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교사
1984년 미국 LA에서 올림픽이 있었는데 중국 여자 선수가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땄다. 동양선수로는 드문 일이어서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하였다. “당신은 동양 여자로 몸집도 아주 왜소한데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운 동작과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고공에서 아름답게 다이빙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까? 금메달을 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선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하였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 선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저는 어렸을 때 100미터 경주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경주에 나가면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더랬습니다. 그래서 등외의 선수가 되면 어머니는 제기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1등 하는 것보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나는 네가 일어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단다. 너는 아름다운 내 딸이야.
너는 1등을 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거야. 나는 그냥 네가 뛰는 모습이, 운동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구나. 너를 보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란다. 저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이빙 스탠드에서도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편해집니다. 바로 어머니 때문입니다.“
교육은 점진적인 것이다. 학생의 조그마한 변화도 발견할 수 있고 학생의 조그마한 발전도 감지할 수 있는 교사가 있을 때 학생들은 새롭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부모나 교사들은 너무나 조급하다. “우리 아이는 어쩔 수 없어!”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하고 실망하는 순간 그 아이들은 그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
17세기경 로체스터의 백작이었던 존 월모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어린이 교육에 관해 여섯 가지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섯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된 지금은 하나의 원리도 있지 않다.”
자녀를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만드는 것이나 한 사람을 온전한 인격자로 교육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만 스승의 자리에서 공과를 가르치고 적당히 시간을 함께 하는 일을 해왔으면서 부모와 같이 학생을 책임있게 양육해 오지는 않았다. 물론 그동안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이나 개인들의 성향이 일만 스승으로도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교육이 가능하였지만 이제는 멘토링이란 개념으로 한 사람이 영적 부모가 되어서 적어도 일년이 아닌 일정한 기간 동안 길게 학생의 영적 성장을 도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 자립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군사로 키우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교육에 대한 이론과 인간발달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학생과 함께 공감하고 체험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을 운용하는 사람 즉 준비된 교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교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칼 바르트가 말년에 미국의 대학에 갔다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경연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God loves me, this I know. The bible tells me so"였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사가 참다운 교사이며 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맛보고 이러한 성품을 가득히 담고 학생을 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7전8기를 기대하신다. 교사도 학생의 넘어짐 다음에 일어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학생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그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어쩌다 만나서 인사를 할 때면 자주 ‘누구시지요?’ 하고 묻는 것으로 보아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최근에도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서 ‘제가 몇 년 전에 ⌜지도자학교⌟를 수강한 아무개 전도사입니다’ 하는 인사를 받았는데 도무지 얼굴이 생각이 나지를 않았었다. 그리고는 다시 질문해 본다. ‘나는 진정한 교사인가?’ 물론 사람에게는 일만 스승이 있어서 그때그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나 역시 많은 선생님들 덕에 이만큼 성장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욕심을 부려본다. 나는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는 교사이고 싶다고.
우리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는 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대상은 청소년이다. 미완성이어서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는 미흡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면 관계가 형성이 될 수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쌍방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개인을 향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를 보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여자 친구 직장에서 수련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모셨던 한 강사는 신령한 분이셨는데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각 개인에게 꼭 필요한 성경말씀을 지정을 해 주시면 그 즉시 그 사람은 그 말씀에 녹아져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평상시 그들이 얼마나 도도하고 강퍅한지를 아는 나로서는 대단히 부러웠다. 과연 나도 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알고 지적해 줄 수 있는가?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역할이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있었다. 그저 막연한 일반적인 접근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 사람에게 맞는 말씀을 공급하는 노력이 우리 지도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아는 일과 함께 그 개인의 사정을 잘 아는 일이 필요하다. 그의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그의 사회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표정과 복장, 행동 그리고 언어들을 잘 기억해 두고 계속해서 기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필요와 아픔들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그에게 필요한 말씀을 알아보든 아니면 그 반대의 순서이든지 결국 교사는 사람의 필요라는 맥박을 하나님의 진리의 손가락으로 짚어 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둘째, 만일 우리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기 원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충실함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공시대에 살고 있다. 나 자신도 성공을 하고 싶었다. 부와 명예와 그리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욕구일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좋은 목표는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SMART(말쑥한) 라는 단어의 머릿글자를 땄는데 1) Specific(구체적일 것) 2) Measurable(측정할 수 있을 것) 3) Attainable(달성 가능한 것) 4) Result-oriented(결과 지향적인) 5) Time-bounded(시한을 정하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집을 사고, 어떻게 승진하고, 어떻게 노후를 맞을 것인지를 계산하며 이것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여 자격증을 따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이 필요하다(고전 4:1-2). ‘얼마나 성공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하였는가’가 더 중요하다. 달란트 비유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들이었다.
충성이라는 것은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를 버리고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정당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나는 이 이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만을 가지며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 역시 ‘나는 이러한 일은 할 능력이 없어’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겁을 먹으며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끊임없이 불평하고 일에 최선을 다 하지를 않는다. 충성된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하지를 않고 나아가 자기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나는 요사이도 가끔 라이벌의식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을 써내거나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끄는 사람을 보면 공연히 낙심이 되기도 하고 속이 상해서 청소년사역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왜 사람들은 교사강습회 때 나에게 소수가 참석하는 선택강좌는 맡기면서 전체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부흥회의 설교는 안 맡기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여름이나 겨울 수련회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강의하고 설교할 것을 부탁하는데 수천 명씩 모이는 집회에서는 부르지 않을까?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우리 모두가 성공을 바라볼 때 갖는 것이지 충성스러운 종의 깨어있는 의식은 아님을 늘 되새긴다.
셋째, 만일 우리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학생을 향해 임시방편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교회교육에서 계속되는 잘못은 일년 단위로 교사를 세우고 2년 단위로 부장을 교체하며 3년이 되기 전에 전도사들이 떠나거나 교체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일반 학교에서도 300일이 넘도록 교사가 학생을 관찰하고 지도하여 그들의 변화를 기대해 보지만 쉽지가 않다. 하물며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짧은 시간에 대화를 나누고 공부를 하면서 일년이 되면 나 몰라라 해버리곤 한다. 한 영혼의 성숙에 대해서 구체적인 목표와 대안 없이 우리는 시작과 끝을 만난다.
우리 교사는 학교교사와 같은 전문성을 갖는 것과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말 교회교육 현장에서 교사는 대모나 대부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가 유모와 아비와 같은 교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모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우리 청소년들을 어찌 짧은 시간, 적은 노력으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긴 안목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해야 한다.
넷째, 만일 우리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한다(잠 24:16). 그러나 이러한 힘은 어디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나온다(시 121:2).
우리는 일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속고 남들에게 속는다. 그리고 환경은 우리를 곤경에 몰고 가는 일이 허다하다. 사랑은 줄다리기라고 했듯이 우리가 준비가 되면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학생들이 다가오면 우리가 바쁘거나 준비가 덜 되어 있거나 실망으로 먼저 포기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글을 쓰는 연필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한 것을 우리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열심을 내신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처럼 변개(變改)하고 게으르시다면 우리의 소망은 없어질 것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하나님의 열심은 마음에 있는 자는 물론 패역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 하실 만큼 크시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다”(렘 3:23-23).
우리는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교사이다. 따라서 학생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시 한번 대상을 정하고 기도로 준비하여 이 귀한 사역에 열과 성을 다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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