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와 인간의 자율성
서울신학교 신학교 3학년 야간 20081005 김정민
기독교 윤리는 타락한 인간을 행위의 주체로 삼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아름다운 윤리적 실천이 가능하지 않으며 진술한 윤리적 딜레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기독교 윤리적 실천의 주체는 복음 진리에 의해 중생한 인간이다. 중생한 인간에 있어서 속사람은 성령에 매여 있고 겉사람은 아직도 죄에 매여 있다. 따라서 중생한 인간 역시 스스로의 능력으로 윤리적 실천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에 의하여 깨달아지는 진리의 능력이 속사람을 자라게 함으로 아름다운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윤리적 행위의 동인은 성령 하나님이시며 중생한 인간은 도구적 주체일 뿐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기독교 윤리는 자기 모순적인 윤리적 당위와 본능과의 갈등 문제를 복음 진리 안에서 해결한다. 십계명중 6 계명에서 대표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위적 명령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실천으로 수행된다. 타락한 인간은 결코 그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며, 그 율법의 정죄아래 놓여 있었다. 그래서 입법자이신 그리스도가 율법아래 오셔서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이것이 복음인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고 복음진리 안에 있는 성도는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자기 중심적 본능, 즉 육신의 소욕으로는 이웃 사랑이라는 윤리적 당위를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 안에 복음 진리에 의해 생겨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윤리적 당위를 수행해 감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철학적 윤리에서 생겨나는 당위(규범)와 본능과의 갈등과 부담은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믿음의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 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11:28-30)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목적은 철학적 윤리처럼 인간 자신의 윤리적 실천을 통한 지상에서의 이상적인 사회의 형성에 있지 않다. 성도는 복음의 능력 으로 아름다운 윤리적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실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실천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깨달아 다시 말해 성도의 윤리적 실천의 배후에서 능력을 주시고 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깨달아 그를 경외케 하려는 데 기독교 윤리적 실천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실천은 이웃과 더불어 있는 가정, 교회, 사회에서 성도가 진리를 깨달아 가는 농도만큼 이루어져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의 완성이 지상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부분적인 실천은 천국의 완전한 이상적인 모습의 모형이다. 천국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사랑하는 완전한 실천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만 경외하며 찬송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윤리의 미완성적으로 실천한 바대로 완성될 천국을 소망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니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이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요한계시록22:3-5)
결국 기독교 윤리의 독자성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철학적 인복적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하나님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윤리적 실천의 모습에 있다.
1. 예수님의 윤리관
예수님의 윤리는 수평적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면 사람에 해한 사랑은 용서와 이해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든 문화권에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의 표현 방법은 한결같지 않으며 사랑은 교제의 형태에 따라 다르게 표현 되고 있다. 사랑의 감정은 어떻게 표현되고 만들어 지는 것일까? 정신의학자들은 두뇌작용에 의해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뇌의 작용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은 서로 다르다. 사랑은 관심의 바탕에 둔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사랑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감은 사랑을 더욱 뜨겁게 해준다. 사랑은 서로의 욕구를 채워주는 배려이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분노는 의롭게 사용되면 정의로 나타나고, 부정하게 사용하면 혈기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에게 분노하신 사건은 개인적인 혈기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였다. 우리는 공평이란 단어와 공정이란 단어를 혼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정하신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 공정하신 하나님이었다면 이 세상에는 차이가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세상은 다양성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공평함 속에는 사랑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정의가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상주의요 힘이 정의라고 믿는 사람은 현실주의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감정은 두 가지 종류인데, 첫 번째는 외부로 오는 공포와 내부로 느껴지는 근심, 초조, 불안, 조바심, 긴장감이 있다. 사람이 실패하는 원인은 능력부족, 경험부족 때문인 것 보다는 염려와 걱정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드리는 기도를 드리신다. 예수님도 두려운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2. 예수님과 율법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선포하신 목적은 그들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가르쳐 하나님의 백성을 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고 이방인들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였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다르다. 권위주의는 권위로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권위는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에 계율이 있는 이유는 사람이 원리대로 살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율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잘 구분 할 줄 알아야 한다. 십계명은 “너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중명령 구조로 되어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우선시 하셨다. 