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예수는 나의 주님
고등학교시절 한 친구가 물었었다. “너는 거듭난 날을 알고 있니?“
꼭 그 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당시 지도하시던 강도사님에게 여쭤봤다.
“강도사님, 우리는 거듭난 날을 알아야만 하나요?“
그분은 현명하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다메섹을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거듭났지만 베드로는 언제 거듭났겠니?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때일까(마 16:16)? 아니면 주님을 처음 만난 때일까(요 1:42)? 아니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주님을 사랑합니다(요 21:15-17)고 고백한 때이거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 한 후에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인가(행 1:15)? 거듭나는 것은 바울처럼 명확히 아는 경우도 있고 베드로처럼 모르는 경우도 있단다.“
그래도 나는 다행히 한 날을 찍어서 말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 날은 음력으로 내 생일이었다. 1971년 8월 3일 화요일. 대학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학원 단과반에 등록한 나는 모두들 떠난 여름수련회를 따라가지 않았다. 물론 내가 다른 교회에서 옮겨 그 교회에 나간지 한 달밖에 안되었다는 이유도 있었고 그 동안 여러 가지 교회생활을 해 보았지만 수련회를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들 수련회로 떠난 다음날 슬며시 수련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생일날 공부한다는 것이 너무 심하다 싶어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교회 수련회 장소로 혼자서 찾아갔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경기도 팔당을 향하여 시외버스를 타고 또 배를 타고서 배알미리라는 곳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잘 찾아 갔다.
수련회장에 가니 친구들이 반겼다.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강에서 수영도 하고 저녁을 먹었는데 저녁집회에 참석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아마 한국여인의 표상같이 예쁜 담임선생님과 그동안 함께 집을 가곤 했던 회장 그리고 유달리 나한테 친절했던 부회장의 강권함이 마음을 움직였나보다.
집회가 시작되고 부목사님의 설교가 있었는데 구원초청에 관한 내용이었다. 요한복음 3:16과 갈라디아 2:20이 핵심이었다. 집회가 계속되는데 부회장이 먼저 감동이 되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갑자기 장내가 숙연해 지고 목사님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물으셨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맨 뒤에 앉아있던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동안 복음을 체계적으로 듣지 못했던 나에게 이 질문은 설교의 내용에 근거한 답을 찾게 하였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나는 그분의 종입니다.“
찬송과 감격의 기도가 이어진 집회를 마치고 나는 회장과 함께 어두운 밖으로 나가 근처의 한적한 장소로 가서 각자 기도를 하였다. “주님,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제 나의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이 때 함께 기도했던 회장은 그 이후로 김한식선교사와 함께 한사랑선교회를 시작하였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였다. 목사가 되어서는 제자훈련원을 운영하면서 수천명의 목사님들에게 제자훈련을 시켰고 이제는 성남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다.
수련회를 마치고 우리는 노방전도를 하게 되었다. 매주일 오후 중고생과 대학생이 사영리로 전도훈련을 받은 후에 팀을 이루어 뜨거운 여름 낮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 국립의료원 등에서 전도를 하였다. 주님을 모르는 영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부정하는 일들에게 대응하기 위해 성구를 암송하면서 신앙을 다졌던 좋은 기회였다. 대원들의 열정이 식어진 얼마 후에는 전도부장이던 내가 주축이 되어서 고등학생 위주로 추운 12월에도 교회근처에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축호전도를 하였었다.
그 때 내마음을 표현한 성경구절은 이런 것들이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한 동안 이 성경구절은 완전하게 변화되지 못한 나를 채찍질 하였다. 그러다가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개인적인 노력이나 선행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태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 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나도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살아계신 것이며 그 분이 살아계시기 위해 내가 그 분을 위해 살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2).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얼마 후 지금은 총신대학교 총장이 되신 우리 전도사님이 물으셨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나는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컴퓨터를 전공해서 돈을 조금 벌어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싶습니다.“ 당시에 우리 가족은 어렵게 살았었다. 그리고 나는 수학을 좋아해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일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주님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나니 고민이 되었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러던 중에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생각이 났다.
나는 육이오가 끝나고 나서 태어났다. 당시 서울에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밤이 되면 정전이 되곤 하였다. 세 살이었던 그 날 밤도 정전이 있었다.
