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기도
아버지가 학교 건립을 위해 마련해 주신 돈은 30억 원이었다. 땅을 판 돈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십일조 먼저 드리고 시작해야지.” 전체 건축 예산의 절반이나 모자라서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던 때라 기분이 좀 상했지만 나는 꼼짝없이 십일조 3억 원을 드렸다. 솔직히 강제로 떼인 기분이었다. 건축을 시작하다 보니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산을 다듬어야 했고, 진입로를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십일조를 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갑자기 한국전력 직원 몇 명이 찾아와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고압선을 지중화하려면 땅이 필요한데 저 산 위의 땅을 저희 측에 팔면, 철탑도 없애고 고압선도 지중화시키고 진입로도 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그 제안 덕분에 우리의 골칫거리였던 서너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약 30억 원 정도의 효과를 본 셈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십일조였는데 하나님은 그것의 10배인 30억 원으로 되돌려 주셨다.
선생님 모집 공고를 냈다. 전국의 교대에서 선생님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들을 뽑을 때의 기준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께 교사로서의 소명을 받았는가?” 개교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들과 나의 고민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정말 기독교 교육다운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개교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목사님, 어쩌죠? 마무리 공사를 하는데 2~3일은 더 걸린다는데요.” 겨우 몇일 때문에 한 학기를 미룰 수가 없어서 선생님들과 상의한 끝에 서울 구로동에 있는 기도원에서 전교생이 함께 수련회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의 가려운 데를 어떻게든 긁어 주려고 했다. 재미있고 화려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달콤한 음식을 먹였다. ‘말씀이나 기도는 어른이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애들은 그냥 잘 놀면 되지.’ 그런데 하루는 여름성경학교 마지막 날 인형극을 하던 중에 새로 오신 여전도사님이 갑자기 아이들에게 회개 기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통성기도를 30분이나 시키는 게 아닌가. 그 전도사님의 갑작스러운 진행에도 놀랐지만, 나의 가슴을 더 먹먹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기도 소리였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저의 약함을 고백합니다. 저는 보잘것없지만, 주님이 쓰시겠다 하실 때 어린 나귀처럼 언제나 예수님께 순종하기를 원해요.” 아이들에 대한 나의 판단은 착각이었다. 아이들은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어리석게 보고 과소평가한 미련함을 회개했다. 그 일을 계기로 혹시 어른들의 어떤 기준이나 교육 태도가 아이들의 영적 체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예기치 않게 우리 학교는 기도 속에서 출발했다.
개교를 하면서, 학교가 소송에 휘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리 학교는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교직원으로 뽑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 한 분이 이혼하신 사실을 감춘 것이 들통 난 것이다. 내가 그 선생님을 만나 학교 측의 입장을 전달했는데 그분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고 소송을 걸었다. 인권과 종교적 특수성의 대립이라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전례가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상대편 변호사의 변론은 아주 명쾌했다. 한순간 우리 학교는 몰인정하고 배타적이며 종교만을 강요하는 이기적 집단처럼 돼 버렸다. ‘우리가 지겠구나’ 싶었다. 우리 측 변호사는 우리 학교가 사립학교이므로 설립 이념에 따라 학교 행정을 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다 났다. 드디어 판사의 마지막 판결만 남았다. 판사는 카랑카랑하지만 엄숙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었다. “이 사건은... 불평등 고용이냐 학교의 특수성이냐에 관한 사안으로서, 이 학교는 기독교 학교이기에 성경적 가치로 행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의 결정 사항은 적어도 이 학교 내에서는 적법한 것으로 인정한다. 탕탕탕!”
개교한 지 4년이 될 무렵, 학교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1999년 여름, 나는 서울외국인학교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했다. 대회가 끝나자, 나를 만나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에서 온 외국인학교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거두절미하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한국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한국인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럼, 당장 우리 아이들은?’ 하지만 돌덩이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교사회의 시간에 지나가듯 한마디 던졌다. “우리 학교에서 MK(Mission Kids)를 위한 교사 선교사를 보내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선생님들의 반응은 나와 너무 달랐다. “와! 드디어 기도에 응답하셨네요. 우리 학교가 선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학교 설립 초기부터 무려 5년 동안이나 기도해 왔거든요!”
