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중국의 만남과 원칙
들어가는 글 루신(중국선교사)
기독교와 중국의 만남은 역사상 네 번 있었다. 이 만남은 문화와 종교의
만남이어서 긴장감이 감돌고 충돌이 야기되었다. 네 번의 만남에서 중국이
주도적일 때는 선교금지나 선교사 추방으로 끝났다. 그러나 청말 개신교가
주도적일 때 정치적으로는 기독교를 용납하나, 실질적으로는 거부하고 부정
했다. 기독교는 중국인 복음화를 위해 직접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워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중국인의 반대의 예리한 칼날을 피하기 위하여 간접적인
방법(신문발간, 서적출판,병원설립, 학교건립)을 통하여 선교사역을 펼쳤다.
이렇게 기독교와 중국의 만남은 정치적,군사적 힘의 균형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정책이 달랐고 그 효과도 달랐다. 본 문장은 이 만남 과정과 만남을
유지해가는 서로의 원칙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므로, 차후 중국정부가 기독교
에 대해 실행하려는 정책을 조심스럽게 전망해 보고자 한다.
A. 기독교의 전래와 회고
먼저, 기독교와 중국의 네 번의 만남,그 전래과정, 활동상황과 중국인의
반응을 간략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1. 景教(聂斯脱略, Nestorius): 첫번째로 건너 온 경교는 431년 에베소
공회 (Ecumenical Council of Ephesus)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동쪽으
로 와서 중국에 이른 것이다. 5世纪末,이란을 거쳐 이라크에 정착하여 중앙
아시아에서 성행하였고, 6世纪末에는 이미 돌궐등 북방의 유목민에도 전해졌
다. 그 경교가 唐太宗 (635년)때 들어와 唐武宗 (845년)까지 성행하였는데
그 기간이 약 200년 간이다. 이러한 사실은 1625년에 발견된 1780자로 이
루어진 「大秦景教流行中国碑」에서 발견된다. 그 비석은 唐德宗(781년)이
세운 것으로 경교의 信仰, 礼仪, 道德教训과 景教의 전파와 당나라 조정과의
관계등을 수록하고 있다.
억불정책을 내세운 唐武宗(845년)은 외래종교를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다.그래서 경교 예배당이 훼파되고, 교회재산이 몰수되고, 선교사들도 강제
로 추방 당하게 됨으로 크게 위축하게 된다. 그후 黄巢之乱과 唐朝의 覆亡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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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거치면서 경교는 북방에 있는 약간의 소수민족이 신봉할 뿐 중국에
서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蒙古族의 克烈, 乃蛮, 蔑里乞와 汪古等部落,그리
고 畏吾儿族等은 경교를 신봉했다.
2. 也里可温 (Erkeun或Arkaim)은 원나라 몽고인들이 기독교인을 부르는
총칭이다.그 뜻은 히브리어 하나님, 곧 Elohim의 蒙古语의 표기로 하나님교
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의미한다. 마르코 폴로의 보고에 의하면, 원나라
때 北京, 山西大同, 甘肃敦煌, 肃州, 甘州, 凉州, 宁夏, 新疆喀什噶尔, 叶尔
姜, 依犁, 江苏扬州, 杭州, 镇江, 浙江温州, 福建泉州 등 여러 곳에 景教徒와
景教예배당이 있었다.
12세기 유럽에 몽고부족 가운데 경교가 성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당
시 기독교는 회교도와 싸워 십자군 원정을 하지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간
에 정권다툼을 함으로 말미암아 동유럽에서 흥하고 있는 회교에 대해 적절
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그래서 교황청은 동쪽의 몽고가 흥한 것을 반겼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을 했다. 그런 가운데 교황청은 몽고와 손을 잡고 중간
에 있는 회교 이슬람을 협공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은 1245年과
1253年에 프란세스파(Franciscans) 선교사 두 명(John of Plano Carpini 와
William of Rubruck)을 蒙古에 파견하여 定宗과 宪宗을 만나게 했다.
13세기에 가서야 교황청이 중국과 정식으로 접촉하면서 알게 된 것은
몽고 귀족 가운데 적지 않은 경교신자가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1269年,元
世祖는 이태리 상인 마르코 폴로 (Marco polo) 형제를 통하여 교황에게 文
法, 论理学, 修辞学, 算学, 几何学, 音乐과 天文学에 능통한 선교사 100명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만약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고 믿을만 하
다면 몽고인들은 개종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내용은 교황에게 전해졌고 교
황은 또 두 명의 도미니크파 선교사를 파송했으나 중간에 돌아가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을 뿐이므로 기독교와 중국의 만남은 무산되었다.
