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찬양팀 영성 훈련

영성 훈련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예림의집 2012. 1. 29. 05:11

영성 훈련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성공은 사전에 결정된 가치 있는 목표의 진취적인 실현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 존 맥스웰

 

우리는 모두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왜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인생은 성품을 훈련하는 학교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천국에서 살아 갈 성품을 개발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정직, 온유, 믿음직스러움,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품을 훈련하여 예수님을 닮아 가기를 원하신다. 영성 훈련에는 분명한 목표와 이유와 방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역에서 문제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중요하고 진지한 단어들을 선포하지만 이유와 방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라고 말하지만 왜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잇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며 실제로 적용하는 데 매우 약하다.

 

오늘날 성도들은 기도에 대해 열 시간을 공부해도 십 분을 기도하지 못한다. 말씀을 가까이하라고 하지만 어떻게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지, 말씀이 능력이 되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보족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헌신하면서도 답답해하고 심지어는 속은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고 이유와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건한 무책임이라는, 교회에 치명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현명해야 한다.

영성 훈련은 내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 우리의 뿌리 깊고 처참한 죄의 습관을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시도라"(엡 4:14-15).

 

영성 훈련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같아지는(like Christ)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원하신다. 이 '완전함' 이란 단어에 부담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사용하신 위대한 성경 인물들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죄를 지었고, 실수와 허물이 적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교육하셨고 그들은 그 교육을 통해 성숙했다. 말씀이 뜻하는 '완전해짐' 은 '성숙해짐'(become mature Christian)이다. 우리는 완전(perfect0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that you may becone mature Christians and may fulfill God's will for you"(philip, 골 4:12 후반절0.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뿌리 깊은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중성이다. 이중성은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동차 뒤에 이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닌다. "에수님이 오십니다. 바쁜 척 하십시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장 싫어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지 못하여 비천하고 미숙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리처드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그럿이 결핍되지 않도록 하라. 남들에게는 멸망을 경계하라고 경고하면서 자신은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들에게는 밥상을 차려 주면서 자신은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남들에게 밥 먹듯이 타이르며 하는, 믿으라는 말을 자신도 그대로 믿으라. 남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자신이 먼저 다정하게 모셔 들이라."

 

나는 내 삶을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고 그냥 연구한 것으로 강단에 서는 것이, 목사인 자신과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체험했다.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기 전에 제자로 부르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내가 무슨 설교를 해야 합니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셨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의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이중성은 편안한 신앙 생활 습관에서도 발생한다. 확고한 구원의 확신과 회개가 있는 사람은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의 이중성이 없다. 확실한 믿음의 고백과 선교와 순교만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에 대한 절박함이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순간 교회에는 신앙을 교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한갓 장신구에 불과했고, 그래서 자신의 편리대로 교회에 출석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태도는 오랜 역사 속에 변치 않고 이어온 사탄의 효과적인 유혹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편리함을 위해 적당히 거짓과 타협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가치를 알기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르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기꺼이 수고한다. 영성 훈련의 목표는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도는 구별된 자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훈련한다. 믿음과 거룩함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 누릴 수 있는 유쾌한 속성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9:29).

영성 훈련의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우리는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게 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과 닮아 있는지를 보신다. 하나님은 인생의 내용을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이 많았는지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재물을 많이 사용했는지를 보신다. 영적 훈련은 인생의 본질에 관한 민감성 훈련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바울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어떤 사람은 명예에 살고 돈에 죽는다. 그러나 성도는 인생의 초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맞춘다.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의 존귀하심을 안 바울은 천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았고, 그분이 원인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영성 훈련의 목표는 에수님을 얻고 누리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만나고, 성령님을 만난다. 성도의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성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예수' 다.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모든 것을 붙잡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 훈련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며, 복음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이다.

 

영성 훈련에서 중요한 목표 또 하나는 형통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형통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형통의 방법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가 형통하기를 원하시고 성도의 형통에 관심이 있으시다. 아버지가 자녀의 형통을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자녀인 성도의 형통을 바라신다. 영성 훈련의 목표는 성도의 형통이다. 형통하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고 그것을 붙잡는다. 형통하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기 전에 먼저 핵심을 안다. 형통하는 성도는 분별력을 훈련하는 사람이다. 현통하는 성도는 본질과 비본질을 분멸한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삶의 우선순위가 있다. 형통하는 사람은 항상 본질을 붙잡고 그것에 초첨을 맞춘다. 형통하는 사람은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안다. 그리고 핵심을 붙잡으면 나머지가 따라온다는 원리를 안다. 예수님도 분명한 우선순위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성도에게 본질은 하나님이다. 성도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형통의 비결이다. 본질을 붙잡으면 형통이 따라 온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신다.

성경은 형통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열매를 맺는 것은 형통이요, 시냇물이 마르지 아니하는 것이 형통이다. 형통하는 사람은 복을 좇는 사람이 아니다. 형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형통하는 사람은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다. 형통하는 사람은 복을 추구하여 환경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복된 존재가 되어 형통하는 환경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광야를 선택하면 광야가 복 있는 장소가 된다. 복 있는 사람이 디면 장소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 형통은 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복이 따라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증언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