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①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면서 그 기준을 인류 성악가나 대중가요 가수들의 가창력에 두셨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여 찬송가를 폐기처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가창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아울러 아름답게 불러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할 때에 가창력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방과 후 공부로 "음치탈출"을 진행했었습니다. 당시 20명의 학생이 열심히 음치탈출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첫날 한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악기" 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운 목소리, 화려한 연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보다 가창력이 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찬송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외형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있으며, 바로 그 열정의 농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어떤 찬송을 해왔을까요? 혹시 겉모양은 그럴 듯한데 전심으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나 않은지요. 제가 처음 찬양 사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찬송하는지, 장송곡을 부르는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교회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잘못된 보수 신앙관입니다.
보수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칭 보수, 보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웬일인지 찬송하는 것만큼은 비 성경적으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찬송을 제법 찬송답게 하는 교회를 향하여 이단, 삼단 운운하던 시절이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입니다.
한 번은 제가 어느 지방 도시에 찬송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는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세를 자랑했고 보수적 이기로 소문난 교회였는데, 안내를 맡은 장로님의 입에서 계속해서 보수 타령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한 오르간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과연 오르간 연주소리가 성전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천여 명의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의 서두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붕어들입니까? 왜 입은 벌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하나님이 과연 이 오르간 소리를 듣자고 이 전에 임하셨겠습니까? 생명 없는 이따위 악기에게 여러분의 사명을 위임해 버렸습니까?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보수, 보수 강조했는데 과연 이 모습이 보수적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하는 보수는 똥물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얼굴들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진짜 똥물로 변해 갔습니다. 먼저의 그 장로님은 씩씩대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일까요? 천만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통쾌해 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보수를 가장한 불신앙이요, 중병을 앓고 있는 그들의 심령 상태를 저를 통해 지적하신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제가 건드렸으니 그들이 당황하고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찬양의 회복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심으로 찬송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교문화의 잔재입니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유교사상이 아직도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찬송행위, 즉 성경적인 찬송의 방법이 오히려 유치하고 경망스럽게 느껴져서 아무 쓸데없는 절제의 브레이크를 스스로 걸어왔던 것입니다.
거기다 음악적이 요인까지 겹쳐있습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찬송가는 서양 음계로 작곡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정서에 맞춰졌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세계화에 따라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적지 않게 이런 문화적 차이가 적용됩니다.
그리고 4부 합창을 위한 편곡 때문에 대부분의 멜로디 음이 너무 높습니다. 아마 한국사람 대다수는 멜로디 음 높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겠으나 장년들에게는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 때는 대부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게 됩니다. 이 문제는 찬양인도자나 반주자가 조금만 지혜를 가지면 해결 가능한 일인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회중 찬송을 할 때 음이 높은 곡은 그 음을 2-3도 정도만 낮춰서 반주 하면 장년층이 찬송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새벽기도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몇 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교회의 찬송이 침체되어 왔고 그것이 보수적인 신앙 행위로 미화되기까지 했으나 결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속히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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