* 明朝取代元朝后,景教衰微,但并未绝迹,一直存在“十字架教派信徒”有
两个世纪,直到十六世纪左右,天主教传教士开始展开中国传教工作,景教徒数
目随之锐减。现时全中国只有香港还有聂斯妥里教派信徒,都是1990年代末期由
黎巴嫩或叙利亚来香港从商的信徒,人数并不多。香港的聂斯妥里教派主教除了
负责牧养香港的信徒以外,亦要同时兼顾东亚及南亚地区的所有信众。
3. 교황 Nicholas4세 때 天主教 선교사 (John of Montecorvino) 와 교황
의 사절이 1289년 파견되어 중국에 거주하며 비교적 순조롭게 선교해 신도
수가 증가하고, 교회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1307年, 교황 클레멘트 5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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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주교에 임명하기에 이르고, 이 때 신도의 수가 거의 1만 이상에
이른다. 원나라 때 에리쿤교나 천주교 신봉자들은 汉族이 아니라 당시 통치
계급인 몽고인이나 유색인 등의 소수민족이라 하겠다. 이들은 한족과 대립되
는 소수민족이므로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천주교의 본격적인 선교는 16세기 예수회 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토착화에 성공한 선교사는 이태리 출신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1583年 肇庆에 도착하여 일하다,
1601年 北京으로 이동하여 자유롭게 선교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유교와 불교를 면밀하게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은 선
교정책을 취했다. 유불도에 대해서는 补儒易佛 정책을 그리고 유교 자체에
대해서는「合儒」,「补儒」, 마지막으로「超儒」의 정책을 폈다.그리고 선교
사가 중국인과 접촉할 때 중국어와 중국 고대 성현의 글에 익숙하지 못하면
중국 상류계층에게 호소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교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별하였다. ① 곧 先秦儒教는
받아 들이고, 宋明儒教는 불교, 도교와 같은 맥락에서 거부하고 반대했다.
왜냐하면, 당시 유행하던 宋明理学의 폐쇄성, 형이상학과 우주생성론 등은
유신론 사상을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先秦儒家는 인간
간의 관계인 인륜을 중시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인 천륜은 다루지 않음으로
기독교가 파고 들어갈 공간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기독
교와 관계에서 고대유교를 구별하여 합일이 가능한 점, 부족하여 보충해야
할 점 등을 찾아냈다. 마테오 리치는 공자의 학설과 기독교는 상호모순 된다
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원시 문헌 가운데서 "天"의 观念을 찾아내서 중
국인들이 위격적인 신을 믿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 과정을 통하여 宋明儒
家를 압박하고자 했다. 이렇게 선진유교에 대해서는 合儒와 补儒를 거쳐 결
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기독교의 도리로 유교
를 초월하려는 超儒를 주장했다. 이 방법은 중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
다고 볼 수 있다.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만약 천주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려
① 传教士推崇的是孔子在上古时代创立的原始的儒家思想,而对宋代以后的理学(道学),则持
否定的态度。尤其是对北宋理学周敦颐之“太极论”,传教士们多方提出批评,因为“太极生两
仪,两仪生四象,四象生八卦,八卦生万物”的理念,与基督教的创造论大相径庭。尤其是最终
的结论为“无极生太极”,将天地万物本源和衍生的结构阐述得非常明晰,与上古时代儒家创造
者孔子之谓“未知生,焉知死”的不可知论相比,已经发展得非常完备的、关于宇宙生成的理论。这样,根据宋代的理学,传教士们找不是一个空间可以安置“上帝”,因为而也无从“补
儒”。在此情形之下,他们对理学多加打击,也就不足为怪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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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먼저 황제로 부터 거류허가와 선교의 허가를 얻어야 함을 알았다. 또한
조정대신과 지식분자들로 부터 좋은 호감을 얻어야 하고, 아울러 유교와 정
면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신도들이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사회에서
제사는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만약 공자에
게 제사하지 않으면 과거시험에 참여할 수 없고, 관료가 될 수 없으니 책을
읽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1610年, 마테오 리치가 사망한 후에도 邓玉函(Johann Schreck)과 汤若望
(Johann Adam Schallvon Bell)에 의해 중국의 고유 문화가 존중된 상태에서
중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补儒易佛정책의 결과 도교와 불
교도들의 선동으로 교안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616년「南京教案」
이 바로 그렇다.
1644년 신도의 숫자가 이미 10만에 이르렀다. 그 중에는 황족, 조정대신,
지식인 등이 있었다. 특히 유명한 徐光启, 李之藻등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
회 선교사들은 명나라 궁궐에 들어가 황태후,황후,태자에게 복음을 전해 그
들이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나라, 明永历帝(公元1623-1662年)본인도 미
사에 참여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예수회는 이런 좋은 기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 卜弥格(MichaelBoym)을 명조정의 특사로 로마교황청에 파견하어 교황
과 각 군주를 만나서 원조를 요청했으나 원조를 받지 못했다. 영락황제의 태
후는 교황의 서신도 받아 보았으나 어떠한 원조도 받지 못했다.
청나라의 황제 顺治帝와 康熙帝는 汤若望을 이어 천문대 대장인 南怀仁
(Ferdinand Verbiest)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西洋文化,器艺에 대해서 심지어
天主教에 대한 호감도 갖고 있었고,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깊었다.그는
명의상 첫번째로 천주교가 중국에서 공개적으로 전파되도록 허락한 군주이
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천주교가 동방선교에 대한 권리를 예수회에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도미니크,프란시스회가 복건성과 기타 연해에
선교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전엔 모두 예수회의 지휘를 받았지만 1631年에
이르러서,教皇은 기타 수도회도 중국에 와 선교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문
제는 중국선교의 방법론이었다. 특히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하는 우상숭배 문
제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도미니크 선교사들은 이 문제에 대해
교황청에 투고를 했고, 1704년에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중국 천주교도들의
모든 제사행위를 금하였다. 강희제는 그에 대해 대노하여 말하기를: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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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전하는 당신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을 파괴했다. 더 나아가 황제에 대하
여 도전하는 범죄를 행하였다. 멀리 있는 이방나라의 작은 교주가 어찌 감히
중국 황제의 지위를 초월하여 중화의 신하와 백성의 종묘사직의 예절을 대
신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②
결국 강희제는 1720년 선교를 금지했지만 엄하게 집행하지는 않았다. 그
러나 그의 아들 雍正帝는 천주교와 서양물건에 대해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
라, 즉위시 천주교 신부들이 동생을 지지한 일에 분노하여 더 엄한 금교 명
령을 내렸다. 그는 지방관이 임의로 선교사나 중국 신도를 핍박할 수 있게
했고, 중국인이 천주교를 믿으면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했다. 乾隆帝와 그후
의 황제들도 동일한 정책을 폈다.그 주요 내용은
기독교는 중국에서 전도할 수 없다.
