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로 성경을 읽자
손종국(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기독교교육학 박사)
고등학교 시절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전도하기와 함께 성경읽기였습니다.고3 시절 독서실에서 입시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짬짬이 쉬는 시간에는 옆에 놓인 성경을 읽으면서 머리 뿐만 아니라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개인의 삶은 물론 교회와 인류의 역사까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렘 23:29) 같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히 4:12) 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면 그 누구도 저항하거나 도망 할 수 없습니다. 단지 내면세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죽고 다시 사는 철저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이 놀라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세계와 관점의 틀에 갇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번영의 복음”을 성경의 핵심 가르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보다 물질과 성공을 더 추구합니다. 건전한 원리에 따라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주 그리고 많이 읽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도 교인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기만 하지 성경 읽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읽습니다.
자기중심적 읽기란 자신의 유익이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주로 복을 약속하는 구절, 위로가 되는 구절, 자신의 문제에 답이 될 만한 구절에 밑줄을 긋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삶에 관한 지침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분명한 뜻과 생각이 있어서 인간 저자들을 불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는 구절에 주목하거나 자신의 삶을 위한 지침을 찾기보다 하나님이 본문에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합니다.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이것은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일관된 요청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렘 22:29). 예수님도 천국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13:3-9; 막 4:3-9; 눅 8:5-8).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들으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전한 성경읽기의 원리들을 배우고 그 원리들에 따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1)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읽고, (2) 성경 저자의 의도에 맞게 읽고, (3)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고, (4) 문맥 안에서 읽고, (5) 문자적으로 읽고, (6) 역사적∙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읽고, (7) 성경으로 성경을 읽어야(해석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읽기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성경을 내러티브(narrative)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이것을 설화(說話)라고 번역을 하는데 마치 성경을 신화나 허구로 느끼게 해서 저는 그냥 내러티브라고 부릅니다.
성경적 내러티브의 특성은 한 문장 안에 객관적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형식입니다. 내러티브는 표면적이고 일차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외에,그 내용에 담겨진 내면적이고 이차적인 이야기를 주목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도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소유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에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믿음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로 풀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러티브는 ‘이야기 틀’을 가진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 틀이 란 무엇일까요?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여 소설이 갖는 특성을 지닌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소설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는데.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고,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상황이 있고,인물과 그리고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성경도 이 네 가지 요소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이 네 가지 구성 요소를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스토리, 그리고 그 이야기가 그려내는 배경, 그 안에서 그려지는 인물들,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마음과 성경을 기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새롭게 읽어집니다. 그 중에 어느 것도 소홀히 한다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경을 깊이 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요?
(1) 반복하여 읽기
성경은 해석하기보다는 읽어야 하고 보아야 하는 책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아이들이 동화책을 보면서 책 속에 빠져들듯이 성경 속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성경은 동화책처럼 일차원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한 번에 그 내용을 자세하게 깨닫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오래 연구한 사람도 처음 대하는 본문을 한 번 읽고 그 내용과 의미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같은 본문을 생각하면서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자세하고 주의 깊게 본문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이해될 때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석을 먼저 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 본문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그림 그리며 읽기
어느 사진작가는 매일 감나무가 있는 곳에 와서 감을 쳐다보기를 일주일이나 계속하고 나서 자기 마음에 온전한 영상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감 하나를 작품화하기 위하여 그처럼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마음에 그렸다는 점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읽어야 하고,들어야 하며,그림을 그려야 한다. 본문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그림으로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한다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천천히 자세히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본문의 내용을 머리에 그리면서 읽어야 합니다.
3) 다른 번역 성경과 대조하며 읽기
성경이 본래 기록된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우리의 어순과는 정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서양 언어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어순과 거의 비슷하므로 성경 원문과 가까운 번역본과 대조해서 읽는다면 성경을 훨씬 쉽고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 성경 두 가지만 대조해서 읽어도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4) 대화하며 읽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편에게서 잘 듣는 것입니다. 더 잘 듣기 위해서는 때로는 질문을 던지기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하고 성경으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곳에서는 우리도 침묵하며,그리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때로 내용이 생략되거나,함축적이거나 상상하도록 되어서 이해하기가 힘들 때는 왜 이처럼 표현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경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심과는 다릅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읽어야 한다. 그러면 많은 부분에 대해 묻고 싶어집니다.
