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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19 - 탁월한 삶을 추구하라

예림의집 2020. 4. 20. 07:32

2020. 04. 19 - 탁월한 삶을 추구하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5-14).

부활 생명과 여기서의 삶
우리는 주의 부활에 연합한 자이다. 그래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부활은 우리 안에서 삶을 열정적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다. 우리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낙망하고 의욕을 잃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만나면서, 타인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몸과 마음이 아프고 그로 마음의 불안하고 일의 능률은 오르지 않고 계획하는 것들이 실패하고 삶이 행복하지 않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찾아서 회복하고 활력을 찾으려 한다. 스포츠를 즐기고 음악을 듣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마음 편하게 즐기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고 문화생활을 하기도 하고 종교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의 고민과 고통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우리 안에 부정적인 심리 기제가 작동하고 있고 문제가 우리의 삶을 장악하게 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저주 아래 있음과 죽음의 세력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인생은 육체로서 이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삶에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을 바라는 것은 유아적인 환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생에 고통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생이 불멸의 신이 아니기에 병도, 가난도 고통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불교의 진리이다. 인생에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 없는 환상을 품고 살게 되면 그 욕망과 집착으로 더 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진단이다. 고통을 수용하고 욕망을 줄이는 것이 인생의 고통에 대한 불교의 해결책이다. 이런 진리는 나름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인생의 욕망과 환상을 단념할 때 삶이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도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다른 해결책을 본다. 삶의 문제를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실망하는 삶도 아니고, 욕망을 줄이고 고통을 수용하는 삶도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사 산 자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 죽음을 이기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죽음은 산 자인 우리의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산 자로서 살아있는 삶, 죽음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는 삶이 죽음에 대해서 승리하는 것이 경험된다. 가난도 질병도 고통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극복된 것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과 평화가 우리의 운명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우리의 과거는 가난과 질병과 약함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의 변화를 꿈꾸지 못했다. 그래서 이전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삶의 조건들과 마음을 지금도 그대로 지니고 살고 있다. 주님을 믿는데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과 조화를 이루는가?
주님을 믿는 것을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분리시키고 삶의 문제들과 이것의 극복을 신앙과 상관없이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주님을 믿는 것은 삶의 변화를 믿는 것이고 부자유한 삶이 자유로운 삶으로 고통스러운 삶이 행복한 삶으로 변화될 것을 믿고 그것을 꿈꾸고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이란 삶의 변화의 소망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실제적으로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의 정복이고 가난과 질병과 약함의 정복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 삶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주님의 부활의 특성을 이렇게 제시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 15:42-43).” 이것이 주님의 부활 안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주님과 연합한 자로서 우리는 이제 약한 자에서 강한 자로 변화되어간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몸과 마음을 강한 몸과 마음으로 바꾸신다. 병든 몸을 고치시고 병든 삶을 건강하게 하신다. 우리 안에 주가 계심으로 절망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와 희망과 평화가 임한다. 삶의 가난과 치욕의 저주가 깨지고 부요함과 영광의 축복이 주어진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주님과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곧 죽음의 과거를 버리고 생명의 미래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3-14).”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육체를 신뢰하는 삶이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빌 3:4).” 육체의 신뢰는 죽음의 삶이다. 그는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고 그 율법에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 했지만 율법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음을 알게 되었다(갈 3:10). 육체의 추구들은 삶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저주 아래 있게 한다.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의 과거의 삶은 죽음 아래 종속된 삶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생명으로 죄에서 벗어나고 저주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누리고 산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이제 죽음 아래 있던 과거의 인생을 버리고 생명으로 넘치는 미래로 달려간다.
이제 죄 아래 육체의 것을 추구함으로 저주와 죽음 아래 살던 과거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꿈꾸는 자이다. 여전히 우리 삶을 두르고 있는 가난과 질병과 약함에 대해 부활의 희망으로 단호히 ‘아니오.’ 해야 한다. 가난과 질병과 약함과 수치는 당연하지 않다. 가난과 저주는 우리의 육체와 죄로 인한 것이다. 죽음의 과거를 거부하는 것은 두려움과 절망, 미움과 욕망을 거절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미움과 욕망, 절망과 두려움이 우리 삶을 지배했지만 이제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이 과거의 습관을 깨뜨리게 한다. 더 이상 이런 과거의 묶임에 묶여 있을 수 없다. 부정을 부정하라.

탁월함의 미래가 현재에로
우리는 꿈꾸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드러난 새로운 미래의 비전이 우리의 현재의 삶을 이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평범한 삶을 넘어선 탁월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생각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현재의 저주와 비천함에 근거한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이제까지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님의 꿈의 현실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이 땅의 모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영광으로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썩지 아니할 영광으로의 부활이다. 썩지 아니할 부활이란 가장 탁월한 영광의 부활임을 말한다. 그는 부활 하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지니셨다(빌 2:9).“ 그래서 그분을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하다(빌 3:8).“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진다.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우리는 만물을 다스릴 주님께 속한 자들이고 열방을 향한 축복의 통로들이다.
우리는 미래의 영광, 탁월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으로 말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우리 자신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가장 탁월한 위인, 가장 탁월한 영웅, 놀라운 인물이신 주님이 우리의 모델이다.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위대한 이름을 얻고 그분의 부요를 누리는 것을 소망하고 열정적으로 달려간다.
그 비전이 있기에 고난이 있다. 미래의 비전을 향한 삶은 현재를 넘어서는 모험이다. 영웅들은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아내와 아들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에 엄청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칼립소에게 이렇게 답한다. “나는 파도와도 전쟁터에서도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되라면 되라지요.” 이것이 영웅의 용기이다. 미래의 비전은 우리에게 고난을 요구한다. 이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영광에 합당한 자로 정금같이 빚어진다. 탁월함이란 단지 부와 명성과 권력이 아니다. 탁월함이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인격에 참여함이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는 성결과 의를 추구한다. 그래서 악한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고난에 대해서 영광으로 갚으신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 5:10-12).”
오늘날 사람들의 꿈은 고난이 없는 행복의 꿈이다. 이 점에서 고난을 통한 탁월한 영광의 꿈은 우리에게 고유한 것이다. 보다 더 열정적으로 미래의 꿈이 이끄는 고난의 길로 들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