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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기독교의 발전 동향

예림의집 2009. 10. 10. 21:36

중국 내 기독교의 발전 동향
 
나날이 강대해지는 중국 내의 비정부 조직
과거에 공산당원 이었다가 현재 기독교인이 된 자오샤오(赵晓) 선생은 자신이 추측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중국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 1억 3천만 명 정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미 예측해왔던 것 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다. 정부 관리들이 말하고 있는 숫자는 그 중 2,100만 명뿐이다(그 중 1,600만 명이 개신교인이고 500만 명이 천주교인이다). 비정부조직인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전 세계 종교연구센터의 통계수치가 나타내고 있는 바에 의하면, 중국의 기독교인의 수는 약 7천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오샤오의 말은 결코 그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Pew Forum(미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국가들과 상업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건의하고 의견들을 내놓는 토론회)에서 중국의 종교와 민생에 대한 연구결과를 통해, 중국의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결코 정부의 통계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간접적 조사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에 대해 감찰하는 조직인 CAA(중국구제협의회,미국 텍사스)의 자료에 의하면, 2008년 초에 중국 기독교인의 수는 이미 1억3천 만 명을 넘어섰다고 중국정부의 종교계 고위 지도자가 밝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내의 기독교인 수가 공산당원의 수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중국 공산당원의 수는 7,400만 명이다). 이런 추세라면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활발하고 역동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1949년, 신 중국이 성립되던 시기에는 단지 1%의 침례교인만 있었고, 대다수가 천주교인이었으나, 오늘날 가장 방대한 진영을 가지고,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바로 ‘가정교회’라는 새로운 구성원들이다.
  상하이(上海)시 교외에 있는 하이닝루(海?路)에서, 몇몇 주민들이 마치 관광객들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줄지어 복도를 지나 큰 홀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25명이었는데, 이는 정규 허가를 통과할 필요가 없는, 법적으로 허용된 집회를 열 수 있는 한정 인원이다. 그 중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이들 몇 명이 쇼파와 접이식 의자 위에 앉아있었고,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던 한 젊은 여성이 축복기도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체를 보호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었다. 또 어떤 젊은 남성은 그의 노트북 컴퓨터 안에 받아 놓았던 자료들을 영상으로 벽면에 비춰주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비춰준 것은 한 단락의 가사였다. “영광, 영광 ,영광; 거룩, 거룩, 거룩;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과 함께 계신다.” 이것은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풍경인데, 바로 이것이 수많은 중국의 가정교회들 가운데 퍼져나간 예배의 형식이다.
  가정교회는 일종의 소형 회중 교회(성도 구성원들이 종교예식집행에 참가하는)의 형식이다. 그들은 보통 공산당의 눈을 피해 아파트 내에서 몰래 모인다. 60년대, 천주교와 그 외 다른 일련의 주요한 교회들이 종교적 사무를 관리하는 분파를 개설하였었는데, 가정교회는 일종의 금지된 것은 아니면서도 완전히 승인 받지도 않은 형식으로 존재한다. 이웃 간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집회인원이 지정된 숫자(통상적으로 25명이다)를 넘기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만 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개신교 가정들은 설령 자신들이 이것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천주교 가정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이것 또한 중국과 로마 교황청간의 긴장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공식적 가정 집회는 이전 초기 기독교 교회의 종교 활동의 큰 특색으로, 로마제국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런 집회규모의 소형화가 도리어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파되게 하는데 알맞은 형태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그들의 것과 대립되는 이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는 것에 맞서느라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작은 규모의 종교집회를 갖게 하는 것은 점점 강대해지는 교회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지방당파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그러나 오히려 이로 인해 교회의 수가 증가해가는 현재의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지, 그들은 지금 어떤 결정을 내려야 좋을지 모르는 시련에 직면해 있다.
  완공 된지 겨우 2년 밖에 안 된 상하이의 예배당은 벌써 또 다른 두 개의 지교회를 갖게 되었는데 하나는 다국적 기업의 직원들이, 또 다른 한 교회는 중국으로 이민 와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이 사용하게 하고 있다.
  이렇듯 기독교가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될 때와 같은 형태로, 기독교의 전파를 막으려는 위협들은 오히려 중국교회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도록 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작년에 있었던 <극동 경제 논평>에서 모 사역자는 “하나의 가정교회가 집회를 못하도록 금지당하면, 이 집회는 더욱 불길 같은 기세로 다섯 개, 여섯 개, 심지어 일곱 개 에서 열 개까지에 이르는 새로운 가정 교회들로 늘어난다.” 고 말하였다.
