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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출 15:22-26)

예림의집 2018. 4. 19. 16:55

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출 15:22-26)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시간 “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밖에 나갈 때 간혹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차가 한 시간 동안 소비하는 산소가 큰 나무 한 그루가 1년 동안 생산한 산소라던데 이러다 이 땅에 산소가 과연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인지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염려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여러 면에서 심각한 공해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어떤 독극물도 해독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내셨습니다. 환경오염으로 부쩍 늘어난 독초도 알고 보니까 중병도 고치는 해독초였고, 도토리에 아콘산이라는 성분이 있어 도토리 1kg이 중금속으로 오염된 폐수 3.5톤을 정화할 수 있고, 강이나 바다가 오염될 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녹조류 남조류도 알고 보면 수중 환경을 개선시키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손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물은 있는데 독물이라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셔서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그 물이 달게 되어 온 백성이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가 물을 해독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런 것 외에도 우리 영혼을 죽이려는 보이지 않는 독물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쓴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죄악의 쓴물이 있습니다.

겔18:20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했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죄악의 독입니다. 죄에는 사망의 독이 가득합니다. 죄처럼 무서운 독이 없습니다. 혹시 독약을 먹고 살아난 일은 있어도 범죄하고 그 심령이 죽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아담에게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범죄했으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죄도 독이지만 거기에 율법이 나타나면 그 독은 즉효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고전15:56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지만 율법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을 당합니다.

이 죄의 쓴물은 어떤 수양과 도덕과 선행과 고행과 어떤 종교로도 달게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구원관은 ‘일체개고’라 하여 모든 존재 자체가 다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존재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도 감정도 슬픔도 기쁨도 축복도 행복도 없는 완전히 내가 없어지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解脫(해탈) 혹은 涅槃(열반)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여기에 도달한 사람이 얼마나 되며, 도달했다해도 이것이 구원과 영생이 아니고, 인간 답게 사는 것도 행복도 아닐 뿐 아니라, 이 무아지경이야 말로 귀신과 접선되는 위험한 것입니다.

이 죄악의 쓴물은 그 무엇도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십자가 공로로만이 해결됩니다. 주님이 내 죄를 담당하셨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내 죄악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용서 받고 또 이긴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과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 충만 받을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힐 만큼 더욱 해방을 누립니다. 어떤 죄악의 쓴물도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2.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있습니다.

마5:2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그랬습니다. 마음의 분노도 죄라는 말입니다. 살인의 죄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독약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존 헌튼은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그를 비평하고 비난하자 그만 분을 참지 못하고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죽고 말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개를 묶어놓고 개를 4시간 동안 때리며 괴롭혔습니다. 개가 바짝 독이 올랐을 때 그 개의 피를 뽑아 조사해 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무려 80마리의 개를 죽일 치사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독이 더 나옴을 발견했습니다.

미움은 우리 영혼에도 피해를 줍니다. 그래서 요일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내가 용서 못하고 내가 사랑 못하면 내 심령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롬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했습니다. 내가 양보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100번 잘한 것입니다. 나를 억만 죄악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남을 용납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3.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있습니다.

잠7:22에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과 뼈를 마르게 하는 것이 근심 걱정 불안 공포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라고 하는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첫째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둘째는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요, 셋째는 자기 약점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이요, 넷째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두려움이요, 다섯째는 상상에서 오는 두려움이요, 여섯째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요. 일곱째는 홀로 있음으로 오는 두려움이라 했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더 많은 두려움이 존재할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미군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공포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두려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요일4:18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먼저 두려움은 형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맨 먼저 생긴 마음이 두려운 마음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아직까지 형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떨쳐버리지 못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히2:14-15에 예수님께서 죽음의 공포까지도 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공포의 쓴물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4. 좌절과 절망의 쓴물이 있습니다.

습3:16에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좌절과 절망으로 팔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안 된다. 못한다. 희망이 없다. 죽겠다. 이런 생각처럼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절망의 환경 가운데서도 생각을 잘했습니다.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실명했으며, 악성(樂聖) 베에토벤은 청력을 잃었고, 미생물학의 혁명가 파스퇴르는 중풍에 걸렸고, 헬렌 켈러는 귀머거리에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희망의 신학자인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2차대전 독일군으로 징집되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영국에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가족들도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이 준 성경을 읽다가 죽으셨으나 다시 사신 예수 이야기를 읽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몰트만의 마음은 그 어둡고 캄캄한 절망이 사라지고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희망이 온다고 희망의 신학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5. 미혹과 이단의 쓴물도 있습니다.

히11:15-16에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했습니다. 딤후1:14에는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 예수를 만나면 가짜 예수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우리를 시험 들게 하는 죄악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 쓴물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고 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라에서 쓴물을 달게 한 그 나무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욱 예수 잘 믿고 더욱 하나님 잘 경외함으로 은혜를 받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우리에게 항상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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