그러자 식구들이 모여 앉아서 형님이 성냥불을 켰다. 석유램프에 불을 붙이자 방안이 환해졌고 형님이 엉겹결에 실수를 하여 재떨이에 버려야할 불붙은 성냥개비를 성냥통에 놓았다. 당시에는 성냥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유엔탑이 그려진 팔각형의 큰 성냥통을 사용했었다. 그러자 1800개 정도의 성냥개비가 담긴 성냥통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천장까지 불길이 솟았다. 다행이 불은 나지 않았지만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얼굴을 불길이 지나갔다. 얼굴이 타고 머리카락이 탔다. 눈썹도 탔다. 얼굴은 짓물러지고 눈을 뜰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련회를 마친 고2 여름 어느날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왜 나는 시력을 잃지 않았을까?’ , ‘왜 내 얼굴에는 흉터가 없을까?’ 어린 내가 쌓은 공덕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현재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셔서 하나님께 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신 것이 아닌가(롬 5:8)? 이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구나. 그 후에도 여러 번의 위험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깨달음이 왔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임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다면 이 사랑에 내가 어떻게 보답할까? 나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학자가 되자. 그리고 학문을 하려면 신학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이렇게 생각하니 모두가 반대하는 신학대학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완강한 반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편에 따라 무산되고 가난한 나는 특별전형을 통해 신학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가 있었다.
구체적인 기도의 응답
학교생활은 행복하였다. 4년 동안 영어와 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신학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손봉호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교수님들이 많은 깨우침을 주셨고 모든 수업이 좋았다. 그리고 좋은 선배와 친구들이 있어서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데 귀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군입대가 문제였다. 원래는 1학년에 군목시험이 있었지만 사병으로 군생활을 하면서 연단받겠다는 생각으로 포기하고 2학년을 마칠 때는 하던 공부를 마저 하고 싶은 마음으로 군입대를 졸업 때까지로 미루었다.
4학년이 되면서 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학사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제가 학자가 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하니까 저를 미군부대로 보내주세요.”
열심히 기도하다가 어느 날 이기적인 내 기도에 회의가 들었다. 당시에 카투사가 되는 것은 편한 군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내용을 바꾸었다. 이미 군에 다녀온 친구에게서 전방에서 군종으로 일하면서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힘든 군복음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래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도하였다. “하나님, 전방에 군종사병으로 보내셔서 잘 훈련받고 열심히 일하게 해주소서.”
드디어 대학을 졸업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4월 7일 지금은 대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 왕십리역에 집결하여 논산훈련소로 갔다. 보충대에서 여러 날을 기다리다가 내 눈의 시력이 문제가 되어서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그런데 후에 사격할 때 보니까 안경이 의미가 없었다. 안경을 껴도 200m 떨어진 곳의 표적이 잘 안보여서 거추장스런 안경을 벗고 사격을 했는데 만점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오른쪽 눈은 0.8, 왼쪽은 0.6이었는데 내 왼쪽 눈은 이전에 앓았던 안질환으로 시력교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친구와 헤어지고 서울에서 내려간 1500명 가운데 마지막 남은 30명에 끼어 가장 늦게 훈련소에 입소하여 27연대에 배속되었다. 6주간 훈련을 마치고 정보(06)주특기로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배출대에서 기다리는데 같은 정보 주특기의 친구는 하루 먼저 사단정보과로 가고 나는 그 다음 날 225명이 함께 한 「미륙대」로 배정받았다.
밤차를 타고 간곳은 평택에 있는 미군부대였다. 거기서 3주간 후반기 교육을 받은 다음에 동두천에 있는 미2사단에 배속되고 그 다음날 의정부 남방리에 있는 미제63방공포대로 배치되었다. 일주일간 대기상태로 있다가 월요일에 명령받은 곳은 본부중대 보급반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일터라고 생각하고 오전 내내 열심히 일하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내가 아니고 함께 배속받은 동기였다. 나는 그로부터 2주간 더 대기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렇게 오랜 동안 대기상태인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틈만나면 인사과 옆에 있는 부대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찬양을 하면서 기다렸는데 드디어 발령받은 곳이 바로 그 교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얼마 후에 제대하느라 삼성그룹에 입사시험을 치르는 중이던 카투사 인사계(중사)가 기독교인도 아니고 통상적인 보직배정에 대한 뇌물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 대대장과 사단 교회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나도 모르게 군종사명으로 발령을 받게 한 것이었다. 우리 부대가 생긴 이래로 카투사 군종 사병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대한 후 얼마 있다가 그 자리가 없어졌다.
결국 내가 미군부대에 배속되고 더구나 군종 사병이 된 것은 놀라운 일, 바로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기도 응답에 마음을 다잡아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미군 예배를 준비하면서 카투사 예배를 신설하여 설교하고 주일저녁과 수요일 저녁에는 의정부 제일교회로 사람들을 인솔하여 예배드리게 하였다. 그리고 매주일 마다 의정부에 사는 여자친구와 친척 여동생이 면회를 와서 교회 예배를 도왔더니 부대원의 1/4 정도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 부대는 유달리 청주 출신이 많았는데 제대한 고참들이 부대에 남아 있던 나를 초대하여서 청주에 가서 만났더니 나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어 “선생님“이 되었다.
<< 사랑과 만남의 기술 >>(예루살렘 출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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