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나팔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요한계시록 8:6-7).
종말론은 복음 진리의 핵심이다. 이 세상은 창조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심판의 마지막이 있다. 창조주 외에 모든 피조물은 다 변하고 소멸의 운명을 겪는다. 종말은 땅에 거하는 이들에게 나쁜 소식이지만 하늘에 거하는 이들, 썩어질 피조물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창조주께 소망을 두는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세상의 종말을 통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이야말로 하늘의 소망을 향해 가는 나그네들에게 오늘의 역사를 비추는 등불이다.
하나님의 종말 심판의 진리가 회의와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자연재해를 극복하여 이전에 누리지 못한 행복과 풍요를 제공하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결국 그 심판으로 파멸되리라는 복음의 진리는 신화적인 환상으로 치부되었다. 과연 인류에게 과학기술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가? 베스트셀러 작가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4차 혁명 인공지능 등의 신기술들을 통해 인간이 신의 자리에 등극하여 영생까지도 꿈꿀 수 있는 신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과연 인류의 미래는 장미 빛인가?
이런 논리는 그야말로 신화적 꿈으로 사람들을 실재에서 멀어져 점점 현실을 왜곡하고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 뿐이다. 과학기술혁명으로 역사의 주인이 되기로 결정한 인간이 그 유용한 과학기술의 도구로 인간과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오늘의 현상을 보라. 핵 전쟁의 위협, 생태계의 파괴, 도덕과 정의의 해체 등등 과학기술이 과연 인간과 자연을 살리기 위한 것인지 죽이기 위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재해와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려 하다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사회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 없이도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한 과학기술의 치명적 독성을 뒤늦게 깨닫는 중이다. 사실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통해 오만해진 인간의 마음과 욕망을 따라 행하려는 부패한 본성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하나님도 없고 심판도 없다는 세상의 문화는 비진리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심판은 필연적이다. 지구의 터는 흔들리고 있다. 정치나 과학기술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흔들리는 터전을 안정케 할 수 없다. 세상은 더욱 불경건과 불의로 치닫고 사람들의 마음은 어두워져 이 악이 가져올 심각한 심판의 위기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지혜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붙들 것이다. 위기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위기에 처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회개치 않을 것이다.
진리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는 세상에 사나 심판으로 멸망당할 세상을 심판 당하지 않도록 막을 능력도 없고 그런 소명도 없다. 세상의 심판은 필연적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성도는 멸망할 세상이 아니라 종말을 넘어 도래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에 사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산다.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 심판은 자신의 터전을 흔드는 심각한 위기이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자들에게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고 주의 날의 가까움을 보여주는 징조들이다.
보이는 자연재해나 경제 위기나 전쟁과 폭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하늘의 비전이 없다면 보이는 현상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보이는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오늘의 위기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아는 성도는 위기에서의 구원이 심판주이시며 동시에 구속주 되신 어린양에게 있음을 안다. 주와 함께 죽임당한 성도들은 이미 심판을 벗어나 하늘에 산다. 오히려 심판은 교회를 박해하는 세상에 대한 정의의 실현이다. 보이는 현실의 위기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를 보고 그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린다.
어디에 사는가가 중요하다. 주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하늘 보좌 가까이에 사는가? 아니면 주를 위한 고난을 피하여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려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사는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경멸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이들이 당할 심판을 알지 못한다면 세상의 조류를 거스를 수 없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주를 따름만이 죽음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따름 역시 형벌의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 주를 위한 죽음은 생명에 이르게 하나 세상을 따르다가 당할 심판은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온다.
지금은 위기의 때이다. 종말 심판의 복음은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도 꺼려지는 불편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진리가 세상에 취하여 잠자는 영혼을 깨운다. 심판의 나팔이 울려 퍼지고 있다. 주의 심판 앞에서 성도들의 교회는 어떻게 설 것인가?
'ε♡з하나님께로..ε♡з > 성경,말씀,설교,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매하지 않는 자 같이 살라 (0) | 2020.07.21 |
---|---|
더 좋은 삶으로의 변화 (0) | 2020.07.20 |
변화, 그 위대한 결단 (0) | 2020.07.17 |
칭의.. (0) | 2020.07.16 |
2020. 07. 12 -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 (0) | 2020.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