서양 선교사도 일률적으로 중국에 거류할 수 없다.
외국인은 중국어를 배울 수 없고, 중국인이 만약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
르치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한다.
만약 중국인이 예수를 믿는다면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
4.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런던선교회 (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 1807년 9월 8일에 중국 마카오에 도착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합법적으로 거류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느냐 였다.
그 유일한 방법이 상인이 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법적으로 2년
을 지낸 후 동인도회사 직원이 되었다. 동인도회사 직원이 되었으나, 상주
들은 중국 땅에서 상업이 금지당할까 두려워 모리슨을 중국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1820년대 말, 30년대 초, 마카오에 머물면서 선교하던 모리슨에게 각국
에서 동역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 화란 선교회 출신 칼 구츨라프
(C.Gutzlaff),미국의 雅裨理(D.Abeel),裨治文(E.C.Bridgman),卫三
② 不仅视之为破坏中国传统的礼俗,更视其为对他本人的干犯和挑战,因为一个远邦的小教主,
如何能僭越中国皇帝的地位,代为决定中华臣民的社教礼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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畏(S.W.Williams), 罗孝全(I.J.Roberts) 等이 있었다.
통계에 의하면,1842年 중국본토에 17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면, 모리슨은 7년 전도하여 한 명에게 세례주었고, 25년
동안 일하여 10명의 신도를 얻었다. 裨治文은 1830년에서 35年까지 6年
동안 전도했으나 한 명도 예수 믿게 하지 못했다.
1840년 아편전쟁과 그후 1860年에 체결한 조약을 통하여서 중국의 금
교정책은 해지되어 전도의 자유가 허가되었다. 중국에서 기독교를 선교함
에 있어서 중국 정부로부터 오는 정치적인 방해요소가 법적으로 제거되었
다. 서방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 배
경에는 미국의 남북전쟁 종식으로 경제발전을 맞이 했고, 무디의 영향으로
종교부흥을 맞이 하였다. 1856年 基督教青年会 (Young Men Christian
Association), 学生海外宣教志愿运动(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등이 발족되었다. 이들은 해외선교를 부르짖었고 많은
신도들은 선교헌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858年에 81명에 불과했던 선
교사들이 1893年에 1324명에 이르렀다.
근대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정치배경의 변화에 있다고 하
겠다.
B. 중국의 기독교 정책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 중국의 기독교 정책은 세 번의 분수령이 있었다.
당나라의 경교에 대한 입장 뿐만 아니라, 원나라 때 에리쿤에 대한 태도도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그리고 천주교가 중국에 왔을 때도 크게 반대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강희제와 로마 교황청 사이에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문제
로 발생한 礼仪之争가운데 1704년에 내린 금교령은 당대에는 별로 엄하지
않았으나 아들 (雍正), 손자 (嘉庆) 들을 거치면서 더욱 엄해졌다. 1807년 모
리슨이 중국에 개신교 선교를 시작할 무렵에는 외국인이 중국에 발 붙일 곳
도 얻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이후 서구제국주의와 맺은 각종
조약으로 말미암아 대외관계에서 주동권을 차츰 잃게 되었다. 군사력의 열세
로 중국은 기독교에 대해 금교를 해제하게 된다. 기독교는 중국에서 종교전
파의 자유를 보장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③결국 1860년 불란서와 체결된 <천진>과 <북경조약> 중“要在修正,不在争
③ 1844年签订的中美《望厦条约》和中法《黄埔条约》章程中,允许美、法等国在通商口岸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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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으로 말미암아 과거 강희 옹정제 때 몰수했던 천주교 재산을 돌려준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1. 청대의 기독교 정책
1860년 조약에서 과거 강희제,옹정제 때 몰수 되었던 재산을 환급(“歸還
舊址”)받을 수 있다는 결정을 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반
감이 높아 갔고, 그에 따른 공격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860년부터 1890
년까지 중국에서 발생하는 기독교와 중국인 사이에 일어난 충돌은 무려 400
여 차례나 되었다. 서방 기독교 국가는 손실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중
국의 서양에 배상한 돈의 액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악순환이 계속된
상태에서 중국인들의 눈에 기독교는 중국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선봉으로 보
였다. 그래서 백성들의 뇌리에는 만약 “多一个基督徒, 便少一个中国人”,즉
기독교인이 한 사람 많아지면, 중국인이 한 사람 적어 진다는 뜻이다.
