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역 연구

예림의집 2015. 7. 9. 15:42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역 연구


 

. 서론

 

박형룡 박사는 한국신학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몇 명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 분으로서, 한국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의 보루요, 그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별명도 다양하며 그를 평가하는 목소리도 극에서 극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그를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의 신학사상들을 대표하는 교의신학(7)을 비롯한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14)'사실상 한국신학계의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박형룡의 신학을 승계하면서 정통보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한국 신학계의 거성'의 사상을 정통적으로 이어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분명 무거운 일이며, 그만큼 책임도 클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필자는 한국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박형룡 박사를 연구하면서 그의 생애와 사역만을 대략적으로 돌아보려 한다. 그의 생애에서는 출생부터 미국에서 학위 과정을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역을 고찰하면서는 박형룡 박사의 업적과 진보주의와의 논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본론

 

1. 박형룡 박사의 생애

 

1) 박형룡 박사의 생애

박형룡 박사는 1897328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박기수씨의 4남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게 된다. 신성중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숭실전문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1920년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교 3년 후 학사로 졸업하게 되고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 석사학위를 수여받는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대학원 시절에 박형룡 박사는 찰스 핫지와 워필드의 장로교 정통신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메이첸 박사로부터 사상적, 인격적 감화를 받았다. 1927년 켄터키주 남침례 신학교에서 변증신학을 연구하였고 19291월에 한국 평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처음에는 평양시내에 있는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나갔고, 산정현 교회 전도사로 섬겼다. 1930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임시교수직을 거쳐 전임교수가 되었고, 변증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평양대동군 군수를 지낸 부호 박기석씨의 4녀 중 3, 박순도 양과 결혼하여 두 아들(박아론, 박모세)을 두었다. 1931년 평양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산정현 교회에서 부목사 일을 맡아 보았다. 이후 1935기독교 현대 신학 난제 선평의 책을 출판하였다. 조선 예수교 장로교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어 숭의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박윤선 박사와 함께 표준성경주석을 저술하였으며, 1943년에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교수로 초청을 받아 교수생활을 하게 된다. 1947년 해방 후 고려신학교의 청빙을 받고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취임하였으나,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듬해 고신을 떠나버렸다. 19486월에 장로회 신학교가 개교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6.25동란으로 1953년에 대구에서 다시 개교하여 722월 은퇴할 때까지 총회신학교의 교장, 원장, 초대 학장직을 맡았으며, 781025일에 82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2) 박형룡 박사의 생애의 환경

(1) 박형룡 박사의 신앙

박형룡은 압록 강변 평북 벽동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1912929일 밤에 회심하였다. 그리고 벽동교회 최봉석(권능) 목사로부터 학습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양전백 목사가 신성 중학교 교장으로서 재직할 때 이 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중학교 시절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2) 서당교육

그 시대 한국 교육이 그랬던 것처럼 박형룡도 어릴 때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박형룡은 유교 교육이라는 것이 세상 교육의 인본주의적인 처세술을 위한 현세 종교에 불과한 사실을 잘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유교가 새 시대의 종교로써 그 교육적인 역할과 기능에 대해 더 이상의 현대 교육으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신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3)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

191317세 박형룡은 아버지가 가산 탕진으로 인해서 교회가 없는 산골 벽촌으로 이사 가자 그는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선천에 소재하는 신천 중학교로 공부하러 찾아왔다. 윤온산 선교사는 입학금조차 없는 그를 학생으로 맞아주었고 식비와 수업료를 필요로 하는 일부 돈을 스스로 벌수 있도록 아르바이트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박형룡은 학교 교육에 적응하면서 공부에 큰 진보를 보였다.

 

(4) 숭실전문학교

당시 북장로회 선교부가 교육 정책에 의해 세운 고등교육기관으로 배위량 선교사(W.M.Baird)가 설립한 학교이다. 19163월 입학하여 203월에 졸업했으며 그는 선교사 소열도(Theodore Stanley Soltau) 목사의 장학금으로 3년간 학업을 마쳤다. 그는 웅변을 잘하는 학생으로 유명했으며 졸업직후에도 숭실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다니면서 순회 전도하던 중에 구속을 당하는 일도 겪게 되었다.

