이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누릴 수 있을 때 이루어지며, 기독교는 중상층을 위한 종교이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넷째, 샤르트르(Sartre 20C)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보았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고,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없애야 한과 주장하였다. 그는 신을 믿는 사람은 비합리적인 사람(역리)으로 규정 짖고 자유 외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의 존재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칸트는 인간 이서의 한계를 이야기함으로서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칸트 이후의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겸손해졌다. 칸트 이후에도 자신 있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진화론, 실증주의 학자들이다.

 

진화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비평하라.

찰스 다윈(C. Darwin)은 1859년 출간된 그의 저서 종의 기원(種의 起源)을 통하여 자연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적합하지 않는 것은 도태된다는 자연도태설을 주장하여 창세기 1장을 정식으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도 종류대로(10번), 노아의 홍수 때에도 종류대로(8번) 창조하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다윈은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낫지만, 딸에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성경)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실패의 연속이었던 그의 인생이 50세 때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삶 자체가 바뀌었다. 후에 그의 고백에 의하면 당시의 그는 미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신격화 시켰다. 그 결과 하나님과 성경을 자신 있게 부인한 사람이 되었다.

1959년 100판에서 톰슨이 서문을 통하여, 다윈은 자연도태에 대한 기원을 증명해 내지 못했고, 종의 기원은 그의 상상을 기록한 것이며, 그는 사실과 공상을 혼동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억측과 그의 상상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와 같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자료가 될 뿐이다. 미국은 아애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규정한 주들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진화론의 가설들을 진리인양 가르치고 있다.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신부이자 지질학자)은 진화신학자로 성경을 진화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진화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주가 지질권에서 생물권, 정신권, 그리스도권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일종의 유물론이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권은 우주의 종말의 때인데, 십자가의 구속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진화의 마지막 때를 가르며 우주의 진화의 오메가 포인트를 말한다. 그에게 십자가 대속은 없고 물질로부터의 우주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그는 반 기독교적인 하나님을 주장하여 성경의 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 하며 성경을 자신 있게 부인한다.

 

⑥실증주의를 소개하라.

콩트(A. Comte)는 무신론자에 가깝다. 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이전 시대는 신학적 시대이고 형이상학적 시대를 거쳐 이제 실증주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주장했다. 실증주의는 과학 지상주의로. 눈으로 보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시대를 말한다. 이 주장은 유럽통합(EC)의 단초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자고 주창하였다.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하나님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는 신이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진선미(眞善美)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 있게 부인한 사람이다.

 

⑦겸손파 과학자들의 불가지론(不可知論agnosticism)에 대해 설명하시오.

그들은 일종의 영지주의(agnosticism) 입장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알 수 없다고 예기하지만 속마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믿는다.”고 말하며 성경에 나오는 과학법칙을 초월하는 내용들을 부인한다. 성경은 인정하지만 사실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법칙이 모든 것들을 설명해 내지 못한다. 오늘 날도 많은 이적과 현상들이 과학법칙이 설명될 수 없다.

과학주의(Scientism)자들은 과학적 방법이 결국 신이라고 믿어 과학주의의 종교화를 꾀한다.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신봉주의 계열의 사람으로, 지나친 축소주의로 인간 현상을 수량으로 해석 물질화 시키려 했다. 인간의 마음(윤리, 종교, 도덕, 예술)의 문제를 인간의 뇌수의 영향으로 인해 달라진다고 하며 양심의 문제를 사회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그는 맹목적 사고를 가지고 목적론적인 사고를 부정시하는 태도로 창조의 목적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부정할 뿐 아니라 모든 가치관과 윤리를 부정했다. 나아가 과학주의 자들은 초자연에 대하여 과학적이지 못함으로 회의적으로 보았고, 태아 복재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초자연적인 인식이 지금은 자연적이 되고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 후에 비과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⑧다른 기독교인들의 의견을 소개하라.

첫째 로마 가톨릭은 인간이 성경의 말씀을 계시 진리로 받아드리기 이전에 성경의 하나님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칼뱅주의)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타락으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 인간의 회손 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본다. 그들은 우리와 인간 이성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손상의 존재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데 이를 이성건재(건전)설이라 한다. 그들은 이성의 능력을 실재보다 과대평가하고,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과대평가하고, 상대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죄성을 과소평가한다.

또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를 든다. 성경이 쓰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제 1원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광의 신학이라 한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이 영광의 신학으로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영과의 산물이 인간의 이성을 높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까지 이르려고 하는 신학으로 건전한 신학이 아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신학은 영광의 신학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알미니안 주의이다. 이들은 16세기의 알미니우스의 사상에 바탕을 둔 신학이다. 알미니안은 칼뱅의 후예가 되기를 바랐던 사람이지만, 칼뱅의 문제 5가지를 제시하고, 인간의 전적 타락을 부인하여 돌트회의를 통해 추방당했다. 우리는 이를 이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많이 회손 한 인본주의 신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감리교, 순복음교회, 오순절, 성공회 등이 알미니안적 요소들이 많이 있다.

