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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 있는 교사

예림의집 2008. 11. 13. 00:11

열심 있는 교사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몇 년 전 여름 드라마캠프 때였다. 밤 12시 30분 경이면 강의가 끝난다. 멀리 부산과 대구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연속 이틀간 밤바람을 쐬러 차를 탔다. 둘째 날은 팔당 지나서 있는「봉쥬르」를 향했지만 시골사람들(?)을 위해 한강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실선착장으로 차를 돌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누운 유람선과 언젠가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멋있는 식사를 즐겼던 식당을 보면서 사람들이 탄성을 발한다. 함께 오징어를 구워서 손에 들고 각자 음료수를 마시면서 둘씩, 셋씩 짝을 이루어 둑길을 걸었다.

조금 후에 둑길에 앉아서 앞에 펼쳐진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보고 건너편의 영롱한 가로등 빛들을 보면서 잠시 탄성을 발한다.

‘아! 내 고향 서울의 밤이 아름답다.’

그런데 바로 앞 낮은 곳에서 불빛이 비취고 한 사람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다. 낚싯대를 가로 눕혀 놓고 아마도 미끼를 끼고 있는 듯 하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손동작이 작은 랜턴 빛에 아름답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낚시이야기만 나오면 신명이 난다. 그리고 그 낚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할 기세다. 지난 번 휴가 때 만난 아저씨도 바다낚시를 그렇게 외쳤고 나는 동조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그 아저씨를 다시 보았다.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열심은 사람에게 전염이 된다. 그리고 마음속에 감동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간다. 사업이나 정치, 학문을 위해 일을 하다가 노총각, 노처녀가 된 사람들도 많다.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이들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만난다. 열심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어떠해야 할까?

여름만 되면 71년 8월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초청과 결심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분명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 4:12)이며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기 때문에 그 구속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그로 인해 나는 변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갖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지방의 명문이라는 거창고등학교에는 다음과 같은 직업선택의 10계명이 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 속에 담긴 정신은 개척, 봉사, 희생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즉, 신념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다행스럽게 나는 1~8번까지는 청소년교육선교회를 선택하고 17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 주저함 없이 동그라미를 칠 수가 있다. 9번도 그 의미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아내가 나와 생각을 함께 하고 이미 부모님에게는 신학을 할 때부터 세속적인 면에서의 실망을 드렸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단두대를 향하는 진지함일 것이다. 왕관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일이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물 여덟 살의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한 기둥에 세 사람씩 묶였는데 그는 세 번째 기둥의 가운데에 묶여졌다.

사형집행 예정 시간을 생각하면서 시계를 보니 자신이 이 땅에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5분이 남아 있었다. 28년을 살아왔지만 이렇게 단 5분이 금쪽 같이 생각되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5분밖에 남지 않은 생명을 어디에다 쓸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형장에 같이 끌려온 아는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마디씩 하는데 2분이 걸리게 될 것이고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과 생각을 정리하는데 2분 정도를 쓰기로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옆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키스를 하였고 남은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벌써 2분이 지나버렸다.

이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문득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나면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다. 28년이란 세월을 한순간 한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순간마다 값있게 쓰련만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돌이킬 수 없는 뉘우침뿐이었다.

그러자 탄환을 총에 장전하는 소리가 덜커덕 났고 이와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버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최후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장내가 떠들썩하더니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달려와 소리를 질렀다. 황제의 특령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풀려 나와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사형장에서의 마지막 5분 동안 절실하게 생각되었던 경험을 살려 주어진 시간을 금쪽 같이 소중하게 아끼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한 순간도 뇌리에서 떨쳐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변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주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불려간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러한 인정이 가능하였을까?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열심이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열심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열심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삭의 두 아들은 아주 대조적인 인물들이었다. 야곱은 부엌에서 어머니와 친했던 소극적인 사람이었으나 훗날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였다. 삶을 진지하고 열심히 살게 되었다. 반면에 에서는 활동적인 사냥꾼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얍복강에 나갔으나 결국은 동생의 태도에 굴복하고 말았다. 무엇이 이 형제의 태도를 변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훈련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마음속에 담고 노력한다.

첫째,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

내일을 준비하는 마음은 오늘을 열심히 살게 한다. 나에게도 꿈이 있다. 이 땅의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 4층의 건물로 연구소와 상담소, 출판사, 청소년사역훈련원, 캠프장, 중고등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이다. 전국의 교회를 섬기고 나아가 전세계에 청소년전문가를 파송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하료고 한다. 그럴 때 지금까지 내가 이룬 것 같이 또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일의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으로 인해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다. 나이를 잊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둘째, 집중한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7-8). 세상에 많은 양의 빛이 있지만 돋보기를 가진 사람만이 종이를 태운다. 종이는 칼이라는 쇠로 자르고 쇠는 금강석으로 자르지만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금강석은 물로 자른다. 다만 이 물이 압축이 되어 분사되어지는 힘이 강할 때 가장 단단한 것도 자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나는 미련하고 약하며 천하지만 극복할 수가 있다. 집중하여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셋째, 탁월한 마음의 태도(기준)를 유지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적당히 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학업의 성취는 오기에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려면 역시 하나님을 향해 특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비행과 죄를 일삼는 사람은 또 다른 일에서도 자기만을 위하여 살고 적당히 행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특별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남보다 뛰어난 헌신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사는 삶이다

넷째, 성령을 의뢰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우리가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을 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만으로는 될 수가 없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만 한다.

무디는 이 말을 자주 했다. “회심하기 전 나는 십자가를 향해 일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십자가로부터 일해 왔다. 전에는 구원받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았음으로 일한다.”

‘인도 빈민가의 어머니’로 불리며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테레사 수녀에게 기자가 인터뷰를 청했다. “수녀님은 이런 일을 할 특별한 자질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나는 앞장서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작은 연필에 불과합니다. 그가 사용하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마 25:14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종들은 그 재능대로 각자 다섯, 둘, 한 달란트를 받았다. 주인이 왔을 때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이윤을 남기지 못하였고 주인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다. 그 때 외치는 그의 항변이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굳은 사람이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니 말이요.” 즉, 이 종은 자기에게 달란트를 준 주인의 의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재능이나 사명을 주고 당신의 일을 하시기를 기대하신다.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귀중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태도다. 나는 하나님의 작은 연필이 되어서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고 싶다.

살아있는 날은

마른 향내나는

갈색 연필을 깎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 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이해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