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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성경 본문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

예림의집 2020. 6. 21. 20:44

헬라어 성경 본문이 생겨나기까지의 과정

 

인쇄본(印刷本) 시대 

문예부흥(renaissance)으로 인해서 눈을 뜨게 된 구라파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으려는 열심이 생겼다. 1450년 독일인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활자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성경의 사본 시대는 거의 막이 내리고, 인쇄된 성경을 만들려는 경쟁이 생겼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쇄된 성경을 손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세기 기독교가 라틴역 불가타(Vulgata)를 공인된 성경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 사본은 특수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문예부흥의 바람이 불고, 인쇄술이 발명됨으로 인해서, 원어 성경 인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스페인의 주교 히메네스(Francisco Ximenes de Cisneros, 1437-1517)의 창안으로 이루어진 소위 [여러번역대조성서](Complutensian Polyglot)라는 방대한 대조(對照) 성경의 제5권에 신약 성경 헬라어 원문이 실렸다. 그것이 151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레오(Leo) 10세 교황의 재가를 얻은 것은 1520년 이후이며,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공개되지를 않았었다. 

'대조성서'(Polyglot) 속에 실린 신약 헬라어 성경이 어떤 사본들을 배경으로 가진 것인지를 확실히 알 도리가 없다. 히메네스(Ximenes)가 레오(Leo) 10세 교황에게 그 성경을 봉헌하면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사본들을 얻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밝히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헬라어 사본들로 말하자면 각하의 덕택이 큽니다. 각하께서 사도 도서관(Apostolic Library)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매우 오래된 사본(Codex)들을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이 작업에 있어서 그 사본들이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히메네스(Ximenes)는 로마에 있던 사본들을 이용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사본들이 어떤 것인지, 몇 개나 되는지, 어떤 성격의 것인지 등을 알 수 없다.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헬라어 본문이 인쇄본으로서는 제일 먼저 된 것이지만, 1522년까지는 그것이 세상에 발표되지 못했었고, 그 틈을 타서 에라스무스(Erasmus) 헬라어 성경이 먼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됐다. 스위스 바젤의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이 스페인에서 진행 중인 Polyglot Bible 소식을 듣자,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자기가 선수(先手)를 쳐서 신약 성경 헬라어 인쇄본을 출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1514년 8월에 그 곳을 방문 중이던 화란의 유명한 학자요 휴머니스트였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설복시켰다. 

상당한 보수를 약속받은 에라스무스는 1515년 6월에 다시 바젤에 가서, 인쇄소의 조판을 위하여 신약 성경 사본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 전체를 포함한 사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몇 개의 부분적인 사본들을 참고하며, 나름대로의 수정을 가하여 인쇄소에 넘겼다. 

메츠거(Bruce M. Metzger) 박사의 말에 의하면, 에라스무스가 이용한 사본은 바젤 대학 도서관에 있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두 개의 사본들이었는데, 하나는 복음서 사본이요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과 서신 사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다 12세기의 것들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 밖의 두세 개의 사본들과 비교하면서 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계시록의 경우는, 그가 입수한 사본이 12세기 것 하나뿐이었고, 자기 친구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사본은 마지막 한 장이 떨어져 나가, 여섯 절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라틴 불가타 성경을 대본으로 해서, 그 부분을 역(逆)으로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그가 번역한 부분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헬라어 사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잘못된 번역이 소위 '텍스투스 레셉투스'에는 오늘까지도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그 마지막 부분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도 역시 불가타를 대본으로 해서 수정을 가하였다. 그것이 인쇄에 붙여진 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1516년 3월 1일에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수 백 개의 오식(誤植)이 발견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많이 팔렸고, 그 제2판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독일어 번역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초판(1516), 제2판 (1519), 제3판(1522)에 이어 제4판을 1927년에 냈는데, 그것은 히메네스의 성경이 공식으로 소개된 뒤의 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학자답게 자기 것과 히메네스의 것을 비교하여 다시 약 90여 곳을 수정하여 제4판을 낸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5판이 제4판과 대동소이하게 출판되었다. 그것이 1555년이었다. 

결국 에라스무스 성경은 5-6개의 소문자 사본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메츠거의 평가에 의하면 비평적 가치에 있어서는 [여러번역대조](Complutensian) 신약 성경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에라스무스 성경은 비공식적으로 베니스(Venice),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 바젤(Basle), 파리(Paris) 등지(地)에서 30여 종류나 출판되었다.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 성경이 출판된 후에 뒤를 이어서 많은 것들이 나왔지만, 결국 그것들은 다 에라스무스의 것을 몇 군데 고친 것뿐, 근본적으로는 이 저열(低劣)한 형태의 헬라어 성경을 재생한 것에 불과하다. 