당시 1861년도에 함풍제가 조서에 교안을 처리하는 원칙을 제시했는데,
왕실의 기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查明根由,持平办理”와“不分民教,但
分良莠”④로 원인을 찾아 공평하게 처리하는데 중국인과 기독교인이든 상관
말고 옳고 그름에 기준을 두라 하였으나, 지방관리와 사대부들은 황제의 이
런 뜻을 따르지 않았다. 황제도 강압에 못 이겨 그런 가르침을 내렸다는 것
을 다알기 때문이다.만약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면 부득불 따르는 척 했을 뿐
만 아니라 뒤에서 선동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그래서 1898년에 光绪皇帝가 다음과 같이 내린 조서 가운데 张之洞이
《劝学篇》을 복사하여 군기처와 각 성의 도독이 읽고 참고하도록 명령한다.
本日翰林院奏,侍讲黄绍箕呈进张之洞所著《劝学篇》,据呈代奏一折。原
书内外各篇,朕详加批览,持论平正通达,于学术人心大有补益。著将所备副本
四十部,由军机处颁发各省督把学政各一部,俾得广为刊布,实力劝导,以重名
教堂。1844年7月3日,中美《望厦条约》签订。其中规定,美国人可在通商口岸“租地自行建
楼,并设立医院、礼拜堂及殡葬之处”。10月4日签订了《黄埔条约》也有类似条文,并规定“倘
有中国人将佛兰西礼拜堂、坟墓触犯毁坏,地方官照例严拘重罚”。清政府批准天主教驰禁。1845
年,道光皇帝在上谕中才准许中国人信奉基督教,但仍禁止外国人在内地传教。《同治朝筹辩夷
务始末》卷73,第30-31。还说“外人概不准入内地传教”。同上书卷74,第6页。11页,同治六
年十一月二十一日,总理船政前江西巡抚沈葆桢筹附条说。
④ 总理各国事务衙门奏,习教人众请分别良莠,饬令地方官妥为办理等语。据称法国条约内载
天主教原以劝人行善为本,发其劝善之意与释道同,是以康熙年间曹经准行。惟近来各省习教之
人与不习教者往往彼此迟误,若不持平办理殊不足以照公允。著照所请,嗣后各地方官儿交涉习
教事件,务须查明根由,持平办理。如习教者各系安分守己,谨饬自爱,则同系中国赤子,自应
与不习教者一体抚字,不必因习教而有所刻求,倘或倚恃教民,不守本分,干预别项公私事条,
或至作奸犯科,霸地抗租,欺侮良民,则不独为中国之莠民,亦即系伊教中之败类,必应照例治
罪,决不能因习教而少从宽假,各该地方官务当事事公平,分别办理,以示抗绥善良之至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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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而杜危言,钦此。
청말의 위기 국면을 타계하기 위해, 张之洞은“中体西用”의 입장에서 1898
年에 《劝学篇》을 쓴다. 그 요지는 “要在修正,不在争教”⑤이다. 그는 당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유교를 기초로 서구의 기술을 받아 들여 국가를
부강케 하는 것과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상
황은 반대로 정부와 백성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그에 따른 배상금을 지불하
게 되므로 발전의 기회를 놓히게 되어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황실과 조정, 중앙관료, 지방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건의
하기를 기독교에 대해서 공격도 논쟁도 하지 말라고 건의한다. 왜냐하면, 자
고로 종교간의 다툼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중국이 힘써야 할 일은 스스로의
약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서방의 군사기술을 받아 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는 청말의 근본문제의 원인을 서방에 두
지 않고, 중국 본연의 나약함에 두고 있다. 그러니 기독교와 충돌로 말미암
아 배상받은 돈을 오히려 국가발전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장지동은 중국인이 불필요한 논쟁이나 언행을 자행해 피동적인 함
정에 빠지지 말라는 당부를 지방관과 백성에게 하고 있다.
광서황제가 《劝学篇》에 대해 평가하기를,“《劝学篇》所论民教嫌隙、开
导愚氓一节,极为显豁,各省官绅洞明此理,不难家喻户晓,或可销患无形。”
이라 말했다. 이는 장지동이 당시 중국의 열악한 국제환경을 민감하고도 철
저하게 인식한 후 저술한 《劝学篇》의 관점이 당시 민교분규를 해결하는
원칙과 주도사상으로 광서황제에게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2. 공산화 이후: 毛泽东의 기독교 정책
모택동은 1949년 중국 공산화 성공이후 기독교를 서구제국주의의 앞잡이
로 본다. 그래서 서구와 중국 기독교를 단절하기 위해 1953년을 전후로 삼
자(自治,自養,自傳)원칙을 발표하여 교회에서 시행토록 한다.
1979년 등소평은 남방순시하며 “实事求是”, 개혁개방에 대한 구상을 펼치
⑤ 异教相攻,自周秦之间已然。儒墨相攻,老儒相攻,庄道也而与他道家相攻,苟儒
也而与他儒家相攻;唐则儒释相攻,后魏北宋则老释相攻;儒之攻他教者辨黑白,他教
之相攻者争盛衰。至今日而是非大明。我孔孟相传大中至正之圣教,炳然如日月之中
天,天理之纯,人伦之至,即远方殊欲亦无有讥议之者。然则此时为圣人之徒者恐圣道
之凌夷,思欲扶翼而张大之,要在修正,不在争教,此古今时势之不同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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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중국 백성의 먹고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를 편다. 특히
2004년 6월27일에 말한 “不管白猫黑猫 会捉老鼠就是好猫”, 이것은 어쨌든
농사회복에 유리한 방법이 좋다는 것을 말한다.
