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사역 나눔터

찬양인도자가 되려면①

예림의집 2017. 8. 29. 20:22

찬양인도자가 되려면①


김진호 목사 


이제 예배 세미나가 하프 라인을 넘어 골대를 향해 전진하게 되었다. 기본적인 예배에 대한 것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공부가 되었다. 이제는 찬양에 대해 조금씩 실제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말씀을 나누기 바란다. 그래서 오늘은 찬양인도자가 되려면 이 부분을 나누고자 한다. 지금 개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음악활동을 통해서 찬양을 인도하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시오. 앞으로 내가 주님의 기름부으심 속에서 그러한 사역을 하기 원하는 사람, 주님께서 은사도 주었고, 은사 이전에 달란트(재능)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의해서 은사도 주실것으로 믿고 내가 그렇게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시오. 

네, 그러면 모두가 찬양 인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더 깊이있는 찬양인도자가 되기 원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누가 정확히 가르쳐 줄 능이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기준을 설정해 주고 있는가를 보면 아마 성령님께서 오셔서 각자 본문을 통해서 더 깊게 계시해 주시는 은사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찬양 인도자가 되려면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찬양 인도자라고 했을때 찬양은 PRAISE, 보통 한국에서는 찬양 인도자와 예배 인도자를 따로 보지 않습니까 ? 그런데 우리가 훈련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찬양 인도자라는 개념속에 예배 인도자까지 다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예배 인도자가 되려면" 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하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찬양 인도자"라고 명명하면서 찬양과 예배 그 부분까지 연결 시켜서 보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예배에 대해 공부하면서 "예배가 삶이 되고 삶 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예배의 성서적인 독특성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삶,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가 주님 앞에 예배적인 관계성을 성립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수 없늣모째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찬양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번째 사울과 같은 인격이 우리 가운데 있어선 않되겠다는 말입니다. 


왜 여기 사울이 나오느냐 하면, 16장에 사울과 대칭되는 인물로 다윗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6장 1-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길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옴독릿 스스로 성결케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여기 사울에 대해서 특별하게 그가 어떻다고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기 1-5절까지를 핵심적으로 놓고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때 사울의 전체적인 삶을 이해하고 있는 사 람들로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에 대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인격 중에서 반예배적인,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한 인격. 여기에서 단지 나타나 있는 것은 새로운 왕을 위해 기름 부으러 갈 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라고 하는 그런 것.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거기서 부터 떠났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그 실제 정권, 왕의 권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왕권에 대해서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주장하는 관계성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기 전에 수 많은 그의 삶의 모습을 놓고 볼 때 그 이후의 삶의 모습을 놓고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지극히 그는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인도자에게 있어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패턴이 굳어져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앞에 순간순간 나가서 깨뜨리지 않고서는 찬 양인도자로서 민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의 처소로 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 나 중심적인 생각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자 하는 길을 알 수가 있고 또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사울과 같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찬양 인도자로서 심각하게 체크해야 할 부분인것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 교만은 사단의 배설물이지요. 사단이 원래 사단이 된 것. 그 자체 가 바로 하나님 보좌위에 자기를 높이리라고 하는 "내가..... 하리라" 빌리 그래함은 그의 천사론에서 "The Satan of I will." 하는 것은 사탄이라고, 그것도 자기 중심적인 부분이다 라고 하는것이죠. 교만과 자기 중심은 함께 비례적인 관계속에서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너무 잘 알기때문에 강조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 앞에 순간순간 나가서 내가 주님보다 먼저 나가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걷X 대해서 철저하게 당신의 빛 앞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자세, 그것은 하나님의 겸손을 우리내면에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해 나가는 모습인 줄 압니다. 


