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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예림의집 2011. 12. 13. 03:04

신학의 잘못된 방법들

기독교 역사상 신학의 몇 가지 잘못된 방법들이 있었다.

첫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교권주의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방법이다. 그 대표적 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로마 교회는 이론적으로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함께 권위 있게 여기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회를 성경보다 더 권위 있게 본다. 그들은 교회(교황과 회의들)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진리의 최종적인 무오(無誤)한 해석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교회 혹은 교황이 무오(無誤)하다는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무오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말씀하셨고(마 15:3), 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기도 하셨다(마 16:23). 이 말씀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실상 천주교회의 역사는 교황 무오의 교리에 반대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의 무죄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가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으나 이것들은 다 비성경적이다. 또 그레고리 1세(590-607)는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607년 그런 칭호를 받았다. 또 씩스투스 5세(158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했으나 피우스 7세(1800-23) 등 여러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했는데 이런 모순된 선언들은 어느 한쪽이 분명히 오류이다.
교회의 권위는 무오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감과 배려로 사도들을 통해 신약을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셨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은 스스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이 성경적일 때만 권위를 가진다.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이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회와 교회의 교훈들의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해야 한다.

둘째로, 신학의 잘못된 방법 가운데 다른 하나는 이성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성은 진리의 최종 판단자로서 이성에 맞는 것은 진리가 되고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비진리가 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잘못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짐에 있어서 사람이 최고 권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은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사람이 우주와 우리 자신의 구조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와 사람의 창조자이신 완전자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욥기 11:7은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했고,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셨다(마 22: 29).
더욱이, 자연 이성 즉 타고난 대로의 인간 이성은 죄로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의 바른 원천이 될 수 없다.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고전 1:21), 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고 했다(고전 2:14). 또 그는 말하기를, "저희[이방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고 했다(엡 4:18).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이성주의는 신학을 철학화하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경험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의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최고 권위로 보는 것이다. 이성주의와 정반대로, 이 견해는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진리에서 제외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나머지 다수가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신학을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릿츨은 신학을 사람의 종교 도덕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이다. 유한자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겸손히 의존해야 한다. 또 사람은 실제로 현재 하나님의 진리들을 다 경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천지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 밖의 과거의 특별계시의 일들, 그리고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 등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7-29)라고 하셨다.
더욱이, 사람의 종교적 경험이나 감정은 진리와 오류, 하나님의 계시와 계시 아닌 것을 혼동하기 쉽다. 이방 종교인들도 매우 종교적일 수 있다. 구약의 바알 숭배자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열왕기상 18:28에 보면,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였다'고 말했다. 아덴 사람들도 매우 종교적이었다. 사도행전 17:22에 보면, 바울은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고 말했다. 종교적 감정이 종교에 필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사람의 도덕 의식도 그러하다. 양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의식에 기초한 도덕적 신관, 도덕적 종교는 완전치 못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다(롬 3:10-12). 실상, 신학의 경험주의적 방법은 신학과 종교 심리학을 혼동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종교 심리학은 될 수 있으나, 신학은 될 수 없다.

넷째로, 신학의 잘못된 또 하나의 방법은 신비주의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을 신학의 원리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시고 전달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내적인 빛 혹은 내면적 음성이라고 부른다. 교회 역사상,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했다(딤후 3:16). 또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사8:20). 신비주의는 이성의 정당한 기능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하고 정상적인 인식과 판단의 도구이다. 덧붙여, 신비주의적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명확히 분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빈번히 탈선하는 데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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