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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일어나라)/막 5: 35-43

예림의집 2012. 2. 27. 03:30

달리다굼(일어나라)/막 5: 35-43

<서론>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을 떠나서 다시 배를 타고 본래 떠나 오셨던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전과 다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야이로요 직업은 회당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 소녀는 야이로가 온갖 정성을 다하고 사랑으로 키운 12살 난 외동딸이었습니다(눅 8:42). 그런데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죽은자 살리신 사건들>

성경에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이야기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살렸고(왕상 17:22), 엘리사 선지자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을 살렸습니다(왕하 4:34). 베드로도 죽은 다비다를 살렸고(행 9:40), 바울도 죽었던 유두고를 살렸습니다(행 20:9-12).

예수님은 여러 차례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지로 가는 도중에 살리셨습니다(눅 7:11-17). 죽은 지 나흘이나 되고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요 11장). 이처럼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절망과 죽음을 지향하는 종교가 아니라, 희망과 생명을 지향하는 종교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절망과 비애와 죽음을 바라보는 종교가 아니라 희망과 기쁨과 영원과 생명을 바라보고 얻는 종교인 것입니다.

야이로에게 있어서 12살 난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그 소녀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최후로 죽어가는 어린 딸의 가쁜 숨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고 예수님께로 쫓아갔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고 사정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귀찮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끝장이 났습니다.

슬픈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러나, 우리는 회당장 야이로가 어떻게 처신을 했나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결단>

야이로는 가버나움 회당의 장로입니다. 회당장은 그 사회에서 유지에 속합니다. 많은 장로들 가운데서 뽑힌 사람이요, 공중예배에 있어서 모든 질서를 책임지고 일반적으로 회당의 일을 지휘 감독하는 사람이 회당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성경을 낭독할 자를 임명하고 설교할 사람을 초청하고 회당의 건물을 깨끗이 보관하거나 보전하는 일을 책임지고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회장당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여러 번 간구하였습니다.

*** 막 5장 21절-24절을 봉독
21절-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절-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절-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절-이에 그와 함게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1) 야이로는 그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막 5: 22).
일반적으로 말하면 당시 회당장은 예수님을 위험한 이단자로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어떠한 선입견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에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을 시켜보지도, 능력을 알아보지도 않고 판단하여 결정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선입견이 많은 축복으로부터 마음 문을 닫을 때가 있고 좋은 동역자를 잃어버릴 때도 있게 합니다.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대한 모든 과거의 선입관과 고정관념도 다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2) 회당장은 그의 체면도 다 버렸습니다(막 5: 22).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야이로, 하지만 이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의 발 밑에 그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최대의 존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체면도 다 버려야 합니다.

자존심도 다 버리고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주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겸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발가벗는 겸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장의 겸손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고, 예수님만을 의지했으며, 그 위기 속에서도 딸이 치료될 것을 믿는 믿음으로 간절히 간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서 "설마, 설마" 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전능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경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5절 해석>
35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절 해석>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의 의미>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소원이 사라진 후에 믿음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믿음을 갖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기 보다는 "예수님을 병고치는 이"로서 자기 집에 모셔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딸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병고치는 이로서는 모시고 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병고치는 이로서가 아니라 구주와 주님으로서 순수하게 영접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참 믿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딸이 방금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 탄식을 하거나 땅을 치면서 통곡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릇이 큰 사람은 생각도 크고 행동도 크고 신앙도 큽니다.


36절에 예수님은 혹시나 회당장의 신앙이 흔들릴까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번 믿었으면 끝가지 믿어야 한다.
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감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회당장이 흔들리려고 하는 것은 현실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어떤 일 때문에 주님을 믿는 어떤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회당장이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고 포기했더라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딸은 영영히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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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는 비록 자기의 목적한 바 대로 되지 않아서도 꾸준한 믿음이,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는 믿음이 그의 가장 귀하고 큰 소원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의 기쁨보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더 큰 기쁨도 있었습니다.

