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정치 신학적 맥락에서 본 루터의 십자가 신학

예림의집 2017. 2. 27. 18:10

정치 신학적 맥락에서 본 루터의 십자가 신학


루터가 ‘십자가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고뇌와 죽음에 대한 공포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이성의 작용으로는 결코 하나님께서 제시한 율법의 의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께 향하는 모든 상승지향적인 노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오히려 인간의 삶 속에는 불가해한 하나님의 징계와 유혹을 통한 고난들이 있을 뿐이다. 루터는 이것을 인간들이 처해있는 고난의 실존으로 이해했다. 루터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 고난의 실존을 넘어서서 인간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이 처해있는 고난의 실존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는 징계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의 행동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었다. 고난은 회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그리스도인 삶 자체이다. 고난을 떠난 기독인의 삶은 존재할 수 없으며 고난 자체를 모르는 것이야말로 악이다.1) 왜냐하면 기독인의 실존은 십자가를 통해서 규명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이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 형벌만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행위는 십자가 안에서 모인 인간 공동체의 삶을 또는 한 기독인의 삶을 장악한다. 루터는 ‘십자가 아래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인 연합을 이야기한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철저하게 이니셔티브를 통해 규정당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인간이 그것을 수납하는 결단을 요구하며, 나아가 인간의 실존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 없다.

정치신학이 다루는 중요한 테마도 ‘고난’이다. 이 고난은 내면적인 고난을 넘어서 세상내에 있는 고난을 포함한다. 세상의 고난의 문제에 대한 기독인들의 책임 있는 응답으로서 ‘정치신학’은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정치신학은 교회를 사회의 제 분야 속에 있는 부정의와 불평등 부조리의 문제들에 대해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행위를 하도록 각성시킨다. 정치신학은 교회가 세상 속의 고난의 현장 속에 뛰어 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고난은 세상의 고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정치신학에 깊은 영감을 제공했다 할 수 있다. 저항적 무신론의 강도 높은 비난의 요지는 이 세상의 고난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불의를 당하는 때 사람은 전능하시고 철저히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존재란 교리를 믿기 어렵다.”2) 그러나 루터가 해석한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밖에 서 있는 방관자가 아니다. 그 하나님은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로 고통을 당하는 주체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역동적인 행위 고통의 실존 속으로 뛰어드는 참여의 행위는 정치신학의 실천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고통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적으로 해석하여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개념을 전개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즉 그리스도는 자기부정, 즉 자신을 스스로 제약하는 무한하신 아가페로서, 인간을 살리기 위한 자기를 낮추는 자기포기의 사랑을 통해서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성자)은 자기부정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참 하나님이 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절규는 곧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절규였다. 그리고 이 통렬한 자기부정의 자리에서만이 하나님의 새 역사(부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몸부림치며 더 높게 더 넓게 더 많이 소유하려는 업적주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 속에 있는 십자가의 자리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논문에서 제기했던 문제는, 몰트만이 말했듯이 현대의 기독교회뿐만 아니라 지금의 한국교회가 “동일성-참여의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회가 전통적 교리, 예배의식, 그리고 도덕적 표상하의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현실과 무관하게 사회문제를 외면하게 되며, 반면에 현재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 고유의 기독교적 동일성(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고통의 소리를 말하고 있다. 교회 밖에서는 사회를 향한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목소리가 거세게 들려오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는 교인의 숫적 증가와 외적건물의 대형화에만 정신이 쏠리지 않았는가 하는 자성의 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1960년 이후 한국교회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황금만능사상의 영향을 받아 어느새 물질적 축복 관에 오염되어 버렸으며, 진정한 신앙인의 경건한 삶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고 말았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마치 중세기의 어두웠던 시대의 한 단면을 보는듯하여 가슴이 저리다. 이러한 오늘의 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 한국교회의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한국교회의 근원적인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문제이지 않겠는가? 올바른 신앙과 신학은 어느 시대나 구원의 밝은 빛을 비추었다. 초대교회의 때 바울신학이 그러하였으며, 중세의 어두운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그러하였으며, 오늘의 물질문명의 시대에 십자가 신학이 그러할 것이다. 21세기를 턱 앞에 둔 한국교회의 상황이 역시 신앙의 위기시대요, 신학의 위기시대라 할 만하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의 개혁을 통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여 한국교회는 개혁자들의 십자가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워진 시대에 한국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켜 가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의 사랑의 산 증거만을 교회에 요구하고 있음을 속히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롭고 청빈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희생적으로 섬기는 교회와 기독교인들 이 시대는 요구한다.

따라서 본인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 먼저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살펴보았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이라는 허울 속에 가려진 십자가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신학이었다. 그의 신학은 신학적 진술의 가장 중심에 십자가를 위치시킨 십자가 중심의 신학인 것이다. 루터는 중세기의 유명론과 신비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나 그의 신학의 뼈대는 이런 것들과 분리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루터가 발견하고 발전시켰던 십자가의 신학은 오직 성서에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신학이었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당시의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신학을 심판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를 바라 본 신학이다. 이러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 중심사상은 위기를 맞이한 오늘의 한국교회에게 중대한 빛을 던져 주었다고 할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계시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결국 믿음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다. 이 십자가의 구원의 길은 인간에게 낯선 길이었다. 하나님은 이 낯선 길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인간은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중세 신비주의 명상적 십자가 이해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십자가의 은총은 명상에서가 아닌 짊어짐 속에서 온다. 십자가를 짊어짐은 비천과 모욕과 시험과 무릎을 꿇는 삶을 의미한다. 이 삶이야말로 축복된 삶이고 천국을 현실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보장된 삶인 것이다.

한편 정치신학자인 몰트만도 이 문제 해결을 신학적인 과제로 삼고 그것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가 달리시고 부활한 이 십자가만이 오늘의 교회의 정체성위기를 이겨내고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한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철저히 삼위일체론 적으로 해석하여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그의 신학이 십자가 신학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다. 몰트만이 그의 십자가의 신학으로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신학적인 해결의 빛을 던졌듯이 한국교회도 그 빛의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신정론의 문제, “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이 같은 고난과 고통을 허용하시는가?”에 몰트만은 대답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고통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고통 안에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사랑을 말한다.

십자가 신학은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하는 데 머무르려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 신학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그 자신이 직접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고난을 받는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루터처럼 고난의 긍정적 가치를 극대화한 신학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십자가의 신학과 신앙으로 거듭나서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끊임없는 개혁의 삶을 유지하려고 힘쓸 때에, 비로소 한국교회의 전도가 밝아질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