3. 짱쩌민과 후진타오의 종교정책
등소평에 이어 등극하여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실험하는 과정 가운데 자
본주의 맛을 본 백성이 밑으로 평준화한 공산체제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음
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진리체제를 세울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짱쩌민은 무너진 공산주의의 진리에 대한 개념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싱가폴
의 리꽝야오 수상의 도덕건설을 모델로 중국에 정신문화 건설을 추진한다.
리꽝야오는 유교를 통해 도덕을 흥왕시켜 보려 했으나 오히려 기독교와 불
교가 성행한 결과 그 일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짱쩌민은 그 내용으로
유교를 전면에 제창하지 못하고,단순한 구호만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
한계를 안고 있는 이 슬로건은 용두사미격으로 끝나게 된다. 그후 권력의 바
톤을 등소평의 의도대로 후진타오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 3기 지도자인 胡锦涛는 경제발전을 위해 개혁개방을 유지하면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개
혁 개방에 따른 기회균등으로 인해 먼저 공산당에게 부가 쌓이게 된다. 그로
인해 공산당은 기존의 법을 개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공산당 창립 80주
년에 자본가도 공산당원으로 가입이 허용되었다. 2007년에는 물권법이 통과
되어 실질적인 사유재산 인정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중국은 지역적(동서,남북)으로 빈부 격차가 심하고, 도
시와 농촌의 소득의 격차가 커지게 되었다. 후진타오의 小康社会, 和谐社会
의 건립과 삼자원칙에 따른 종교 시행 규례와 조례를 통해 중국에 시행되는
종교 정책을 알 수 있다.
C. 기독교의 선교정책
1. 공자 혹은 예수
전통적인 기독교 전도법으로 직접 사람을 만나 예수 전하는 선교방법이다.
이때 듣는 자는 예수를 믿든지 공자를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에 온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과 허드슨 테일러가 주로 사용했던
타협이 없는 배타주의 선교방법이다. 많은 교안 발생의 원인이 되었지만, 반
면 현 중국교회의 신도들이 주로 이 방법에 의해 예수 믿게 되었다.
10
2. 공자 더하기 예수
예수회를 비롯한 문화선교의 포용주의 방법으로 현지 문화를 연구하고 그
들의 문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는 신문
을 발간하고, 출판사를 건립하여 책을 출판하며, 학교를 세워 중국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치료받지 못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건립하였다. 백인들
이 중국의 도시와 농촌마을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는 직
접선교가 좋은 효과를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이 대두된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반서구 정서가 강한 마을에서 지방유지나 유생들이 서양인
의 말에 귀기울인 것은 쉽지 않으나 집에서 전도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전도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층민의 도움으로 만든 전도지는 지식인들의 수
준에 못미치는 약점이 있었다. 곧 기독교 용어가 없으므로 불교와 도교의 용
어를 빌어 만들다 보니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이 때 동서양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중국사람 눈에는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선교사들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없었을 뿐만 아
니라,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성찬시 먹고 마시는 살
과 피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예수 믿고 모두 형제자매가 되는 인간관계가 유교
의 윤리도덕으로는 부모 형제도 몰라보는 짐승과 같은 것으로 이해가 되었
다.또한 선교사들도 길거리 전도할 때 만난 중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
는지 알지 못했다.⑥
이런 배경 등으로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자주 발생하였고, 서양
의 군대는 선교사 보호라는 명목으로 출병하였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막대
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 일이 중국에서 400회가 넘게 일어났다.
이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중국내부와 선교사들 가운데 일어났
다.
이것이 바로 张之洞이《劝学篇》에서 주장한 “非攻教”의 관점이고, 그리
고 몇몇 선교사들이 주장한 문화선교, 곧 신문, 책출판, 병원설립, 학교건립
등의 방법으로 선교사가 거리나 가정으로 중국인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로 하여금 학교나 병원으로 찾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서로의 이해를
위해 자신들의 마음를 전하고, 홍보함에 있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병
을 고쳐주고,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행하는 간접선교 방법인 것이다.
⑥ 중국선교 100주년기념대회에서 안마태선교사 고백
11
물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좋은
시도라 하겠다.
이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중국인과 중국문화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발견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문을 발간하였고, 서양의
서적들을 번역하고 출판하여 중국인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그렇게 서양의
기술과 문화가 중국인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중국이 근대화의 길
을 가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중국선교에 가장 큰 장
애가 바로 유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 중화사상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서
양문화를 소개하면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서양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
다.이것은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중화사상에 대한 대응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곧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서양문화는 유교에 뿌리를 둔 중국문화보다 우월하
다는 것을 중국인에게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의 말을 듣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중국인과 가까워지고 그로 말미암아 복음 전
할 기회를 얻고자 한 의도였지만 기독교와 서구문화를 동일시 한 문제점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1920년대 중국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일어
난 한 원인이 되었다.
이 일을 주창한 선교사로는 马礼逊, 理雅各, 慕维廉, 李提摩太, 林乐知, 丁
韪良, 李佳白와 花之安 等이 있다.
모리슨이 강조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교사라면 마땅히 중국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선교는 종교상의 일만이 아니다, 만약 선교사가 가려
는 나라의 언어와 문학지식에 대해서 모른다면, 어떻게 그 나라 사람들로 하
여금 도덕과 정신적 지주와 기적 출현에 대해서 이해하게 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 그는 또한 주장하기를 “ 중국은 문명국가로서 남양이나 아프리
카와는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고대와 현대의 문학은 희랍과 로마와 당
시의 유럽 전체를 합친 것과 같이 풍부하다.
