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통로 감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1:40-4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가 은혜가 됩니다. 형제님 모습이 참 은혜가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6:22-24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그렇습니다. 은혜는 기쁜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은혜는 즐겁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시는 혜택, 사랑, 선물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고 아주 단순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노력이 있든 없든,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친절인 것입니다. 그것은 술과 여자와 노래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탕자를 아버지가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란 죄인인 여자를 예수님이 맞아 주는 것이며 혹은 증오 받는 세리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5)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스데반이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7:60).
은혜란 어머니가 아파서 칭얼대는 어린애를 참고 달래는 것이며, 까다로운 고객에게 점원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며, 좀 둔하여 잘 깨우치지 못하는 학생을 선생님이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죄에 따라 다루지 아니하며 우리의 허물을 따라 갚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시 103:10). 사실 은혜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 약한 자, 부적한 자, 받을 만하지 못한 자, 멸시받는 자를 대할 때 나타나는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며 대가 없이 지불되는 호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요, 또한 계속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는 통로가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은 이 은혜의 통로인 “감사”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첫째, 음식 앞에서 감사
음식 앞에서 감사란 먹는 음식뿐 아니라 주님이 주심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에 대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하십니까? 꼭 매끼 먹을 때마다 기도해야 하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식사 기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해서 꼭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6:26-28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또 잔을 가지사”무엇을 하셨습니까?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주님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축사하다”라는 말과 “감사 기도”라는 말은 원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같은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어떤 때에는 “축사하다”라고, 또 어떤 때에는 “감사 기도”로 다르게 번역된 것입니다.
감사는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일용할 양식을 받고 이 땅에서 생존의 은혜를 누림으로 그분에게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존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먹을 수 있는 이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오늘처럼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유엔 식량 농업기구 FAO의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 가운데 10억 4천2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의 18%, 그러니까 7-8명 중 한 사람은 하루 한 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 중 매년 약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현실이라면 한 끼 식량을 앞에 놓고 하는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얼마나 절실한 일상의 기도이겠습니까?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식사 전 기도함으로 나의 생존의 원천이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말고 고백하십시오. 또한 나처럼 먹지 못하는 이웃들에게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감사와 축복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말 성경 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는 것을 많은 경우 “축사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셨고, 그래서 식전 “감사 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본질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9절을 읽겠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자 이제는 “축사하시고”를 “감사 기도하시고”로 바꾸어 읽어 봅시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상황을 살펴봅시다. 앞에 놓인 것은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인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습니다. 그런데 배 고품을 해결해야 할 사람들의 수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 명”그러니까 실제로 2만 명 가까운 군중들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에라도 감사할 수 있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기적 중 한 가지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과 감사의 능력과 순종의 결과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한 자루의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별빛이 주어지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이 주어지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이 주어지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이 주어진다.”라고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의 말이 내 심정을 울립니다. 우리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축복임을 아고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올 것입니다.
셋째, 삶의 위기 앞에서의 감사
예수님은 일상 속에서의 감사뿐 아니라, 위기 앞에서도 감사하셨습니다. 앞에서 본 마태복음 26장은 최후의 만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가장 위기를 앞둔 장면이었습니다. 이 만찬이 끝나면 자신이 체포당하고 십자가로 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제자들과 나누시고 있는 떡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부서져야 할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나누어 마시는 잔은 잠시 후 십자가에 흘려야 할 자신의 피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인생 최대 취후의 위기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직면한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절친이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물론 그분은 친구의 죽음이 친구의 부활 현장이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이 죽음의 무덤 앞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본문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그분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셨느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평탄한 순간만이 아닌 어떤 삶의 위기,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성경적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슬프고 아픈 상황, 위기의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다음의 바울의 고백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함께 일겠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확신 가운데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듯을 이루어 드릴 것을 믿으셨기에 십자가의 피의 잔도 감사로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친구의 죽음조차도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르치는 도구가 될 것을 믿으셨기에 감사할 수 있으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오늘은 보이지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 드러나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데살로니가전서 5:18)가 될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처럼 감사합시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처럼 감사하라고 한다면, 너무 거창한 제안일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끝없이 반복해서 죄를 짓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내가 어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마침내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혹시 교만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만 하고, 닮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의 대상이지 감사를 해야 하는 분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럼에도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감사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감사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사합시다. 또한 감사함으로 더 큰 은혜를 받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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