5) 묵상으로 읽기
일반적으로 묵상은 눈을 감고 그 내용을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묵상은 침묵이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침묵 기도나 묵상을 모릅니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가보면 침묵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침묵이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다’의 뜻인 헬라어 ‘meletan’ 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어떤 것을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리다’의 뜻인 히브리어 ‘하가’(hagah)에서 왔습니다.
히브리어로 묵상은 바로 이 ‘하가’입니다. 이사야 31장 4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라고 했는데 여기서 사자가 ‘으르렁거림’이 바로 하가입니다. 하가(묵상)는 사자가 먹을 것을 얻어 으르렁거리며 먹다가 배가 부르면 감추어 두고,다음 날 또 그 먹이를 꺼내어 으르렁거리며 먹는다는 데서 나온 단어입니다.
시편 1편 2절에 나오는 ‘묵상하다’ 의 단어도 하가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묵상은 말씀을 놓고 자주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에 읽은 성경을 하루 종일 작은 소리를 내며 읊조리며 지내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소화될 때까지 담고 암송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하고,그분과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야기로 쓰여진 성경을 섬세하게 느끼며 읽을 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성경읽는 일을 가르쳐야 합니다. 내러티브로 읽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다음의 책들이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길성남,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성서유니온.
이연길, “내러티브로 성경읽기”, 쿰람출판사
김동문, “오감으로 성경읽기”, 포이에마
고든 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 공저, 오광만 역,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내러티브란
내러티브란 용어는 라틴어 ‘narratus’ (narrative)라는 말에서 나왔다. 라틴어 ‘narratus’ 는 단순하게 ‘말하다’ (to tell) 또는 ‘무엇에 대하여 설명하다’ (to describe)의 뜻이다. 내레이터(narrator)란 단어가 ‘narratus’ 에서 나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란 용어를 우리나라 문학에서는 서사(敍事)라고 한다.
《동아 새국어사전》에서는 서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사란 사실이나 사건 따위를 있는 그대로 적는 일.” 그리고 서사체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문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내러티브 방법은 일반문학에서 말하는 내러티브에 대한 정의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적당하지 않다.
성경 내러티브도 넓은 의미에서는 서사문학에 속하겠지만 성경 내러티브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이야기 틀 또는 이야기 형태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서사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하는 기술방법이라고 했는데,성경의 내러티브는 그처럼 단순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헬라적 내러티브와 히브리적 내러티브로 나눈다. 헬라적 방법은 정의를 내리는(define) 데 더 강조점을 두고 있고,히브리적 내러티브는 묘사와 서술(description)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헬라적 내러티브는 수사학과 같이 어떤 진리를 논리 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함으로 타인을 설득하려는 방법이다.
그러나 히브리적 내러티브는 진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이나 사건 따위를 있는 그대로 적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처럼 흐르는 이야기 속에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묻어둔 문장이 내러티브 문장이다.
성경적 내러티브(Biblical nanative)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한 문장 안에 객관적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형식이다. 내러티브는 표면적이고 일차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외에,그에 함의된 내면적이고 이차적인 이야기를 주목하게 한다.
삶 자체가 이야기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도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믿음이란 소유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에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믿음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로 풀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야기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서 4장은 믿음에 대하여 가장 많은 지면을 사용하여 설명해 놓은 곳이다. 그곳에서도 믿음을 풀어내기 위하여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여 그의 생애 가운데서 중요한 사건을 이야기로 들려줄 뿐이다.
이와 같이 내러티브 문장은 사건의 내용을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독자들을 본문 안으로 초청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초청한다.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리나 논리처럼 풀어내고 정의를 내리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법이다. 교리나 논리로 어떤 사건이나 개념을 설명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에 머물고 마는 것이지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의실에서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인물전을 읽거나들으면서 결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야기식(내러티브)을 선택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내러티브로 쓰여진 문장을 교리나 서술적 언어로 읽음으로 일어 난 오류들을 예로 들어보자.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중생,즉 거듭남이라고 생각한다. 중생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 내용의 이야기로 돌아가야한다. 먼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어보자. 그리고 그 내용의 흐름을 이해해 보자.
