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의 3대 함정(마 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2-6)
이 시간에 “실망의 3대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 자신에게나 혹은 타인에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믿고 기대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기대를 깰 때 실망하게 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커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실망에 직면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토록 예수를 메시야로 소개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죄를 책망하며 옥에까지 잡혀 들어갔는데 예수님은 웬일인지 기대대로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지 않으시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나. 기대가 컸기에 실망 또한 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질문했습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일생 빈들에서 연단 받은 기도의 사람이요, 성령의 지시를 받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크고,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난 그 능력의 사람, 그리고 의롭고 강하고 불도저(bulldozer) 같은 그 믿음,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겸손의 사람,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받아들이고자 했던 세례요한이 실망하다니 이해가 됩니까? 그러므로 이시간 실망할 수 없는 믿음의 거인이 실망에 빠진 실망의 함정이 어떤 것인지 살펴봄으로 어떤 일에도 믿음에 실족하지 않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웅도 무너뜨린 실망의 함정은 무엇일까요?
1. 잘못된 지식의 함정입니다.
세례요한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메시야관에 있어서는 당시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 사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고난의 메시야가 아니라 바로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오해하면 실망합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언제 며칟날 재림하신다고 했다가 불발되어 얼마나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까? 성령 충만하다고 언제나 진리가 바른 건 아닙니다. 교리사를 보면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도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견해 차이가 있었고 그 결과 그 문제가 큰 차이를 낳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본 것은 잘한 것이지만 각론에 있어서는 잘못 믿고 잘못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감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롬10:1-3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그 결과는 실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중세기에 교회가 타락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에서 떠나 개인의 공덕사상이 강조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죄에서 방황했습니까? 루터도 그런 갈등 가운데 방황하다가 하다가 마침내 로마서에서 이신득의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8:20-22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했습니다.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못한다면 기도할수록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이 없다면 왜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살펴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학1:5-6에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 일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자신을 살피고 진실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지식, 잘못된 소원, 잘못된 심령이 아니었는지 살펴서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용서와 사랑이 없어도 우리의 영적생활은 동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진실로 바른 믿음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2. 표적중심의 함정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에 대해 실망감이 찾아온 또 다른 이유는 투옥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보다 영적 체험과 관련된 내면적인 문제가 더 큰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한 동기가 바로 성령의 증거였듯, 이 성령의 표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은 당연한 추측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표적이 지속했다면 그는 결코 실족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1:32-33에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했는데 지금 이 확신이 지속되고 있었을까?
그가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태로부터 충만하시던 성령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영권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듣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그 앞에서 죄를 인정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을까요? 그런데 잡힌 후에도 그에게 예수가 메시야라는 이런 성령의 확신이 지속되고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표적이란 자꾸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 메시지이기 때문에 몇 차례 충분히 입증된 후에는 계속될 필요가 없고 이제는 그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꾸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메시야관 외에도 그의 표적관까지도 다분히 유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마16:1-4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했고, 고전1:22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알려주셨다면 이제는 그 말씀에 끝까지 서는 일만 남았습니다. 왜 그것이 와해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표적중심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흔들리는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표적중심을 악하고 음란하고 불신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적은 믿되 표적 중심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표적이 멈춘 상황에서 요한의 내면은 고독한 옥살이 못지 않게 고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실족했던 체험주의적 믿음의 문제점입니다. 특히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왔다는 점에서 그의 단점 역시 엘리야적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의 박해를 피해 다닐 때 왕상19:10을 보면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4절에도 동일한 말로 아뢰었습니다.
이때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대 승리를 거두던 능력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육신도 지쳤고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과 음성도 예전과 같지 않은 고독한 엘리야였습니다. 권력을 대항하여 우상과 싸우던 그 놀라운 믿음과 능력은 어디로 가고 고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반석에서 그의 잘못된 체험관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즉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 일어나고 맹렬한 불길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고, 그 상황이 지나간 후 잠잠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주셨듯, 우리에게 하나님의 어떤 미동도 체험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라도 성경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낙심치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파도 치는 바다라도 걸을 수 있는 말씀 의존적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개는 초신자일 때 하나님께서 표적적인 체험을 많이 주시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온전히 말씀에 서라고 그런 체험 거두어 가시고 끝없는 고독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을 봅니다. 즉 전에는 원했든 원치 않았든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체험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믿음으로 믿어서 누리는 체험입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이름만 불러도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지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는데 이런 체험을 잃은지 몇 년째라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게 정상입니다. 이제 광야에 오신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믿음 훈련 잘하면 믿음으로! 믿음으로! 승리했던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광야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 없고 귀에 들리는 것 없고 함께 하시는 체험이 없어도 오직 말씀 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대화하며 그 뜻대로 사는 경건을 연습하세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습니다로 나아가세요. 요단강이 앞에 있어도 믿음으로 전진하세요.
그리고 전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기쁜 얼굴로 우리를 찾으셨지만 이제는 우리가 기쁜 얼굴로 하나님을 대하는 경외하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이 대접과 경배가 온전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하심을 또 다시 그리고 전보다 더 확실히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않으려면 표적중심의 믿음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무지한 현실관의 함정도 있었습니다.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내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요한이 옥에 갇혀 있다 보니 새로 시작한 예수님의 메시야적 활동상황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을 알려주면 뭔가 느낄 만한 요한에게 메시야적 표적에 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것이요, 따라서 요한이 진정 이 말씀을 깊이 받아들인다면 그의 메시야관이 비록 유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충분히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절망도 자기 혼자라는 현실에 대한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롬11:3-5에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도 우리 현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현실을 섭리적 관점에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광야에서 연단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지금 이 세상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즉 훈련 상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12:5-6에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했습니다. 이걸 모르기에 실망합니다.
시 73편의 아삽도 실망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인들이 더 형통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 73편 2-3절에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영의 눈이 열려 악인들의 결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현실인식이 중요합니다. 알고 보면 다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형통케 하시고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전2:26에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신다고 한 대로 그들을 통해서 의인들을 복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몇 차례 거치면서 대부분 불신자들이 대기업을 이루었지만 그 모든 복을 결국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대기업 무너지거나 해외 이전해 봐요. 국가가 어려워지고 결국 우리가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악인들을 통해서 의인들을 훈련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대적하고 이교와 이단들이 창궐하고 이건 다 우리를 경책하시는 사랑의 채찍입니다. 악인들의 핍박이 심하고 이단들이 많다고 하나님 안 계신다고 느낀다면 육신의 눈으로 보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참 아들로 대우하셔서 징계로서 연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진실로 깨닫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하는 것보다 신에 대한 불신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용기 백배 하세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도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흘 만에 사셨습니다. 말씀 떠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하고서도 실망된다면 내 뜻대로 하려 했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육신의 눈으로 보았거나, 말씀에 서지 못했거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복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진실로 진리의 말씀에 서서 담대한 믿음으로 실망하지 말고 더욱 힘차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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