모세와 맺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구약의 계명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고, 신약의 새 개명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3. 초대교회의 윤리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신앙적인 면에서 믿음이고, 실천적인 면에서는 사랑이다. 물질,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것이지 나를 위해 사용하거나 내 가족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정승같이 벌어 정승같이 써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정승같이 벌어서 개같이 쓰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을 정승처럼 잘 쓰면 윤리적으로 정당화 되는 것인가? 이렇게 돈을 번 사람들은 정승처럼 돈을 쓰지를 못한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 할 것이다. 민족의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 우월성 때문에 다른 민족을 우습게 여기고 차별 해선은 안 된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종교적 배타주의와 유대인의 독선주의를 만들어 냈다.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관계에서 배타 주의적 성격을 살펴보면, 기독교만이 참된 진리요 구원의 길이므로 타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배타주의에 빠지기가 쉬운 기독교이다. 배타주의는 굉장히 편협할 수 있는 약점이 있다. 타 종교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원수로 대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반하는 것이다. 2010년10월쯤 봉은사 땅 밟기라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과연 기독교인으로써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불신자들이 볼 때 기독교를 더욱 안 좋게 만든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타종교의 대한 배타적인 성향을 마치 신앙에 맞춘 행동인양 하는 것은 현대인으로서 잘못된 생각이라고 확신한다. 왜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듣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배타주의는 잘 못된 오해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다르다”와 “틀리다”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이고 획일적인 사고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관계가 이뤄질 때 극복될 수 있다. 두 번째 차이와 차별을 구별해야 한다. 남녀는 차이의 문제지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차이는 역할 분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이와 차별을 잘 구별하질 못한다. 세 번째, 우월과 열등은 편견에서 만들어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다양성 있게 창조하셨다. 남성과 여성은 차이일 뿐 우월성과 열등의 차별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차이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4. 한국교회 윤리관
종교는 수단으로서의 종교가 있고 목적으로서의 종교가 있다. 종교는 만족도를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만족도는 가장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현 한국교회의 위기는 성도들의 위기보다는 목회자들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우기의식을 느끼고 시행착오와 잘못된 방향설정을 회개하고 방향을 다시 돌린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희망으로 다시 다가 갈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다.
5. 기독교 윤리 과제
인간이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극단적인 파괴로 생각하고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 욕망 적 죽음이 있다. 생물학적 죽음보다 욕망을 죽이는 것이 더 어려운 문제이다. 기독교인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허함, 삶에 의미가 없을 때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살을 반대한다. 한국은 자살률 세계1위 국가 이다. 한국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없어지면 자살을 한다. 기독교 학자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낙태문제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첫 번째, 산모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모두 위험하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답은 없는 것 같다. 산모를 구하자니 아이가 죽고, 아이를 구하자니 산모가 죽고 진정 강력한 딜레마인 것 같다. 보통 보면 아이를 구하고 산모가 거의 죽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이 문제는 누가 옳고 그렇다는 것을 다루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해 임신된 태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 번째, 임신한 태아가 기형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네 번째,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형제도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어떤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생명을 빼앗을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다. 내가 정의는 내리질 못하겠지만 같은 동성에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안 된다.
요즘 편만해 있는 동거모임을 생각해 보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문화 현상으로 인식되어 있다. 아무리 젊은이들이 동거를 선호한다고 해도 아직은 주위 사람들에게 숨기는 실정이다.
<결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무도 따fms다. 베드로는 이것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하나님의 자녀의 큰 특권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이다. 반면 큰 책임은 성장이다. 누구나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치고 그 자녀가 계속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으면서도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 소아퇴행 증을 앓고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 안의 아이”들이 “그리스도 안의 성숙한 자”가 되는 것이다. 출생한 다음에는 성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칭의의 단계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장은 본인의 무책임성에서 책임성(의무감)으로 발전함에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받은 특권(구원)도 잘 알아야 하지만, 해야 할 의무(책임 · 행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학습 도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인격과 사역 (0) | 2010.11.30 |
---|---|
[스크랩] 2010년 2학기 선지서 기말고사 예제 (0) | 2010.11.27 |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성경해석학 (0) | 2010.11.26 |
한양대 글로벌 경영전문대학원 AMP과정 제40기 모집안내 (0) | 2010.11.25 |
[스크랩] 영어회화 영문 주기도문-교수님 목소리...ㅎㅎ (0) | 2010.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