이 대화에서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다. 니고데모는 자신을 하나님 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부인한다. “거듭나지 아니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심으로 니고데모를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도 희미하게나마 거듭남을 어디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사실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태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이라고 말씀하시고,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느냐고 묻는 그에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겠고, 그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요 3:5,13-45).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거듭난 삶을 살자고 말한다. 그러나 거
듭난 삶이란 너무 막연한 말이고, 거듭남을 너무 개념적으로 이해한 것이기도 하다. 그처럼 막연한 거듭난 삶은 없다. 단지 믿음으로 하 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있을 뿐 이다. 거듭난 삶은 이 땅에서 매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내러티브라는 독특한 문학형식으로 쓰여진 성경책을 서술적 문장으로 읽거나 아니면 단편적인 단어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도 잘못 이해하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었던 이유는 성경을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방법이 아닌 일반적인 책 또는 헬라적 내러티브로 읽었기 때문이 라고 말할 수 있다.
2) 내러티브의 구성 요소
내러티브는 ‘이야기 틀’을 가진 문장이다. 그렇다면 이야기 틀이 란 무엇인가?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여 소설이 갖는 특성을 지닌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소설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고,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상황이 있고,인물과 그리고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소설가가 있다. 성경도 이 네 가지 요소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이 네 가지 구성 요소를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그 중에 어느 것도 소홀히 한다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 사건의 내용
모든 종류의 이야기에는 일련의 사건이 진행된 행위들이 있다. 즉 이것은 이야기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내용 없이는 이야기가 존재할 수 없다. 이야기의 내용이 있고야 등장인물이나 배경이 있고 문학적 서술기법이 있고 해석이 있는 것이지,이야기의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고,다음이 이야기의 전개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이고,어떻게 전개하고 있고,또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성경을 읽을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살피면서 읽는 일이다. 이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이다.
픽션(fiction)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낸 것으로서 일반적인 소설문학을 지칭하는 말인 반면,성경 내러티브는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근거한 글이다. 저자들이 자기들의 상상이나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회람된 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읽혀진 내용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성경으로 존립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읽거나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 성경에서 이야기의 내용들은 스토리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시로 되어 있기도 하고,서신의 형태로 구성되기도 한다. 물론 시와 서신에도 그 안에 스토리가 있다. 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필요한 것만을 찾아서 읽는 습관이 있을 뿐더러,성경을 해석부터 하려는 습관이 있어 본문의 내용을 자세하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된 문서이므로 기록되어 있는 문장 안에는 쓸데 없이 사용된 단어나 표현이 하나도 없다고 보 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성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누가복음 19장 1-10절에는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본문의 전체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어떤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어도 하나님께서 저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문학적 소양을 사용하셔서 기록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9장 1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모습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삭개오가 늦게야 예수님을 만나보겠다고 뛰쳐나와 그 일행을 앞질러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드디어 나무 아래 오신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올려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결론 부분으로 삭개오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한다.
이런 정도의 읽기로는 본문의 내용을 충분히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야 하고 또한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본문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해야한다.
시편 1편에서 중요한 주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시냇가에 심겨 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시편 1편을 읽으면서 3절을 좋아하고 암송하기도 한다. 반면 2절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진 것은 확실히 축복이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고 해서 무조건 형통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아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일지라도 반드시 자기 스스로 물을 먹어야 한다. 그 물을 마시는 방법을 표현한 곳이 바로 2절이다. 그러므로 2절 을 지키지 않는다면 시냇가에 심겨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는 구절이 4절과 5절이다. 이처럼 성경은 어느 구절이나 내용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좋은 것만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리면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방 법을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 인물
이야기 안에 줄거리가 있다면 그 사건(행위)들을 일으키고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반드시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인물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어야 문장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을 보는 사람이 연극의 줄거리만 생각할 수는 없다. 관객들은 내용 전개를 따라가면서도 인물의 동작,언어,표정,감정 등을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인물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이 있 는가? 소설의 맛은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과 대화에 있다.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도 거기에 나오는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 그리고 행동이나 대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소개한 삭개오 이야기에는 예수님과 삭개오란 인물이 나온다. 삭개오란 인물은 성경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도 누가복음의 저자는 삭개오에 대하여는 ‘세관장’ 이고 부자이며 키가 작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언급이 없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을 뿐이지 인물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인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이야기 전개 속에 묻어두었을 뿐이다. 성경은 인물의 감정에 대하여도 거의 표현하지 않 는다. 그러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지 그들의 행동이나 언어를 살펴보면,그 안에 그들의 감정이 다 표현되어 있다.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시려 하는 예수님을 보자. 그때의 감정이 어떠하셨는지? 주님의 감정에 대한 표현은 전혀 없다. 그러나 ‘들어가 지나가시려 한다’ 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의 흐름이 들어 있다. 이런 표현에는 여리고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의미도 되고,예수님도 여리고에서 만나고 싶으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외롭게 여리고를 그냥 지나가신다.