한가지 사건을 통하여 영육간의 문제를 다 풀어나가시는 여러분들이 다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시다가 야이로처럼 소원도 이루어가시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절 해석>
37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절 해석>
38절- 회당장의 집에 함게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

사람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가 있지만 자기의 문제가 크게 여겨질 때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는 이유는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대답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 하는 것이다. 성경의 요구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잊지 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을 잊지 말기만 하면 탄식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재대로 이해를 하고 있다면 낙심할 일도, 탄식할 일도 없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얻지 못하였기에 불안한 것 아닙니까?
파도로 인하여 배가 부수지기 직전인데도 잠을 자는 에수님이 계시는가 하면 불안해서 우리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법석을 떠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하실 뿐아니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그 분을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펄펄 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리에 대한 이해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에수님을 믿으면서도 안믿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가셔서 훤화하며 통곡하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38-39절>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가까이 닥아왔을 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초상이 난 집에서 울음소리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남독녀의 고명딸이 죽었는데 왜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제 겨우 열두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몹쓸 병에 걸려 고통당하다가 죽었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예수님은 웃음이 있는 가나 혼인잔치집에 가셔서도 기적을 행하셨고 슬픔을 당한 야이로의 집에 가셔서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낙관주의자도 아니고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뒤따르게 마련이고 문제가 있는 곳에 주님은 사랑으로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시는 분 이십니다.


한생명의 죽음은 부모와 그리고 일가친척과 주변의 사람들 또 문상객까지 많은 사람을 슬프게 만듭니다. 이럴 때 위로자가 되시는 주님이 이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슬픔의 안개를 걷우고 기쁨의 밝은 햇살을 비춰 주셨습니다. 참된 위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님만이 참 위로자가 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사40:1절 말씀 "네 백성을 위로하라" 고 하셨는데는 위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위로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늘도 슬프고 괴롭고 고통을 당한 내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며 내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39절 해석>
39절-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지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잔다의 의미-중요/예수님은 죽음을 죽음으로 보시지 않고 생명으로 보셨습니다-39절>

다시 본문 39절을 봅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여기 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도의 죽음이후에는 부활이 있다는 엄청난 교훈의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은 그 예표로 지금 죽은 자를 잠자는 자 가운데서 깨우듯이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어나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찌했습니까. 죽은 소녀를 향해서 "달리다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사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전도가 무엇입니까? "달리다굼"하는 일입니다. 죽은 생명이 일어나는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살았으나 죽은목숨입니다.

계3:1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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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아이가 잔다" 고 말씀하신 것은 시체를 보기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 앞에는 죽은 것이나 자는 것이나 그 상태가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호흡이 끊어져 죽은자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어나라" 하시면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면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죽은 것과 자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죽은 것 =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자는 것 =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날 때 우리 주님이 "일어나라" 는 말씀 한 마디에 모두 신령한 몸으로 살아 부활하여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잠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전4:14절 말씀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자는 것으로 보신 것 입니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은자를 산자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을 삶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절망을 만났을 때도 절망 저 뒷편에는 소망이 있고, 죽음 저편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파란 하늘이 먹구름에 가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쳐도 그 구름 저편에는 여전히 파란 하늘이 있고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구름이 가리웠다고 해서 파란 하늘이 까맣게 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긴 장마라도 그칠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의 다시 영적으로 소생(소성)하려면....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라>

(1) 와야 합니다.
"나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고 하는 절실함이 있어야 하며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고 하는 고백이 있어야 만이 예수님께 나아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모든 문제를 이상 없이 해결해 주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2)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군중들 속에 섞여 있을 때 야이로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을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많은 군중들만 보면서 자신을 의지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좌절하지는 않는지요. 분명하고 똑똑하게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님만이 바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3) 발아래 엎드려야 합니다.
회당장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육적으로는 아무 지위도 없으신 예수의 발아래 엎드린 그의 믿음과 겸손은 구주이신 주님께 대한 최대의 존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주님이 아주 가깝게 계시다고 해서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불 경건 스러워서는 안됩니다. 가장 존경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과 태도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4) 많이 간구하여야 합니다.
주님 자신도 낙망치 말고 많이 간구 하여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조금 기도해보고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지녀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응답이 어떠한 경우로 이루어진다 해도 많이 간구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주님을 믿습니까? 한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면서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도움을 주시며, 기도하면 이루어주시는 주님께 나아가 우리가 어떤 절박한 환경에 처할 때에도 우
리를 도와주시는 단 한 분이심을 믿고 보고 엎드려 간구하는 신앙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40절 해석>
40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다 내어 보냄의 의미-신앙, 믿음의 분위기를 조성하자>