그 후에 그것이 어떻게 '텍스투스 레셉투스'(공인 성경)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불란서 파리의 유명한 출판업자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라틴식으로는 Stephanus)가 파리에서 세 번(1546, 1549, 1550), 제네바에서 한 번(1551)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의 초판과 둘째 판의 본문은 히메네스(Ximenes)의 것과 에라스무스의 것을 혼합한 것이고, 제 3판은 에라스무스의 제4판과 5판의 본문을 밀접하게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 제3판은 매 쪽 난 외에 14개의 다른 사본들과 히메네스 성경의 읽기(reading)를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스테파누스의 제3판은 많은 사람에 의해서, 특히 영국에서, 헬라어 성경의 표준 본문으로 인정되었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친구이며 그의 후계자였던 성경학자 테오도르 베자(Theodore de Beze, 1519-1605)가 1565년에서 1604년 사이에 적어도 아홉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10판이 1611에 출판되었다. 그는 보다 양질인 베자 사본(Codex Beza)과 클라로몬타나 사본(Codex Claromontanus)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대하여 주(註)에다 언급했을 뿐, 본문을 수정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출판한 헬라어 본문은 스테파누스의 제4판(1551)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그 때까지 공인된 것으로 받아온 전통적 본문과 그것들이 너무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들이 보편화되어 마침내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고착(固着)시키는 방향타(舵)의 역할을 했다는 일이다. 

1611년의 [영어흠정역] 번역자들이 1588-9년과 1598년의 베자 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했으니, 베자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1624년에 라이덴의 야심적 인쇄업자 형제 보나벤투라 엘제비어(Bonaventure Elzevir)와 아브라함 엘제비어(Abraham Elzevir)가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는데, 그것의 본문은 주로 베자의 1565년 판을 취한 것이었다. 그후 1633년에 제2판을 찍으면서 그 서문에다가 자랑삼아 "이것은 이제 모든 사람에 의해서 수락된 본문" 즉 Textus Receptus라는 말을 적었다. 이렇게 해서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가 출판한 여러 판의 헬라어 본문이 신약 성경의 "유일한 참 본문"(the only true text)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그 뒤에 나온 판들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영어흠정역]을 위시하여 구라파의 주요 개신교 번역들이 1881년까지 그것을 대본으로 삼은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에 대해서 너무도 미신적인 존경을 바치는 나머지, 그것을 비평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마치 신성모독이나 되는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경의 출현 

불과 5, 6개의 변질된 후기 소문자 사본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약 400년 동안 횡포를 부리고 있는 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학자들을 통하여 많은 귀중한 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사본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밀(John Mill, 1707), 벤틀리(Richard Bentley, 1720), 벵겔(J.A. Bengel, 1734), 웨스타인(J.J. Wettstein, 1751-1720), 그리스바하(J.J. Griesbach, 1775-1807) 등의 기초 공작을 거쳐서, 본격적으로 과학적인 본문 비평을 시작한 사람은 락흐만(Karl Lachmann, 1831)이었다.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가 시내 산 사본을 발견한 이래 1841-72에 여덟 판의 헬라어 신약 성경을 출판하였고, 트레글러스(S. P Tregelles)가 1857-72에 역시 그의 헬라어 성경을 내었으며, 웨스트코트(B.F.Westcott)와 호르트(F.J.A.Hort)가 합작하여 1881-82에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이라는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확실히 텍스투스 레셉투스 시대의 종언을 가져왔다. 그 이후에 신약 성경 본문 비평학은 확고부동한 고지를 점령하였고 거의 완벽하다고 할 만한 비평판 원어 신약 성경이 출현하였다. 

 

본문 비평학적 견지에서 본 텍스투스 레셉투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그것을 맹종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으며, 비슷한 것이 많은 것 뿐이어서, 유독 그것만이 영감됐다거나, 그것만이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아주 후기에 만들어진 소문자 사본 5,6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비잔틴 형의 본문이다. 비잔틴 형의 본문은 4세기 이후부터 유행한 것이며, 2세기, 3세기의 파피루스나 대문자 사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인위적인 많은 변개(變改)가 발견되는 소위 훼손된(corrupted) 본문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에라스무스가 라틴 불가타를 역(逆)으로 번역한 부분(계시록 마지막 6절)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임의로 불가타와 비교하면서 수정한 부분들이 많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4세기 이래 필사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잡다한 설명구나 해석을 첨가하여 팽창하고 길어진 본문이다. 

1551년 로버트 스테파누스라는 출판업자가, 자기 출판사에서 나온 성경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하여 절 구분을 하였는데, 확대되고 늘어난 본문을 절로 나누어, 절 수를 매겼기 때문에, 원래는 없던 본문에도 절 수가 붙게 되었다. 비평판 성경은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자연히 내용이 짧고 따라서 스테파누스의 절 구분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권위 있는 고대 사본들이나 현대의 비평판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본문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거나 변개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원래는 짧던 본문에다가 사람들의 말을 첨가함으로써, 성경을 흐리게 하였다. 물론 보다 명백히 하려고 선의로 첨가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흠을 낸 셈이다. 