또 영국의 선교사 理雅各(James Legge,1815-1897)는 주장하기를 비록
유교의 체계와 사상이 동방사회와 시대의 제한을 받았지만 유교와 기독교는
원수가 아니다……선교사들 가운데 누가 유교경전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제
발 대단한 일이라 여기지 말라. 중국에서 일하는 선교사라면 이러한 책을 반
드시 완전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860年이후 비교적 체계적으로 기독교와 유교사상의 융합에 대해서 논의
한 선교사는 林乐知(Young John Allen,1836-1907)이다. 그는《教会新报》에서《消变明教论》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인성과
12
윤리도덕 규범과 유교와 다르지 않고 서로 통한다고 말했다. 또 성경과 유
교경전을 대비한 후 말하기를, 만약 유교가 五伦을 중시한다면, 우리 기독교
도 오륜을 중시한다. 유교가 五常을 중시하면 우리 기독교도 五常을 중시한
다. 유교의 군자가 삼계가 있으면, 우리 기독교 하나님은 십계가 있으니 이
러한 것이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그는 교안의 원인으로 성현의 책을 읽는 유생으로 지목했는데,그들이
결코 참된 유가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으로는 공자 맹자를 말하
지만 행실은 도척(盗跖)과 같다. 사실상 기독교와 유교는 종교가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 마음과 이치는 서로 통하므로 (心与理相通)“可以息谣言,可以
袪圣惑,可以消难变,可以坚信从”한다고 말했다.
林乐知의 제창 가운데 “引儒书以证教”의 선교사와 중국 신도들의 论文이
쏟아져 나왔다.⑦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自西徂东》을 쓴 花之安이 있다.그는 가
능한 유교의 사상, 기본이념과 단어를 사용하여 기독교의 교의를 기술했다.
예를 들어 유교의 “仁”,“义”를 근거로 基督教의 “博爱”와“无隐”을 설명했다.
그리고 “四书五经”가운데서 하나님, 天道, 용서, 성실, 존경등의 이념을 설명
했다.
花之安이 비록 유교와 기독교의 공통성을 인정했지만 기독교의 정신 가치
가 유교보다 높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유교가 비록 인간의 오륜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논하지 않고, 만물에 대해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록 도에 대해서 말할지라도, 도를 행함이 없고, 설령 도를 행하더
라도 땅의 국가에 한정되고, 천하를 위해서 도를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⑧
安保罗는 1896年10月《万国公报》에 《救世教成全儒教说》란 문장을 발
표했다.“儒教孔子,人也。耶稣,上帝之子也。”그래서 공자가 만약 당시 살았
다면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⑦ 如第84期郑雨人的《圣教儒教异同辨》,申言基督教与儒教“名虽迥异,道本同原,皆存心养
性之学”;第65期张更生的《请以儒书证圣教启》,指明两教“相发明、相表理者”;第245期载
花之安的《施教则善论》设问:“儒教与耶稣教地之相去数万里,世之相后数百年,……何以
‘施教则善’之语雷同如是哉?”答曰:“诚以前可以折衷,理归一致,自然不谋而合者也。”
而后,《教会新报》连载十余篇以“耶稣教或问”的署名文章,以儒教、圣教之异同为议题,指
出儒家之“道不可离”、“不怨不尤”、“施己及人”的伦理准则,无不“与耶稣教同”;英国
传教士艾约瑟的《稽古集解》四将《书经》、《礼记》等儒家经典与《圣经·创世纪》比照,从
历史的演变说明“书中所载天文、水利、国政、民情、风俗、言语、农事、工作等事,俱可彼此
互证。”从而引出“中西诸国派虽异而源实同”的结论。
⑧ 儒教“所言者尽人生在世之五伦”,而未有论及“天伦”和“物伦”(即“地伦”),以后他
指出儒教“可以言道,而不可以尽道;可以尽道于国家,而不可以尽道于天下也。”
13
丁韪良은 《天道溯源》에서 말하기를:불교와 도교에서 말한 선불과 보살
은 좋은 스승의 현명한 제자며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释、道两家称仙佛菩萨,
不过良师贤徒,传授衣钵之人,则人也,非神也。”
서방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유교가 상통하고 더 나아가 유교의 결점을 보
충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3.공자와 예수
삼자교회에서 채택한 다원주의 방법이다. 우리는 중국정부가 정책을 시행
함에 있어 중요하게 여기고 참고한 점을 살핌으로 장래를 가늠해 볼 수 있
다.
a. 청말시 중국정부의 기독교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 양면성이 존재한다.