너무 인간적인 생각만 앞섰던 내 모습이 민망했다. 결국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앞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종하기는 싫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싫어도 순종할 수밖에. 선생님들과 함께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교사를 십일조 하는 것 어때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곧바로 MK 선교사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날 바로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네, 최형석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선생님은 안 되는데, 설마 선교사 지원하려고?’ 최형석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남자 선생님이었고 두고 볼수록 알맹이가 꽉 찬 열매 같았다. 어떤 일을 맡겨도 늘 활기차게 빈틈없이 해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기도가 우선이었다. ‘흠, 아무리 봐도 교장감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점찍어 둔 선생님이 바로 최형석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난데없이 쳐들어와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목사님, 저어, 제 꿈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 전하며 살다 죽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습니다. 그건 저의 소원이 아니라 서원이었습니다.” 서원이라는데 목사가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거의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최 선생님 가족을 알바니아 MK 선교사로 파송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몰랐다. 그가 한 알의 밀알이 될 줄은…….
최 선생님은 새천년 6월 알바니아로 들어갔다. 그때는 코소보 사태로 알바니아 선교사들이 다 쫓겨 나오던 무렵이다. 위험한 만큼 한국 선교사들의 자녀 교육이 시급한 상황이기도 했다. 물도 전기도 정해진 시간에만 사용할 수 있고, 난방 시설도 없는 척박한 땅 알바니아. 최 선생님은 그곳에 학교 세우는 작업을 혼자 해야 했다. 말이 학교지 사실은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1층은 최 선생님 집으로, 2층은 학교로 꾸몄다. 이름은 ‘한알학교’. 성경 말씀과 한국, 알바니아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었다.
한알학교는 ‘방과 후 학교’였다. 선교사 자녀들은 국제학교에서 수업을 받지만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영어를 잘 못하는 우리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알학교 수업은 국어, 수학은 물론 미술, 음악, 체육에 이르는 특별 활동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4시만 돼도 캄캄해서 호롱불을 써야 할 만큼 상황은 열악했다. 하지만 현지 선교사님들과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는 걸 보면 힘든 줄도 모른다고 했다.
최 선생님 부부는 알바니아에서 만 2년을 꽉 차게 사역하고 돌아왔다. 그 뒤에 3, 4개월이 지났을까, 최형석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병원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초점이 잘 안 맞고 혀가 좀 안 돌아가서요.” 대학병원 종합검사로도 뚜렷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 다음 달에 MRI를 찍었는데, 결과는 뜻밖에 악성뇌종양. 종양이 너무 많이 자라서 수술도 할 수 없으며, 남은 치료는 약물과 방사선뿐이라고, 길어야 6~8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적을 구하는 일뿐이었다. 기적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학교 구석구석으로 번져 나갔다. 학교에는 ‘하잠멈(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는 기도)’이 선포되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하잠멈’을 알리는 음악만 울리면 누구나 그 자리에 멈춰서 기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상관없이 최 선생님은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소화 기능도 멈추었고, 걷는 것은 물론 말하는 기능도 잃어 갔다.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이 최 선생님을 치유해 주실 줄 알았다. 기적을 베푸실 줄 알았다. 지도자인 내가 미천했을지라도 우리 학교 아이들과 교인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국 그를 데려가셨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나였다. 그렇게도 기도를 하찮게 여기던 내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 묵상은 좋아해도 기도는 늘 뒷전으로 미루던 나란 사람을, 새벽기도회가 하기 싫어서 교회 개척을 서둘렀던 나란 사람을, 최 선생님의 삶이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ε♡з교회 사역...♡з > 교회 소식, 행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절] 성탄절에 드리는 기도문 (0) | 2008.11.08 |
---|---|
빈손으로 어린이 앞에 서는 교사에게 (0) | 2008.11.07 |
가슴이 시리도록 감동을 주는 교사 (0) | 2008.11.07 |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0) | 2008.11.06 |
[성탄절] 성탄특집 제2회 愛(아이) I can do it CCD세미나 (11월22일) (0) | 2008.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