그래서 첫번째 조건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것은 사울과 같지 않은 인격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심을 알아야합니다. 16:6-9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실 이렇게 말한 그 이유는 뭡니까? 사울이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죠. 키가 크고 늘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표현했습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이 말씀은 사람은 무엇을 보는데 빠르다고 하는것입니까? 외모를 보는데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외모를 먼저 보지 않습니까? "아 저기 있는 사람 멋있다." 그런데 사실 겉모습이 멋있는것, 그것에 매혹되어선 않되고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는가" 거기에 매혹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관심은 사람의 외모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에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시각도 주님의 시각을 가져야 할 뿐더러, 우리의 내면세계를 주 께서 그렇게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전도단에서 D.T.S 6개월동안 훈련하는데 6개월 가운데 3개월 강의 코스에서 가장 크게 강조하는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면화되지 않고서 아무리 전도 잘 할 수있는 기술적인것을 많이 가르쳐 준다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 않는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가장 우선권을 두고 지칭하는 촛점이 어디에 있냐 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라고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내 마음의 중심의 아름다움에 있다는것을 알고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쫑아갈 수 있는 준비자세가 되어있어야 겠습니다. 마음들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데 이 마음 저 마음 속에서 갈등 하는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을 내 마음속에 확인하면서 그 심장따라 잡으려고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것을 향하여 쫑아가노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앞에서 그 분이 보여주신 그 분의 심장은 이해하면서 그것을 내 가운데 인식시키면서 날마다 그의 심장이 약동될 수 있도록 그 분의 마음을 쫓는 < 사람, 하나님의 심장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찬양 인도자로서의 근본을 세워가는 사람인것입니다. 


그 다음에 근본적 조건을 다음과 같이 16절 이하에서 보겠습니다. 

첫번째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분부한 그 사명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그의 음성을 철저하게 들으면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예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의 음성을 청중하는 사람인 것을 압니다. 맨 처음에 사무엘이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을 때도 그 분의 음성을 듣는데서 부터 우리가 부름을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찬양인도자로 부름을 받을 때는 그 음성을 듣는 그 부분, 그 훈련, 그 열린마음에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찬양인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사무엘의 부분보다는 다윗이 갖고 있던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끝까지 철저하게 완수할 수 있었던, 완수하려고 하는 그 근본적 성품이 그 안에 내재화되어있던 사람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 이렇게 봅니다. 작은 일에 신실하는 그러한 삶의 모습이 생활속에서 체질화 되어있지 않았나 전 이렇게 봅니다. 작은일에 신실픽살 때문에 어떤일이 그에게 맡겨질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는 여기 맥락에서는 집에서 양을 치는 그 일, 자기에게 맡겨진 그 책임의 분량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그러한 자세가 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여기 어떻게 기록되어, 어떤 상황속에서 아직 그가 집에 없었고 나머지 형들은 다 집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형들은 일찍 대충하고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가 질때까지 한 양이라도 맹수에게 잡혀서 먹히지 않도록 끝까지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지 않았나 우리가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엘리프렁의 사랑의 기술 읽어보셨죠 ? 거기 사랑의 조건중의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랑, 그 능력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이 바로 책임감이 있는 사랑입니다. 