a. 육체적 향락(분위기, 환경)을 피하라

육체의 향락을 도모하는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유혹하는 처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드렁가면 육신의 정욕에 취해 영적인 세계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환경을 적극 피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TV나 저속한 프로그램이나 저속한 음악,잡지 등을 피해야 합니다. 저속한 음악같은 것은 사람을 흥분시킵니다. 요사이 사단 음악이 많은데 사단이 이 음악을 통해 젊은이들을 미혹하고 타락시킵니다. 이 더러운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저속한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b. 믿음의 분위기 및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분위기는 중요합니다.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는 하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자란 곳 나사렛에 가니 모두 배척하여 불신앙의 그곳에서는 큰 일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도 믿음이 강한 베드로와 야고보,요한만 데리고 어린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방은 이제 믿음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땅의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 딸아 일어나라'하시니 즉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불신앙의 분위기를 추방, 신앙의 분위기를 조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의심과 냉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개하며 생활의 정리정돈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라면 교회의 분위기를 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으로 굳건히 서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분위기를 바꿔야 됩니다. 불안과 초조, 절망과 의심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우는 자들을 쫓아낸 것처럼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마음속의 불신앙적인 것을 쫓아내고 온전한 신앙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주님께서 와서 일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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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위기 및 환경 속에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너희가 모이기를 힘써 모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모이는 것'은 놀라운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 '너희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고 하셨는데 이 얼마나 놀라운 분위기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이면 예수님도 그 가운데 와 계시기 때문에 믿음의 분위기 속에, 믿음의 환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천을 쫓고 두 사람은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혼자의 믿음이 천의 원수를 쫓으면 두 사람의 믿음이 합치면 만의 원수를 쫓는 위대한 분위기와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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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령과 원수 마귀는 분위기 만들기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단의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그 속에 몰아놓으려고 하고 성령은 성령의 분위기를 만들어 그속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찌 하든지 주님편에 서서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 중심에 서고 지속적인 말씀공부와 기도, 찬미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찾아가며 젖어 살때 너도 살고 나도 살고 하늘나라가 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기적의 역사를 통하여 함께 은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41절 해석>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움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 본문의 41절에서 "일어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일어나라" 는 말씀이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가 쓰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의 대적 사탄은 우리들을 쓰러뜨릴려고 우는 사자와도 같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사탄은 끊임없이 서 있는 사람은 쓰러뜨리고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날 때 주님은 능력의 손으 로 붙들어 주실줄 믿습니다.<아 멘>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 왕상19:5절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영적으로 곤비하고 기갈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과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2) 이사야 60:1절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3) 요한복음 5:8절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실 때 그 병자가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4) 사도행전 3:6절<찔림>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시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년 다녔어도 잡아 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놔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 뛰기도 하며 걷기도 하는 믿음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5) 마태복음 26:46절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홀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마지막 군병들이 잡으려고 올 때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죽는곳 까지라도 가야 합니다.

(6) 에베소 5:14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태와 게으름의 병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복음성가>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때 나를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걸어라 내너를 도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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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말씀대로 죽은 딸을 자는 아이 깨우듯이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의 의미>
주님께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달리다굼은 히브리어 발음인데 "달리다"라는 말은 소녀를 뜻한 것이고 "굼"은 일어나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 라는 합성어입니다. 즉 달리다굼이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전능자의 명령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에 사망권세가 쫏겨가고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할렐루야!!


죽음이 생명에게 여지없이 패배를 당하고 순종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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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의 영적의미>
첫째 달리다굼이란 죽은 자를 일으키는 주님의 권능의 음성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신 기사가 세 곳이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 젊은 청년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을 때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눅 7:13-14절에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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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달리다굼이란 환난 날에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응답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차이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소녀의 아버지 야이로는 예수님을 급히 찾아가 간청하고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여러분들을 사랑과 용서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환난이 임하면 안심하고 주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달려나와 기도로 주님을 찾으시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시 118:5에서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환난 중에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뻐쳐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야이로의 간청에 응답하시고 구원의 발길을 야이로의 집으로 돌리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달리다굼이란 환난 날에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의 응답입니다.

