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시편이 말하는 '심판' -②

예림의집 2011. 1. 13. 11:59

시편이 말하는 '심판' -②

 

가령 그분이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이 사람들은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프 레이스 판사나 나치 정권에 봉사햇던 판사 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즉, 증인이나 배심원을 협박해 무죄한 사람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뒤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인물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형사재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말씀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은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그의 법정은 우리가 강제로 들어가게 될 위험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정반대로 그의 법정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민사소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안 되는 땅에서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던 가난한 여인(눅 18:1-5)은 돈 많고 힘 있는 이웃(오늘날로 말하면 도시 개발업자 혹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조직)에게 땅을 빼앗겼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소송을 제기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법정에 들어가 국법에 따라 심리만 받을 수 있다면, 그녀는 분명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고, 그녀가 재판을 받을수 있도록 도와 주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가 '심판, 즉 재판'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 뒤에는 인류의 오래된 보편적 경험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사정은 받아들여지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재판관에게(아랫사람 한두 명 정도 더 포함해)뇌물을 주어야 재판을 받을 수 잇었습니다. 뇌물을 건넬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판사들은 뇌물을 받지 않지만 말입니다(우리는 이런 복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결코 유지될수 없는 복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과 예언서들이 심판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는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는 것에 대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은 부당하게 재산을 강탈당한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이 마침내 받아들여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소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고소장이 수리되기만 하면 그들은 반드시 승소할 수 박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