  교회수의 대량 증가는 가정교회 운동에 복이 될 수도 있고 화가 될 수도 있다. 자오 선생은 우스갯소리로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월급을 줄 필요도 없으며, 예배당을 지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교회를 관리하는 질에 있어서는 자신 할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은 가지고 있고, 서로 연결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련된 찬양집도 내려 받을 수 있지만, 경험이 있는 목사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경험이 2년 정도 있는 교인이라면 일 년 간 이 일을 했던 다른 교인을 가르칠 수 있다.”고 자오 선생은 말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대다수의 가정교회들은 초교파의 원칙하에 형성되었기 때문에(즉, 루터교나 감리교와 같은 교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예배 의식과 입으로 전해져 내려 온 교리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개설하는 대개의 성경학교 과정들은, 목사들에게 많은 부담을 갖게 한다. 일찍이 많은 가정교회를 접해 온 상하이의 한 사람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목사 자신 혼자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더군요.” 
  교회가 세워지던 초기에 나타난 문제들은 기독교인 수의 대량 증가와 함께 대두되는 문제들과 비교하면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 이후,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이 비통한 마음을 안고 기독교로 왔다. 30명의 학생 지도자들 중 대략 6명 정도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중국 신흥 가정교회에는 변화의 열기가 일어났으며 많은 새신자들이 그들의 가족과 직장동료들까지 데리고 함께 교회로 나아왔다.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고, 더욱 경건하게
중국의 기독교는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전해졌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신앙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그들의 신앙(기독교)이 그들과 함께 고향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상하이의 가정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해외에서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자오 선생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또한 2000년도에 베이징의 어느 한 개종한 작가가 대다수의 신앙인이 농촌에 산다고 말했었는데, 2000년 이후 이 농촌에 살던 신앙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가면서 지식인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들을 통해 주께 돌아온 베이징 기독교인의 숫자는 적어도 유럽 사람들이 듣는다면 크게 놀랄만한 숫자이다. 초기 기독교 전도의 요충지에서 전도가 전통과 종교의식을 동반했던 것처럼 중국에서의 복음 전파 역시 현대화와 경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한 가정교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1세대 기독교인이자, 제1세대 상인이었다.” 2006년, 논쟁이 되었던 한 편의 글에서, 자오샤오는 이렇게 썼었다. “시장경제가 인간의 빈둥거리고 노는 습관들은 고쳐놓았지만, 거짓과 악을 행하는 것은 고쳐 놓을 수 없었다. 오로지 강한 신앙만이 이러한 불성실과 서로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오샤오 선생의 보기에 기독교와 시장 경제는 당연히 서로 함께 가야 하는 관계인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전파는 이미 신앙인 개인의 일로서 무게를 실어왔다. 문제는 이것이 앞으로도 이와 같은 추세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냐는 데 있다. 기독교의 진용이 강대해지고 옹호자가 늘어나는 것은 기독교가 더 이상 이와 같은 형태로는 발전해 나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로는 기독교인과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 모두 이런 일종의 애매모호한 상태를 지속해 가기를 원하는 것 같이 보여 진다.
  자오샤오의 말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제도 안에 거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중국인들 또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종교는 비정치적 조직이며, 공산당을 위협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를 예로 들면, "누구든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중국정부의 계획 출산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 분명하다." 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공산당은 그들의 당원이 신앙을 갖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교회 역시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 베이징의 중국가정교회연합회 회장이었던 장밍슈엔(張明選)는 올림픽 전날 저녁 베이징으로부터 추방되면서, 베이징은 그가 되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6월 초순에는, 허난성(河南省)정부가 쓰촨성(四川省) 원촨(汶川)지진 이재민에게 선한 의도로 기부금과 물품 등을 보낸 가정교회 교인 6명을 불법이었다는 이유로 체포하였다. CAA에서는 중국정부가 가정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이미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말한다.
  사실 중국정부의 태도에도 모순이 있다. 2007년 12월, 후진타오 주석이 종교국장과 가진 회의석상에서 “종교 문화의 전파는 사회의 번영 발전과 반드시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서로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기독교가 일정한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오샤오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중국의 미래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미래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발전에 대해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www.economist.com
번역| 이은혜 · 자원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