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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예배

예림의집 2012. 4. 24. 05:23

하나님의 나라 예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과 만나 남편을 데려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할 말 없으면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려고 합니다. 여인은 남편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예배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인이 꺼낸 문제는 예배 장소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수백 년 동안 예배 장소의 문제로 싸우며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고, 사마리아인의 성전은 그리심산에 있습니다. “어디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은가?” 이런 접근은 서초동에 있는 장로교회 가서 예배 드려야 더 은혜 받을까? 아니면 광진구에 있는 침례교회 가서 예배 드려야 더 은혜를 받을까? 으리으리한 성전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예배 드려야 감동이 더 클까? 아니면 조그만 오르간 하나 있는 시골교회 허술한 곳에서 예배 드려야 감동이 더 클까? 이런 쓸데없는 논쟁과 동일한 접근입니다.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늘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었을 때, 그 손을 붙잡아 주며 다가오신 하나님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자녀는 아버지 앞에 나갈 때 위엄과 경건이 가득한 모습으로 만납니다. 어떤 자녀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서로 껴안고 폴짝폴짝 뛰는 모습으로 만납니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만남입니다. 아버지의 영과 말씀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관계가 깨지고 예배가 단절됩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먼발치에서 아들임을 확인한 아버지가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에게 지은 죄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롬 3: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죄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고 예배를 단절합니다. 만일 예배를 방해받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돌이켜야만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이 죄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하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돌아서야만 합니다. 돌아서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생명의 다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 만남이 세상의 가치에 중독되어 끌려가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시작입니다. 열등감의 감옥, 수치심의 감옥이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생명의 빛을 향하여 꼭꼭 걸어 잠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순간입니다. 가치가 바뀌고, 관심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토론과 지식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삶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분과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 만났더니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동네 사람을 만나면 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입에도 담기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이 일 때문에 어두움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행한 모든 일이 간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간증의 핵심은 내가 만난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 사실이 그 여인의 모든 인생을 예배하는 삶으로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교회들이 참된 예배를 회복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