외교적으로 교안을 처리할 때 “非攻教”의 态度를 취하지만,평상시에는 “灭
教或攻教”의 정서를 나타낸다. 그 기저에는 중화사상, 즉“华夷之辨”와“纲常
名教”관점에서 기독교의 유교에 대한 영향을 저지하고 있었다.
b.1900年 义和团运动이 일어났을 때,청나라 조정 즉 서태후는 먼저 이
화단원을 이용해 서양사람들에게 대항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양
인들에게 힘에 밀리자 서안으로 도망가면서 광서황제를 통해 다른 태도를
나타낸다. 즉, 선교사는 중국사람들이 선을 행하도록 권하기 위해 산 넘고,
바다를 건너 왔다, 그러나 각 성의 문무백관은 반드시 그들을 보호하여야 한
다는 유지를 내린다. ⑨
天主教共有44名外國傳教士和1萬8千多教徒被害,新教有186名外國傳教士
及其親屬被害 在義和團運動中,义和团攻击中129位传教士遭遇死亡英國人戴德
生創立的內地會有58人被害,此外還有21名兒童。 大部分传教士 2000的信徒
遭遇死亡。
허드슨 테일러는 내지회 선교사들의 죽음의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묻지 않
았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서구제국주의는 자기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 경비를 중국으로 하여금 배상하
게 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인명과 재산을 약탈해 갔다. 그러나 무고하게 공격
을 받아 죽은 자에 대한 책임을 일절 묻지 않는 것은 당시 중국인의 상식을
⑨ 即传教之士亦以劝人行善为本,梯山航海,备极艰辛,我中华即称礼仪之邦,宜尽其主之
谊。……再责成各直省文武大夷,通饬所属,遇有各国官民入境,务须切实照料保护。
14
초월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않음으로 내지선교회는 용
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중국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화단 선교사들의 죽음
을 통하여 중국인의 뇌리 속에 기독교의 사랑을 역사 현장에서 각인시켰다.
서구의 기독교에서 중국인의 기독교가 될 수 있었던 전환점과 같은 피의 제
사와 같은 사건이었다. 이를 기초로 현대 중국교회가 태어난 것이다. 지금
중국교회의 모체는 간접선교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중
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직접선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c.邓小平이 2004년 6월27일에 말한 “不管白猫黑猫 会捉老鼠就是好猫”는
농사에 유리하면 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등소평은 부강한 국가 건설
을 위해 설계하기를 중국특색의 시장경제 체제이다.외부에 혹은 논지적으로
상호대립되는 모순이지만, 예로 부터 중국에는 正과 反은 부담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했었다.
d. 江泽民과 胡锦涛는 제3세대 공산당 지도자들로 과거 모택동이나 등소
평과 같은 카리스마나 군대 계급장이 없다. 그래서 집단 지도체제를 구축할
수 밖에 없고, 수많은 전문가들에게서 자문을 받아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⑩
⑩ 유상철 기자 <중앙선데이> “집단학습을 알면 중국의 미래가 보인다”. 후진타오는 지난 5년 동안
40여차례의 강의를 전문가들로부터 듣고 있다.
1 2002년 12월 26일 헌법
2 2003년 1월 28일 세계 경제 형세와 중국 경제 발전
3 2003년 3월 28일 세계 취업 발전추세와 중국 취업정책 연구
4 2003년 4월 28일 현대 과학기술 발전추세와 중국 과학기술 발전,과학기술 운용과 사스(SARS)예방
5 2003년 5월 23일 세계 군사변혁 발전추세
6 2003년 7월 21일 당사상이론의 시대적 발전에 대한 역사적 고찰
7 2003년 8월 12일 세계 문화산업 발전상황과 중국 문화산업 발전전략
8 2003년 9월 29일 법치 및 사회주의 문명 건설
9 2003년 11월 24일 15세기 이래 세계 주요 국가 발전에 대한 역사적 고찰
10 2004년 2월 23일 세계 형세와 중국의 안전환경
11 2004년 3월 29일 현대 세계 농업발전과 중국 농업발전
12 2004년 4월 26일 법제 건설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완비
13 2004년 5월 28일 중국 철학사회과학의 번영 및 발전
14 2004년 6월 29일 당의 집정능력 강화 문제
15 2004년 7월 24일 국방건설 및 경제건설의 협조발전 방침
16 2004년 10월 21일 중국 민족관계사의 몇 가지 문제
17 2004년 12월 1일 중국 사회주의 길의 탐색과 역사적 고찰
18 2004년 12월 27일 2020년의 중국 과학기술 발전전략을 향해
15
江泽民의 精神文明 건설과 胡锦涛의 小康社会, 和谐社会 실현을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병원의 처방이 내려지 듯 현 중국 국가지도자들의 중국 사회문제
에 대한 진단인 것이다. 곧 정신문명이 흔들렸기 때문에 정신문명 건설을 해
야하고, 지역간에, 계층간에 노소간에 서로가 편치 못하고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목한 사회를 부르짖게 된 것이다.
이 두 방법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곧 상호 모순된 논리를 합병시키기
위한 노력하여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발전과 정권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모델(雷锋,李素丽)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뿌리뽑힌 나무를 다시 심
는 것 같이 효과가 떨어진 중국식 노력 구호에 그치고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정부가 끊임없이 제시한 화목을 위한 조처로는,
* 서부 대개발은 연안지역 부강에 따른 내지지역 주민의 상대적 빈곤을
달래는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조처다.
* 기득권자들을 위해서 물권법을 만들어 사유재산을 인정하게 되었다.
