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예림의집 2008. 9. 12. 09:46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6세기부터 시도되었던 중국선교는 미미한 교세와 정부의 박해 등으로 중국에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6세기 말 예수회의 선교사인 마테오 릿치에 의해 기독교는 중국에서 영구적인 기반을 잡게 된다.


마테오 릿치는 자비에르가 죽은 1552년에 이탈리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에 간 릿치는 예수회에서 큰 영향을 받고, 세속적인 모든 경력과 야망을 포기하고 예수회에 가입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빼내려고 로마로 가다가 심한 열병을 얻게 되고, 이를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여기고 결국 여행을 포기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릿치는 예수회에 속한 이후에도 대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제일 훌륭한 수학교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는 그가 나중에 중국에서 지식계급을 대상으로 하는사역의 밑거름이 되었다.


릿치의 첫번째 사역지는 자비에르가 사역했던 인도의 고아 지방이었다. 그는 단독으로 간 자비에르와 달리 13명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자비에르가 남긴 경험과 교훈을 가지고 다음 세대 교육에 집중하기 위해 어린이 교육과 훈련에 최대의 강조점을 두었다. 릿치는 어린이 사역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역의 임무를 하기 위해 예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던 중 인도에서 사역한지 4년 후에, 그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해 왔던 개척선교의 임무를 맡게 된다.


릿치는 중국해안의 포르투갈 식민지인 마카오에 도착한 후, 그의 선배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중국내륙으로 들어갈 기회를 포착한다. 이는 중국 주지사가 그가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을 듣고 초대한 것이다. 그리고 릿치는 재능들을 선교사역을 위해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과학기계들, 시계, 악기, 천문학 기구, 항해 기구, 과학서적, 그림, 지도 등으로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고, 특히 세계지도는 중국인들의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릿치는 복음전파를 위해 이런 도구들을 사용하였고, 심지어는 그의 동료 루지에리와 함께 삭발을 하고 불교승려의 옷을 입기도 하였다. 2년이 지나자 개종자가 생겼고, 작은 교회와 집을 짓게 되었다. 동료인 루지에리가 중국 사역 5년 후 유럽으로 돌아가고, 릿치는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릿치는 불교승의 의복을 유학자의 복장으로 바꿔입었는데, 유교가 중국 지식인들의 종교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존경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릿치는 조금씩 대중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유교는 단지 철학과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국인들에게 보여주면 기독교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릿치가 시도했던 기독교 토착화노력은 로마 카톨릭 문화에서 이단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릿치의 노력은 중국인들의 호감을 샀고, 그 결과 개종자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릿치가 중국 개종자들에게 허락한 제사의식은 17세기 초 중국의식논쟁으로 알려진 로마 카롤릭 선교 역사상 최대의 격론을 불러일으키고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게 된다.


릿치는 중국의 유교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중국고대의 사상들이 인간에게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경의를 표하곤 했다. 그는 타불라 라사 정책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타불라 라사 정책이란, 불신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철학, 도덕, 종교적 심성들은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해로운 것이므로 철저하게 뿌리 뽑아 버리고 무시해야 기독교 복음을 효과적으로 심어줄 수 있다는 정책이다. 자비에르도 이러한 정책의 폐기를 주장했는데 릿치는 그 노선을 따른 것이다. 이런 경향은 자비에르 이래 예수회의 선교 전통으로 세워졌다.


릿치는 중국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가 가진 과학지식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기에 그 이전의 어떤 외국인보다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황제의 코 앞에서 선교사역을 행할 뿐 아니라 황제가 주는 녹봉으로 생활을 하였다. 그가 북경에 올 때 커다란 괘종시계를 가져와 황제에게 진상하였는데, 그 이후로 그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황제의 궁전에서 "태엽 감는 직위"를 맡게 된 것이다. 궁전의 내시들이 시계를 작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릿치는 반대자들의 참소에서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다.


릿치가 북경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10년동안 상당한 수의 학자들과 관리들이 개종하게 되었다. 그 중 한림원의 학사로 저명한 폴 슈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그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 몇 대에 걸쳐 그 신앙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의 딸은 전문적인 복음전도자로 훈련을 받고 시골에서 복음전도 활동도 하였다. 또 다른 딸들도 결혼을 통해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손문의 부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장개석의 부인이다. 릿치로 인한 개종자 숫자(약 2000명)는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어서 중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릿치의 사후 50여 년이 지나면서 기독교 인구는 120배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