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루터와 종교개혁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북부 독일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는 일찍 농사 짓는 것을 정리하고 작은 읍에 나와 광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가산이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대학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만약 루터의 아버지가 농부로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루터는 대학은커녕 소학교의 교문 앞에도 못 갔을 것이다.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했던 해는 1501년이었다. 바야흐로 16세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루터가 대학에 입학했던 당시의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기로 하자. 16세기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던 때였다. 남쪽 이탈리아에서는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나 그 운동의 꽃이 만발했던 시대였다. 우선 사람들의 사고
형태가 기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늘 나라 대신에 이 세상의 것에 관해서 더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까지 교회의 명령과 제도와 관습에 무조건 얽매여 살고 있다가 서서히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키고 촉매 작용을 하고 있던 주체가 바로 도시였고 상업의 발달이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노래하기를 ‘오! 백년이여 살기에 족하도다’ 라고 할만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부와 명예와 향락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성모 마리아를 사모하는 대신에 희랍 신화에 나오는 비너스 여신의 늘씬한 몸매에 도취되어 있었다.
16세기는 문예부흥과 탈교회화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세속화 과정 속에서 로마 교회는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중세 말의 로마교회는 영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로마교회를 축소시켜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에다 초점을 맞추어 보자. 16세기초의 바티칸은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 오고 있던 채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많겠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만을 지적하려고 한다. 십자군 운동 이후 로마교회는 영적 권위를 상실하여 일반 대중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교황이 제아무리 교서를 반포한다고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황 납치 사건이었다. 1304년 4월 13일 베네딕 11세의 독살 사건 이후 그레고리 11세까지, 즉 1377년 1월 17일까지 73년간 로마교황은 이탈리아 로마를 떠나 프랑스의 아비뇽에 유배당하다시피 살고있었다. 이때부터 로마교회는 해마다 유럽 각국에서부터 걷어들인 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들로서 프랑스의 추기경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 이 배후에는 프랑스의 역대 왕들의 교묘한 조종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징수되는 막대한 금액의 세금이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과 교황 사이에 적당하게 흥정하여 분배하여 착복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농토는 유럽에서 노른자위였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운동 이후 흑사병의 유행은 농업 생산의 감소를 가져왔기 때문에 교황청은 이중 삼중으로 재정의 궁핍 속에서 시달리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그런 형편 속에서 성 베드로 성당을 짓게 되었다. 근 팔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너무나 거창한 공사라 막대한 재정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수입은 줄어가는데 지출은 늘어만 갔다.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는 극에 달해 있었다.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보통이고 로마에 살고있던 주교와 대주교 그리고 추기경들과 교황까지도 공공연하게 첩을 두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바티칸 고위 성직자들은 거의 모두가 교황들의 친척들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재정의 궁핍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당시 프로렌스시에 살고있던 고리대금업자(자본가)였던 메디치가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돈을 빌려쓰게 되었다. 아마도 그 돈은 16세기 전부터 빌려쓰고 있었을 것이다. 수십 년이 경과하자 로마교황청은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궁여지책으로서 메디치가 출신의 성직자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말았다. 그가 바로 루터를 파문시켰던 레오 10세였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하는 일이란 교황청에 들어오는 돈을 자기 집 은행으로 송금하는 일이었다.
빚 갚는 대신 고리대금업자 집안에서 교황 뽑았다.
재정의 적자를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안해 낸 것이 소위 ‘면죄부’ 판매였다. 본래 면죄부 판매는 구제사업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루터 때에 이르러서는 순전히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은 하필이면 자기 나라는 물론 프랑스를 제외하고 알프스산 너머에 있는 독일에서 판매하였을까? 그것은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들은 너무 약아 빠져서 면죄부를 사지 않기 때문이고, 영국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고, 그러다 보니 독일인들은 좀 미개한 편이고 순진하니까 얕잡아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있던 당시 루터는 오로지 자기의 구원 문제만을 해결하느라고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을 체험한 후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다가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루터의 밝아진 영혼과 이성으로 로마교회의 교리와 제도를 보니 성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을 항목별로 정리하다 보니까 95개 조항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교회가 윤리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있었는지 깊이 알고 있지 않았다. 다만 로마교회의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다 보니까 로마교회의 타락상이 자동적으로 노출된 것뿐이었다.
루터 자신은 겸손한 수도사요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스스로 개혁가가 되겠다고 야심을 품은 적도 없었거니와 더군다나 거대한 로마 교황청을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개혁가로 몰고 갔던 것이다. 개혁가로서의 루터의 출발은 자신의 철저한 회개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영혼의 아픔이었다. 그러면 오늘의 신학생들을 비롯하여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루터와 같은 아픔을 체험하면서 살고있는가? 루터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죽는 날까지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회개는 한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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