자,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삼 사백마리 있는데 그 삼 사백마리를 맹수의 이리 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우리에서 나올때 부터 들어갈 때까지 양들은 그 보호를 받아야 되는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성 속에서 목자가 목자로서의 책임을 다 했을때 그목자는 양을 향하여 사랑을 다 줄 수 있는 목자라고 우리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것입니다.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찬양인도자는 하나님의 양, 우리는 다 하나님의 양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몸 가운데 나도 양이지만 주께서 하나의 기능으로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도록 몸속에 세워주시고, 하나님의 양을 하나님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의 역사속으로 몰고가는 사역이 바로 찬양인도자 입니다. 그럴때에 찬양인도자는 찬양드리러 온 사람들의 바똑, 요구가 무엇인가,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하는것에 대해 하나님의 가르치심 그것을 지식의 은사라고도 볼 수 있겠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통해서 알고 그 부분을 풀어주면서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으로 인도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자와 같은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 분들의 삶이고 나의 삶인데, 나는 그냥 테크니컬하게 찬양을 멋지게 인도하며 이들의 마음을 높이 공중에 띄웠다가 뭔가 좀 흥분되고 감정적으로 억눌러진 것들이 풀어지고 하는 것만 함으로써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인본주의적인 찬양인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왔고 주께 참으로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 나에게 보여주시옵소서. 이 가운데 어떤 심령으로 와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래서 찬양을 인도할 때에 곡을 쭉 기도하며 뽑아왔지만 주께서 다른 부분에 말씀하시면 그 부분으로 찬양을 인도해 나갈 수 있는 성령의 민감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럴때에 몸 속에서 풀어지는 역사가 있고, 치유되는 역사가 있고, 온전케되는 역사가 있다라고, 그것이 바로 목자가 하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기능이라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 12-13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들에서 돌아온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이는 그 이후로 더 큰 찬양의 역사를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우리가 보겠지만 사울이 악신이 들려있을 때에 그가 수금을 취하여서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 떠났다고 하는것, 그렇게 칠 수 있는것, 귀신이 붙었다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름부음이 그 위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에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는 수금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의 역사가 흘러나갔다고 하는것, 그래서 그의 영혼을 스며들기 시작했고 사울의 영혼가운데 어두워져 있는 귀신이 들려 있는 그 부분에서 부터 자유케되는 은혜가 있었던것을 우리는 이 16장 23절 부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 찬양인도자에게 중요한것은 찬양 인도하기 이전에 주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이전에 성막을 배운 것처럼 나 개인 예배를 통해서 감사하고 또 단에 나아가서 십자가 안에서 처리된것을 다시 확증하면서 물두멍에서 오늘이라고 하는 구원, 다시 말해서 성화의 과정 주의 보픽태 공로에 의지하고 나 자신을 씻어나가는 그러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성소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강화시키면서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주님을 깊게 만나고 예배하면서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가꾸고 나와서 성령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모습으로서, 찬양을 인도할 때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찬양의 역사가 놀랍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방을 통과하지 않고 찬양인도하는 단에서는것, 사람들 앞에 서는것은 조금 우리가 삼가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 


혹시 시간이 않되어서 그럴 경우에는 계속해서 내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주께서 보혈로 덮어 주시고 새롭게 나 자신을 강건케 하셔서 믿음으로 "주님 내가 섭니다"라고 했을때에 하나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시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혹시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가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그러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어서 오는 찬양은 엉망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 셜담 계속해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그 대전제를 놓고 볼때는 그런 면에서 너무 우리 자신을 참소하고 또 규격에 맞추어서 찬양인도자의 준비를 너무 그렇게 하는것도 올바르지 못한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연주를 잘 해야 한다. 물론이죠. 14절부터 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화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탯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 이왕이면 잘 탈 줄 아는 사람. 좋은것이 좋지 않습니까 ? 수금을 잘 타기 때문에 귀신이 떠난다, 악신이 떠난다.


그것은 아니죠. 그것은 찬양인도자가 찬양의 역사를 더 깊이있게, 폭 넓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더 훈련함으로 말미암아 준비해야 할 부분으로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름 부음은 없는데 연주만 잘한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음악적으로 찬양이 "잘 조화를 이뤄" 주님앞에 올리워 진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실 그것은 하늘을 뚫을 수 없고 천장을 뚫을 수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찬양은 천장을 뚫고 하늘 보좌를 치게 되는것입니다. 

하늘 보좌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데려다가, 악사를 데려다가 주의 찬양을 위한 곡을 맡겼다고 할 지라도 그들에게 궐수 부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간만 미학적인 면에서 아름답게 가꿀 뿐이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 시킬 수 있는것은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우선권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아시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프라이버러티를 두시고 연주는 더 나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라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인식인 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