<기도 예화>

세계 2차대전 불란서가 독일 군대에게 패했을 때 영국은 삼십만 지원 병력을 보냈으나 작전상 다시 영국 군은 배를 타고 도버해업을 통하여 영국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후퇴하는 영국 군의 소식을 듣고 히틀러는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도버해엽으로 후퇴하는 영국군은 이제 독일 군에 의하여 모두 전멸 당하는 위기 놓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의 조오지 6 세는 온 영국 국민에게 '어떻게 하든지 이 환난에서 영국 군대를 무사히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기도를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짝기 독일 진영에는 때아닌 폭우가 쏟아져 비행기 한 대도 못 뜨고 탱크 한대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십만의 영국 군 병력을 싫고 항해하는 도버해업에는 맑은 날씨와 바람 한 점도 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삼십만의 영국 군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시50:15에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달리다굼은 환난 날에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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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달리다굼은 영적으로 잠자는 자들을 일으키는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 시간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심령들은 "달리다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 다. 우리모두 기도의 제목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 성도들처럼 살았으나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아니면 에배소교회 성도들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처럼 말씀을 들어도 심령이 냉랭하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원수 마귀는 우리가 영적으로 잠잘 때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성경은 증거 마13:35에서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심령이 어둡고 영적으로 잠을 자게 되면 세상에 것들인 가라지 들을 뿌리 고 갑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게 되고 명예를 추구하게 되며, 권세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됩니다. 여러분 ! 휘황찬란한 세상의 불빛들은 밝은데 사람들의 마음은 자꾸 어두워만 갑 니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물질 만능 주의가 팽배하고, 윤리 도덕이 타락이 되고 심지어 신앙의 세 계까지도 오염이 되어 가는 이때에 "잠자는 영혼아 일어나라 ! 믿음과 사랑이 식어 가 는 자녀들아 일어나라"


주님은 우리를 향해 '달리다굼'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영적으로 깨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떠나 방황하는 나에게 주님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세상 끝날 까지 나에게 "달리다굼" 하시면서 영적인 잠을 자는 나를 부르시고 깨우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믿음의 잠에서,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충성의 잠에서, 기도의 잠에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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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계3:1절 말씀에 사데교회에게 하신 말씀대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 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인생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영적인 생명을 잃어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신자가 되어 버렸고, 지난날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체험을 하였어도 지금은 그 기쁨이나 감격은 모두 사라지고, 마치 가물가물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상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예 찔림>
연료가 떨어져서 달려가던 자동차가 서 버린것과 같이 영력이 쇠진하여 신앙 생활이 정지된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상태가 어떤 형편인지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상태가 약해졌을 때는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의지하는 돈가지고도 안됩니다. 명예와 권세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이 찾아 오셔서 지쳐 쓰러진 엘리야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먹으라" 고 일으켜 주신것처럼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아멘!>


(수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호수아가 아이성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난후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티끌을 무릎쓰고 저물도록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은 죄를 용서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기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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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심령이, 믿음이, 신앙이, 쓰러졌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쓰러졌을지라도, 설령 죽었다 할지라도, 이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소녀가 살아나 일어나서 걸은것처럼 정지된 믿음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야이로의 집에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근심도 사라지고, 훤화하는 사람들도 물러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슬픔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염려와 삶의 고통이 있습니까?

사망권세도 이기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성전 미문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기도 하며 걷기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린 것처럼 이제부터 여러분의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로 변화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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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잔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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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도 다시 살아남(영적 회복)의 기쁨을 맛보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다시 살아남의 기적, 그것이 나의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삶이 다시 살아남의 기적을 경험하려며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올 줄 알아야 합니다(막 5:22-23절).

마가복음 5장 22절과 23절을 보시겠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 소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 마지막 소망을 예수께 걸고 그는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도 회당장 야이로가 한 것처럼 우리의 문제, 근심, 어려움, 질병, 문제들을 예수님앞에 나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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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 가셔야 합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었어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셔야 합니다. 막 5장 24절입니다. "이에 그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자, 어떤 일이 생겼어요? '선생님 살려주세요.' 예수님이 응답하세요. 여러분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하실줄 믿습니까? ....함께...가실새...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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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속에서 마침내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시길 원하신다면

세번째로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매우중요).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다같이 36절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 하는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네. 이 절망의 상황 한복판 속에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세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따라서 하시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은 현재 시제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현재 명령형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두려워 말고 믿어라. 계속해서 믿어라 이 말입니다. 상황 끝이예요. 절망이예요. 그런데도 주님은 아직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믿어라. 이 순간 속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최후의 절망, 마지막 절망은 뭐예요. 죽음 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삼킵니다. 어린이도 삼킵니다. 노인도 삼킵니다. 죽음의 확률은 100%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이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또 하나의 부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은 이 무덤 앞에 오십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뭐라구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네가 나를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위대한 선포에 이어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가 이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을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42절 해석>
42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아이 열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절 해석>
43절-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 구호! ===========
내 질병(육체)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영혼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영성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가족(가정)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교회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부서(중고등부)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친구아! 달리다굼(일어나라)

내 사업(직장)아! 달리다굼(일어나라)

우리나라아! 달리다굼(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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