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의 여명- 모라비안 선교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은 선교에 박차를 가했으나 개신교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정치, 군사, 교리적 공세에 시달렸고 신학적 이론은 해외선교에 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나마 있던 선교적 활동 역시 미미하여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개신교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복음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자신들의 중대한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루터교의 경건주의자들이 이 방향전환에 큰 몫을 하였는데, 필립 슈페너와 할레 대학의 교수였던 헤르만 프랑케 등이 그들의 지도자였다. 프랑케는 할레 대학을 유럽 경건주의 복음운동과 18세기 해외선교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경건주의자였던 덴마크의 페르디난드 4세는 할레 대학에 덴마크 식민지인 인도의 트랜퀴바로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사역을 위해 바돌로매 진겐바크와 헨리 플리차우가 덴마크-할레 선교회를 세웠다. 이 선교회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C. F. 슈바르츠였는데, 그는 독신 루터교인으로서 1750년 인도에 파송되어 48년간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성실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이 선교회는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만 60여 명이 넘는 큰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초기의 복음전파 열정이 퇴색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할레 대학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또 한 그룹이 선교일선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역사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들이 바로 모리비안들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의 주도하에 일어난 모라비아 형제회는 지상명령의 비전을 성실히 이행하며 현대 선교의 위대한 시대인 19세기를 도래하게 하였다. 모라비안들은 버진제도, 그린란드, 북아메리카, 라플랜드, 남아메리카, 남아프리카, 라브라도 등에 선교기지를 설립했고,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들은 평신도 사역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1:60의 비율, 즉 60명의 교인 중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렇게 높은 비율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자급선교(Self-supporting)를 권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100년간 지속되었던 모라비안들의 24시간 중보기도의 힘은 모든 사역의 근원이 되었다.
모라비안 중에는 기술공들이 많았다. 그들은 해외 선교사역을 하면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며 장사도 하였다. 이들은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재정을 충분히 마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믿고 직접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런 모범을 통해, 선교사역에 있어서 설교자, 교사, 의사 뿐 아니라 사업가로서 복음을 온 세계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즉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복음전파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또한 선교사역에 있어서 중보기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선교사업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 결과 모라비안들은 18세기 선교를 주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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