 

⑨“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를 개력주의 입장에서 논하라.

로마서 1장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전도서 3장 11절에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은 모든 만물, 특히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종교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리어졌다. 이것을 “신지식”이라고 한다. 이 신지식은 신자와 불신자간의 공통점이다. 이러한 신지식이 하나님과의 접촉점(The Point of Contact)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이다. 이 논의는 하님의 존재 관점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성경의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양심, 상식, 도덕률)이 접촉점으로서 성경의 도움이 없이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이성만으로는 이끌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신지식 또한 접촉점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접촉점이 없다. 신지식이 성경과 성령의 계몽하시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우리는 가톨릭이나 알미니안주의가 믿는 이성의 건재설을 배격하고 이성의 타락을 믿는다. 오히려 성령의 역할이 전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건재하다는 것을 전재하지만 우리는 무조건 믿는 신앙주의(Fideism)가 아닌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전재로 한다.

 

⑩4대 유신논증을 소개하고 평가하라.

어떤 논증도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있어서 완벽하게 성공해 내는 논증은 없다. 왜냐하면, 논증이라는 증면 자체가 인간의 이성을 통한 접근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성경과 성경을 깨닫게 해 주는 성령님의 역사만이 가능하다.

첫째 우주론적 논증이다. 우주를 보고서 우주를 있게 한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으로, 인과논증(因果論證), 경험론적, 논증귀납적 논증이다. 진술을 살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원인이 되는 존재(최종 원인)가 있을 것이다. 우주를 있게 하신 원인은 우주의 밖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는 기독교의 하나님일 수는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은 로마 가톨릭의 가장 역사적인 전통을 가진다. 자기 존재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존재인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가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삼위일체 속에서 하나님은 역동적인 운동성이 있다. 구 프리스톤 신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이성적인 입장에서 볼 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지나치게 로마 가톨릭 냄새가 난다고 실란하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이는 존재(피조물)를 통해서 존재(하나님)를 찾아가려고 하는 존재론적 유비(類非)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어떻게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이는 자연 신학적 입장이고, 로마 가톨릭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주론적 논증도 유익이 있는데 첫째, 기존 신자에게는 우주론적 논쟁을 통해 들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더욱 확실한 인식을 가지게 할 수 있고, 둘째,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의 귀를 기울이게 해서 성경의 선포에 마음을 여는데 유익하게 한다.

둘째, 존재론적 논증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색적(관념적)으로 추론하는 것으로, 관념적 논증, 형이상학적 논증, 선험적 논증, 연역적 논증이다. 안센은 삼단논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완전자다. 완전자는 존재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라고 논증하였다. 데카르트는 “완전무한자”로서의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있다고 하였다. 쿠잔은 “무한의 관념은 유한의 관념에 부여된다.”고 말하며, 무한한 완전은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셋째, 목적론적 논증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증거 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궁극적이 목적이 들어나도록 우주 속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우주는 놀라운 질서와 조화가 있는데, 질서와 조화를 있게끔 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존재가 대이지자(大理智者)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두 가지 입장이 있는데 먼저, 천체만물적인 입장으로 우주의 광대하고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움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만원경적 논증. 즉, 정서론(定序論)이다. 그들은 질서가 정해져 있고, 천체의 질서가 조화 있게 되어 있게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키케로와 필로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다음으로, 생물계 특히 인체의 각 기관들이 놀랍게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짐을 볼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현미경적 논증인 의장론(意匠論)이 있다. 자연은 디자인이 잘 되어있다. 특히 인체는 생물학적으로 잘 만들어진 그 뜻이 있다는 것이다. 윌리암 펠리(William Peley)는 농부와 손목시계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 논증은 평이해서 알아듣기 쉽다. 허무주의적 절망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와 제한이 있어 완벽하지 않다. 반틸은 현대 철학에서 목적적이란 의미가 무신론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카넬은 유한한 존재로부터 어떻게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박아론 박사는 제한된 범위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넷째, 도덕적 논증이다. 칸트는 도덕적 논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정하였다. 양심, 도덕질서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유추할 수 있다. 먼저, 야심논증은 양심으로부터 양심이 있게 하신 도덕적인 존재를 유추해 낼 수 있다. 바로 인격자 하나님이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그러나 양심으로는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을 보니까. 그 양심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요청)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인간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면, 다음으로, 도덕질서논증은 인간의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공동체 안에 있는 도덕적 논증의 외면적 진술이다. 도덕질서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하는 것이다. 성경도 긍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동양 철학에서도 하늘의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양심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