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슬람 현황과 선교전략
무슬림 인구 4200만명… 세계 9위 이슬람 대국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 중국선교 전문가들은 1885년 조선땅을 밟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과 같은 상황이 현재 중국 이슬람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중국은 세계 9위의 이슬람 대국이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터키 이집트 이란 나이지리아에 이어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있는 후이족외에도 위구르족 카작족 우즈벡족 키르기스족 타직족 싸라족 둥샹족 바오안족 타타르족의 주요 종교가 이슬람이다.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현재 4200만명의 중국 무슬림이 있다. 세계 무슬림 인구 통계 사이트는 2006년 현재 중국 무슬림을 3911만명이라고 밝혔다. 중국 종교사무국에 따르면 모스크는 3만여개, 종교지도자인 아홍(이맘)은 4만여명에 달한다.
◇중국 이슬람의 양대 산맥=중국 무슬림은 이슬람이 전파되는 경로와 민족에 따라 고유의 풍습과 언어 등을 유지하며 중국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대의 무슬림(위구르족 카작족 타직족 등),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인을 통해 완전히 중국화된 내륙 무슬림(후이족 싸라족 둥샹족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중국에 이슬람이 전해진 것은 서기 651년 당나라때. 하지만 아라비아 페르시아에서 온 무슬림들은 포교 목적이 아니라 교역을 위해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 통치 세력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인과의 통혼을 통해 정착해나가면서 후이족 등 내륙 무슬림으로 자리잡았다. 명나라의 후이족 학자들은 아리비아어에 능통했을 뿐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 등에 정통해 이슬람교와 중국 전통문화를 결합시켰다. 특히 유교로 꾸란과 경전을 해석해 이슬람교의 중국화를 일궜다.
반면 위구르족은 10세기 아랍제국의 지하드를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됐다. 신장은 청나라 시절 신장성이라고 불렸는데 1955년 중국 공산 정권에 의해 위구르자치구에 흡수됐다. 중국에 예속된 뒤 위구르족은 자신들의 문자가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 다시 한어병음자모로 바뀌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아랍식 정서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신장 위구르족은 한족 및 다른 소수민족과 더불어 고유 문화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밀려드는 한족과 서구화 물결 속에서 정체성 갈등을 겪고 있다. 일부 위구르족은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를 소망한다. 신장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정치적 갈등과 긴장은 이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정부의 이슬람 정책=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관리방식은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즉, 후이족을 이용해 위구르족을 억압하고 카작족과 위구르족을 경쟁하도록 만드는 것. 완전히 중국화된 후이족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게 대처하는 반면 분리독립운동과 연관된 위구르족의 종교활동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1990년 베이징에서 발생한 후이족 시위는 중국정부가 진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장에서 일어난 위구르족 시위는 분리주의 운동이라고 간주, 탄압했다. 후이족이 하지(성지순례)에 참가하는 것이 쉬운 반면 지난 8월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위구르 여권을 몰수하는 등 위구르족의 국외여행은 통제했다. 카작족에 대해서는 카자흐스탄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주문제 등에 대해 위구르족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기독교 선교역사=서기 631년 네스토리우스 선교사들이 신장에서 여러 교회를 세웠다. 카쉬가르와 하미에는 두 개의 교구가 있었다. 네스토리안의 활동에 의해 많은 위구르인들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마르코 폴로도 1271년에 카쉬가르를 지나 여행한 뒤 네스토리아 교회들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교회는 사라지고 1892년 스웨덴 선교사들이 카쉬가르에 도착하기까지 이 지역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1912년 카쉬가르에 인쇄소가 세워져 학교 교재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서도 출판했다. 1920년 엘켄트에 고아원이 세워져 5명의 소년과 30명의 소녀들이 양육됐다. 1918년에서 1933년 15년간 163명의 개종자가 세례를 받았다. 1933년 첫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가 200명을 넘어섰다. 1939년까지 스웨덴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인해 교회가 여러개 세워졌고 어린이들을 포함, 신도가 500명으로 늘었다. 이 기간에 3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네 곳의 선교기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하여 북쪽 신장 등지로 순회 사역하기도 했다.
현재 우루무치에는 한족들만 3000여명이 모이는 삼자교회가 있다. 처소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도 많다. 신장 지역의 한족 기독교 인구는 15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닝샤후이족자치구에도 인촨시기독교회 등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들이 있지만 교세가 크지 않다. 위구르족, 후이족 등 무슬림 선교를 위해 한국 미국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우루무치 카쉬가르 인촨 등지에서 비밀리에 사역중이지만 사역열매를 쉽게 맺지 못하고 있다. 2007년 중국정부의 '태풍 5호' 작전에 따라 이들 지역 선교사들이 대거 권고추방되기도 했다.
◇무슬림 선교는 어떻게=중국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개종이 곧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유에얼 선교사는 적극적으로 선교하지 않는 중국 이슬람의 전통 때문에 무슬림 인구가 크게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10개 이슬람 민족의 자연적 증감에 따라 상대적 안정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것.
정반석 선교사는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해 점차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일상 생활 속에서 절제와 경건의 모습을 보여주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면 좋은 친구로 다가가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했다. 전진 중국어문선교회 간사는 중국 무슬림에 대한 전문연구기관과 선교 훈련센터 등이 필요하고 비즈니스 선교 등 선교접촉점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뒤따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함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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