19 2005년 1월 24일 새 시기 공산당원의 선진성 유지에 대한 연구
20 2005년 2월 21일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 노력
21 2005년 4월 15일 중국 경제사회 발전전략에 대한 몇 가지 문제
22 2005년 5월 31일 경제 글로벌화 추세와 현재 국제무역 발전의 새 특징
23 2005년 6월 27일 국제 에너지자원 형세와 중국 에너지자원 전략
24 2005년 8월 26일 세계 반파시스트전쟁의 회고와 사고
25 2005년 9월 29일 해외 도시화 발전모델과 중국 특색의 도시화
26 2005년 11월 25일 세계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중국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
27 2005년 12월 20일 행정관리체제 개혁과 경제법률제도 완비
28 2006년 1월 25일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에 대해
29 2006년 2월 21일 세계 산업구조조정 추세와 중국 경제성장 방식의 변화
30 2006년 3월 27일 해외의 안전생산 제도 조치와 중국 안전생산 제도 건설
31 2006년 5월 26일 국제 지적재산권 보호와 중국 지적재산권 보호 법률 및 제도 건설
32 2006년 6월 29일 과학집정,민주집정,의법집정 견지
33 2006년 7월 25일 홍군 장정 승리의 회고와 사고
34 2006년 8월 29일 세계 교육발전 추세와 중국 교육체제 개혁 심화
35 2006년 10월 23일 해외 의료위생체제와 중국 의료위생사업 발전
36 2006년 11월 30일 중국 사회주의 기층민주정치 건설 연구
37 2006년 12월 25일 중국의 자원절약형 사회 건설에 관해
38 2007년 1월 23일 세계 인터넷기술 발전과 중국 인터넷문화 건설 및 관리
39 2007년 2월 15일 해외의 지역블록 발전상황 및 중국의 지역블록 협조발전 촉진
40 2007년 3월 23일 물권법 제정과 실시에 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16
* 공산당법을 개정하여 자본가도 당원이 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 헤이해진 정신을 다시 추스리기 위해 마오쩌둥 레린 사상을 주장한 것
이 아니라 고유의 유교.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제창하고 있다.
나가는 말
기독교는 과연 중국지도자들에게 어떠한 종교인가? 정신문명 건설에 필요
없는, 혹은 小康社会,和谐社会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종교란 말인가? 중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그 역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가? 혹은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또
는 알면서도 도움을 받기를 싫어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모
든 척 혹은 도움받기를 싫어하는가?
필자 생각에는 중국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알 뿐만 아니라 도움도 받고싶
어 한다. 그러나 漢族을 중심으로 퍼져가는 기독인들이 정권자들에게 순종하
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자유스럽게 복음을 전하여 진정한 기독교도가 되
면 그들은 삼자교회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기치 아래 둘 수 없게 된다.지
금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될까봐 두려
운 것이다.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은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는 것이므로 외부
와 연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용납하기는 힘들다. 삼자 50주년 때
주석이 걱정한 것은 “한국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중화사상의 표현임과 동시에 진리가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볼
수 있다.
중국교회가 과연 자유롭게 개방될 것인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제국
주의의 침략 속성과 기독교와의 연관 관계를 잘 안다. 그래서 현재 경제발전
을 위해 서구와 시장경쟁을 할 때 한족이 기독교인이 됨으로 발생되는 중국
내부의 분열된 약점을 보이기 싫은 것이다. 기독교가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면
각 지역에서 당서기의 말보다 교회 지도자들의 말이 더 영향력을 발휘할 것
을 우려한다. 이러한 현상이 溫州교회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권력누수 현상이 생기기 시작하면 결국에 가
서는 공산당 일당체제 속에서만 가능한 현정권의 유지가 어려울 것이라고
본 것 같다.
중국 정부당국자가 발표한 종교정책, 규례와 조례는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는 파악된 장소에 기독교인들을 두고자 하는 방안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곧
모두 정권안정과 유지를 위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종교정책의 근
17
간은 자국의 이익 혹은 자기정권 유지가 우선이다. 이것은 이들의 헌법이나
발표된 조례, 규례등의 문서보다, 그들의 정서와 이익 또는 필요에 소용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 문서는 법적으로 효력이 있으나 실생
활에서 효력은 크지 않다. 그리고 일당체제에서 문서는 언제든지 수정이 가
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중국에서 어떻게 선교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진리를 변절시키지 않지만 당국자가 안심하고 백성이 기쁨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역사의 교훈을 받아, 뱀 같
이 지혜로와야 할 것이다.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을 가르치되, 중국 교회에
필요한 내용으로 섬기는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불안해 하는 자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서 국가권력에 순종하고 애국하는 시민으로 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방법을 최소화 해야 할 것이다.---민원이 발
생하지 않게 주변인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
신하는 신앙인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 동역자들이 안심하고 목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그들에게
교회의 실질적인 권리를 빨리 넘겨주어 정신적 물질적 자립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서툴고 효과가 없더라도 믿고 맡겨야 한다.
2008년 북경올림픽과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 때문에 그 전에는 안전할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갔음을 요즘 북경 등 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미 관리하고 있는 삼자뿐만 아니라, 소수의 가정교회나, 한국
인을 상대로 하는 한인 사역자들도 종교국과 공안국의 철저한 감시속에서
조심스럽게 사역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비교적 자유스럽게 사역하던 한인
교회 사역자들에게도 예배장소 허가문제와 실정법 위반사항 등의 방법으로
종교국과 공안국이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유기성을 잘 발휘하여 대처해야 할 것이다.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사역자는 더욱 심도 있는 사역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드러내
어 사역하는 자들은 모델이 되는 교회를 중국사회에 세워 가므로 간접적인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중국정부의 정책과 그 변화를 살피면
서 교단과 선교회 그리고 선교사들이 지혜를 모아 적절하게 대응해야 할 것
이다. 어느 교단이나, 선교회나, 개 교회가 단독적이고 영웅적인 사역은 하
지않는 것이 중국교회를 위한 사역으로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선교후원 사역† > 선교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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