[영어흠정역]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하는 나머지, 그것의 대본이었던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권위가 있고 유일한 가치가 있다고 강변한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기도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누가 번역했든지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귀한 것이다. 번역자의 실력에 따라 번역의 질적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아무리 잘된 번역도 100% 정확할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어느 하나만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어째서 하필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만이 완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은 영국인이나 미국인 일부와 사대주의적 사고를 가진 일부 사람들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흠정역의 대본인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정확무오하다는 연역적 판단은 매우 졸렬하고, 사실과는 천리 만리 동떨어진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며,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많은 사본을 필요로 하는 지방에서, 자유분방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사견(私見)을 사본에 넣으며 필사했을 경우, 그 지방에는 원본과는 크게 상거가 있는 확대된 본문이 대거 유포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거쳐서 확대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이 오늘날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사본의 진위를, 수(數)를 가지고 측정하는 것은 이미 진부한 방법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수를 따진다면, 예수님을 죽이자고 한 악한 무리의 수가 진리 자체이신 한 분 예수의 몇 백 배가 아니었던가! 진리는 수가 적어도 진리이다. 아니 수가 하나뿐이라도 진리는 진리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비잔틴본문(Byzantine text, Majority text) 지지파의 거장으로 Dean Burgon, Z. C. Hodges 그리고 Farsta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도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Burgon은 다수본문(Majority Text)의 신판(新版)을 내려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인데, 그의 조사에 의하면 마태복음에서만도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150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례로 나간다면 신약 성경 전체에서는 그 둘의 차이가 엄청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정확하고 믿을 만하고 그것들만이 하나님이 특별히 보존하신 본문이라고 주장하는가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제1장, 제8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하신 것이며, 그의 각별한 돌보심과 섭리에 의하여 순수하게 보전된 것이며 따라서 믿을 만하다. 그래서 모든 종교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그것에다 호소하는 것이다. 

이 교리를 만들 때(17세기 중반)에는 물론 텍스투스 레셉투스밖에 없었다. 그 후에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고, 본문 비평학이 발달하여, 원본에 보다 가까운 본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텍스투스 레셉투스 지지자들이 그 교리를 앞세워 가며 텍스투스 레셉투스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時代錯誤)가 아닌가. 

사람이 만든 교리가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세 교회의 과오를 답습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감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흠하게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바로 그 무흠한 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성경 어디에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유일무오한 성경이라고 했는가 말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성서를 쓰셨다(God Wrote Only One Bible)]라는 책을 쓴 레이(Jasper James Ray)는 162개의 시험 구절을 선발하여, 현대 비평판 헬라어 성경들과 현대 영어 성경 번역들을 비판하였다. 즉 그가 택한 162구절에 있어서 현대 성경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나 영어흠정역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그가 택한 구절들이 현대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택한 162구절 중 31개에 있어서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다수본문(Majority text)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말은 결국, 어느 하나가 배타적으로 권위가 있거나 믿을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카슨(D. A. Carson) 교수의 말을 귀담아 들을 만하다. 비잔틴 형 본문이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꼭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잊어버린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겨우 몇 개의, 비교적 늦은 시대의 사본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즉 비잔틴 전승을 나타내는 사본들이 수천 개에 달하는데 비하면, (너무 소수의 사본을 근거로 했다는 말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가 비잔틴 전승의 사본들을 근거로 했다는 것과, 그 자체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전승과 퍽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물론 사실이지만, 그 광범한 증거들이 텍스투스 레셉투스 자체의 전승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한 본문 전승 안에 있는 가장 친근한 사본들끼리도 한 장(章 chapter)에 평균 여섯 개 내지 열 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만큼 사본들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서로 다르고, 따라서 어느 하나만을 지적하여 그것만은 무흠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변개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독 텍스투스 레셉투스만 홀로 권위가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텍스투스 레셉투스와 영어흠정역의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될 수 없다"는 명제의 말씀들(고후2:17; 마13:25; 계22:19; 신4:2; 잠30:6; 요10:35; 눅16:17 등등)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지지하는 성경은 무흠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5,500여 개의 사본이 하나도 같지 않고 다 다른데, 그리고 텍스투스 레셉투스도 역시 그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성립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역부족과 연약함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보관하지 못했고 또 사본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어서,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들이 하나 같이 불완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을 느끼기에 일점 일획이라도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다. 사실 성경 사본들은 세속적 고(古) 문헌들에 비교하면 월등하게 정확도가 높다. 아무리 변개가 심한 사본일지라도 교리를 바꾸게 할만큼 심하게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본문 비평학자들의 정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드디어 글자로 표현되었는데, 사람의 언어는 모두 그 구조가 다를 뿐 아니라 불완전하여, 여러 방언으로 기록되고 번역되는 과정에서, 결코 서로 완전히 일치하거나 완전히 정확할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상=말씀이 여러 사본과 번역들 속에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보존되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고, 보다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계속 원본을 찾아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텍스투스 레셉투스는 기독교회의 매우 중요한 유산 중의 하나이다. 영어흠정역도 훌륭한 번역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본이나, 절대 무흠한 번역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