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고 무한하신 분이시며 사람은 피조물이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에 관해 다 알 수 없다. 욥기에 소발이 "내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하고(욥 11:7) 엘리후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한 것은 정당한 말이다(욥 36:26). 아다나시우스는 "사람은 능히 하나님의 옷자락을 알 뿐이요, 그 나머지는 그룹들이 날개로 가리웠다"고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제한되고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 27), 그리고 이제 성경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하여,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씀했고(호 6:3),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했다(사 11:9). 주 예수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하는 칸트의 지식론이나 인간이 진리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사상은 정당하지 못하다. 특히 회의주의자들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신념을 가지는 것은 자기모순적이다.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그들의 신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사상에 반대된다.
신학의 방법--세 가지 원리들
신학의 방법, 즉 하나님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흔히 세 가지 원리로 표현된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신과 온 세계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학자 중에 학자시요 과학자 중에 과학자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시다. 사람의 모든 지식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일반 학문도 그러하지만, 신학은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지식이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닮은 지식이요, 그 지식을 조금 나누어 가진 부분적 지식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를 떠나서는 그에 대해 확실하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예수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또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복음 진리]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했다(고전 2:10).
둘째는 '지식의 외적 원리'이다. 이것은 성경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유일한 원리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성경을 신학의 일차적 혹은 중심적 원리라고 하고, 자연 계시,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인의 경험 등을 신학의 부수적 원리로 본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여러 특별한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을 성경에, 성경에만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그 유일한 저장소인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의 객관적 원천이다.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진리들은 성경에 객관적 형태로, 완전하게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또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진리를 논하거나 기독교 신학을 정립할 수 없다.
셋째는 '지식의 내적 원리'이다. 그것은 믿음과 이성을 가리킨다.
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누구든지 참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참지식의 시작이다. 마태복음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믿음의 지식은 성령의 내적 활동에 의해 생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말씀과 함께 활동하셔서 그러한 지식을 주신다. 성령의 내적 활동이 없이는 아무도 참된 믿음과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히 인간에게 내어 맡겨진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역이다. 성도의 확신의 근거도 성령의 내적 활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면적 활동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하셨다(요 16:13).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고(고전 2:12), 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고전 12:3). 사도 요한도,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라고 말했다(요일 2:27).
그러나 이미 믿은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성(理性)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다.
첫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백치(白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만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
둘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한다. 성령의 증거는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을 배제하거나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2-3)고 하였다. 바울은 다른 곳들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행 18:4; 19:8; 20:7). '강론하다, 증명하다'는 말은 이성의 판단이나 논증 등 이성의 활동을 가리키거나 내포한다. 핫지는 말하기를, "성경은 도무지 상당한 이유에 의함이 없이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워필드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요 불합리할지라도 믿는 것은 아니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불합리한 믿음, 즉 정당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셋째, 이성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을 정돈한다. 하나님의 진리들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돈하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학문은 정돈된 지식 혹은 지식의 체계화이며, 이성의 작용과 활동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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