그러나 누가복음 전체 맥락에서 보면,여리고를 지나시는 기간은 예수님 생애 마지막으로 그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때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길이다. 그것도 갈릴리에서 2일 내지 3일에 걸려서 여리고에 도착하셨고,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걸어가셔야 한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삭개오의 경우도 저자는 그의 감정을 전혀 노출 시키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2-4).
그러나 삭개오의 행동을 보라. 그는 늦게서야 바삐 서둘러 나온 것처럼 보인다. 왜 늦게 나와야 했을까? 그리고 세리장이란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해야 했던 것을 보면,무슨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행동 속에는 그의 느낌이나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사건 속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이 간접적이라면 그들의 대화 내용은 직접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삭개오 이야기의 중요성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시는 말씀부터 그의 집에서 주고 받은 인물들의 대화가 이 내러티브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인물의 행동,대화 그리고 감정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게 된다.).
성경은 어떤 인물이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하면서 사울이 나쁘고 다윗이 옳다고 말한 곳은 한 곳도 없다. 단지 다윗의 생활과 사울 왕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줄 뿐이다. 성경은 어떤 인간을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상대적으로 좀 좋거나 나쁘다고 표현할 뿐이다. 다윗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사울에 비하여 좀 나은 사람일 뿐이다. 흑백논리로 성경을 읽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인간을 위대하다고 치켜세우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온전하시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
다) 배경
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은 시 • 공간적,지리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배경이라고한다. 성경의 내용도 이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었다면,그 일이 언제,어디에서 일어난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 읽기에서 중요한 과정이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를 상상하며 읽는다면 그 내용이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배경을 이해하면 본문을 좀 더 정확하고 현실감 있게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독자는 사건 속에 들어가 자신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읽게 되기 때문에 배경 있는 읽기는 곧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의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배경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이 한 사건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문 안에 배경이 있고(inner-textual setting), 그리고 책 전체 내용의 배경이 있다 (inter-textual setting).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본문 안의 배경은 누가복음 19장 1-10절 안에 있는 배경을 말하고,텍스트 밖의 배경은 누가복음 19장 1-10절 앞뒤에 나오는 배경과 누가복음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는 배경을 말한다. 이 두 개의 배경을 항상 머리에 담고 본문을 읽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부분만 선택해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설 내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앞뒤를 살피면서 배경을 찾게 될 것이다.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면, 이 사건의 내용이 소개되기 전에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눈먼 소경을 고쳐주셨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삭개오의 감정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소경 이 고침을 받은 사건은 왜 삭개오가 늦게야 예수님께 나왔을까를 추측하게 해주는 키(key) 역할을 해준다. 지금까지는 성경을 읽을 때 배경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성경이 딱딱한 교리나 윤리 책으로 생각되 었던 것이다.
라) 서술자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전하는 서술자가 있다. 모든 이야기는 그런 서술자(Narrator)를 통해서 전달된다. 성경에서 서술자는 바로 책의 저자이다. 서술자는 본문의 내용에서 독자들이 무엇을 주의해서 보아야 하고,어떤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가를 안내한다. 그러므로 성 경을 읽을 때는 저자가 무엇을 강조하고 있고,무엇을 생각하도록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르게 들을 수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바르게 듣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서술자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자. 누가복음 19장 14절은 서술자의 진술이다. 7,10절도 서술자가 전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사건의 전모를 서술자가 전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 이해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서술자가 보여주는 내용 외에 독자들이 마음대로 상상해서 말하는 것은 절대로 금해야 한다. 여기서 용납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이나 처지일 때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들은 ‘일상성’으로 성경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실 때,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해석은 사람들의 일상성에 의하여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무시 하는 말이다. 또 그런 감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들이 성경에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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