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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예림의집 2019. 10. 3. 17:57

놀라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①일곱째, 성령님이 계시는 가장 놀랍고 분명한 사실은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그 사랑의 시작은 성령님의 근심하심에서부터입니다.

③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나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일곱째, 성령님의 근심하심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성경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30).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독특한 마음의 근심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빠지면 마음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헌금할 돈을 헌금하지 않았을 때 두고두고 마음에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는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지 못해도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민도 아닌 마음의 부담을 그리스도인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근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근심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저 마음이 괴로운 정도로 여기지 말고, 깨달은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님이 근심하실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갈 때에는 주님을 바라봤는데, 그 이후 주님만 바라보지 못한 것 같다. 큐티도 하는데 자꾸 세상 것을 보고 내 생각대로 행동했다. 기도의 부족함을 느꼈다. 주님 도와주세요!>(8월 29일 영성 일기).

<그렇게 그냥저냥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다. 왔는데 또 공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머리로만 '하나님 생각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했다. 내 힘으로 하려니까 안 되는 것 같다. 자꾸 나만 힘든 것 같다. 혼자 생각하고 그 생각에 빠지고 빠지고 빠져서 공허함에 빠져 버린다. 그럴 때 다른 생각으로 돌릴 것을 찾아봐야겠다. 찬양을 듣는다든가, 말씀을 읽는다든가, 기도를 한다든가. 주님! 전심으로 주님만 바라보게 해 주세요.>(9월 2일 영성 일기).

위의 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입니다. 이 학생은 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일기를 썼을까요? 왜 마음이 공허한 곳으로 빠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일기를 기록했을까요? 성령님이 그 마음 안에 계시다는 너무 분명한 증거입니다.

<수련회를 갔다 오고 난 뒤 나의 영적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다. 제일 중요한 죄와 무너짐의 근원을 찾는 게 시급한 걸 알았다. 미디어 금식도 잊어버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생활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삶이 무너진 것이다. '주님, 이런 나를 보고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성령님의 근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 이제 회개합니다. 매일 컴퓨터, TV에 찌들어 사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다짐을 적기 시작했다.

1. 죄를 가증스럽게 여기자.

2. 지금 거룩하지 않을지라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자.

3.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했다면 주님의 거룩함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

4.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5.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살 수 있을까요?'라고 늘 부르짖자.

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즉시 기쁘게 순종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자.

이렇게 다 쓰니 주님이 '넌 잘할 수 있다.'라고 힘주시는 것 같았다. '주님, 저의 마음에 평안함을 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룩하지 않고는 이젠 제가 힘들고 불안해서 못 살 것 같습니다. 주님, 임재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주님!>(고2 여학생의 영성 일기). 

여러분이 느끼는 성령의 근심에는 어던 것이 있습니까? 생각나는 대로 써 봅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는 7가지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가지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는 것으로 '주여'도, '하나님 아버지'도 부를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용서하라는 소리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분명히 있어야 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데, 위의 7가지를 한다고 성령님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3, 24). 성령님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조차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시도 바울은 자신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성령님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이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분명한 모습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더 알고, 더 친해지고, 더 전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6, 27).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생각을 살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탄식하시는 것은 너무나 크고도 놀라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성령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받는 놀라운 복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시고, 용서와 사랑하는 마음도 주시고, 전도하는 마음도 주시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부르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부르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한 귀족은 순교를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아무리 조사해 봐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전도사가 학창 시절 시험 기간에 드라마를 보다가 어머니와 싸웠다고 합니다. 계속 공부하다가 잠깐 TV를 본 걸로 꾸중을 하는 어머니가 너무 약속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다투고 방에 들어왔는데, 곧바로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가서 이야기를 하긴 민망하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잔잔한 음악을 틀고, 어머니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가 받자 한동안 음악만 틀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그중 한 명은 틀림없이 나일 거야!"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엄마! 세상에 50명의 사람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그중 한 명은 틀림없이 나일 거야!"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엄마! 세상에 10명의 사람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그중 한 명은 틀림없이 나일 거야!" 어머니도, 전도사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세상에서 한 명이 엄마를 사랑한다면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일 거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만 남는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 안에는 분명 예수님이 살아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고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