숭실전문학교는 진정한 민족 복음화와 전도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로 삼천리강산을 무대로 예수의 복음을 전할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배출하는 사명자 학교였다. 따라서 박형룡은 이 교육기간동안 그리스도의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했다. 그는 신성 중학교 시절부터 교분을 나누었던 소열도 선교사가 지급한 장학금으로 전문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5) 남경 금릉 대학교

박형룡 박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으나 비자문제와 영어실력의 부족, 학사학위가 없는 이유 등의 이유로 마포삼열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중국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교로 편입하게 된다. 금릉대학교는 미국 대학 위원회에서 인정받는 학교로써 당시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신학교 교장을 겸임했던 마포삼열 선교사의 유학권유와 학비 보조로 공부했다. 이때의 경험이 그를 만주에 있는 봉천신학교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6) 프린스턴 신학교와 남침례교 신학교

박형룡은 중국 남경 금릉대학교 영문과를 편입해서 19238월 소열도 선교사 친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한다. 소열도 선교사는 그를 자신의 모교였던 프린스톤에 입학하도록 적극 권유했다. 프린스턴은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의 본산이었고 또한 성경과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신앙 유산을 사수하면서 가르치는 교수들인, 변증학과 조직신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형룡의 신학이 보수적이고 정통신학의 고수하였던 기초를 프린스턴에서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박형룡은 메이첸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박형룡은 당시 박사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자 친구의 권유와 메이첸 교수의 도움으로 남침례교 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교단의 차이로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메이첸이 직접 학비를 도와주었다.

 

 

2. 박형룡의 사역

 

1) 변증학자로서

박형룡을 변증학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전공한 것이 변증학이기 때문이다. 변증학은 기독교의 진리와 사실을 학술적으로 변호하고 증명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박형룡이 변증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한국의 지성적 시대상황적 필요 때문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가는 맥킨리호 배안에서 동경에 있는 한국학생회에서 편집하고 발행한 학지광이라는 잡지에 어느 무신론자의 종교관이라는 글을 읽게 된다. 이때 박형룡은 그 글을 읽고 학문적이지는 않지만 무신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글을 읽으며 분노를 느끼고 변증학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박형룡이 유학한 프린스턴은 고전적 변증학을 꽃피우게 한 신학교이다. 위필드, 그린과 같은 유명한 변증학자들과 메이첸과 같이 기독교 변호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위필드에 따르면 변증학은 모든 신학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다루기 때문에 신학의 각 분야들 가운데 수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또한 변증학의 임무를 하나님에 관한 과학 혹은 하나님에 관한 조직적인 지식인 신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반을 탐구하고 해명하고 정립해 주는 것이다. 이런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박형룡의 과학과 타종교에 대한 변증학적 자세를 살펴보기로 한다.

 

(1) 과학과의 관계

프린스턴의 과학관은 과학과 성경의 조화라는 독특한 관계의 설정이 있어왔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기에 과학은 그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도구로 보아왔다. 따라서 과학과 성경의 조화의 관계를 설정해 두었다고 보았다. 만약 성경과 과학이 상충할 경우 성경의 진리를 무시하고 과학적 이론만을 구성하거나 과학을 무시하고 성경을 강제하는 두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프린스턴의 학자마다 그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진화론 등 성경과 위배되는 과학 이론에 대해서는 비 창조를 주장하는 근본사상을 반대하지만 창조 내에서 진화가 가능하다고 보기도 하고 또 가설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성서비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한 두 가지 이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성경의 원문에는 어떠한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인간의 책임적 부분에 오류가 있어도 하나님의 영감을 절대 감소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은 성서비평에 대해서도 이러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과학처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박형룡 박사는 과학에 대해서는 프린스턴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그는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어느 부분까지 인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후기에 와서 창조과학을 받아들이면서 진화론에 대한 조화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고 성서비평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철저한 반대의 입장을 보여 왔다.

 

(2) 타종교와의 관계

현재도 그렇지만 박형룡 박사 당시에도 한국은 다종교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과 변증은 당연한 과제였다. 박형룡 박사가 귀국해서 처음으로 발표한 두 논문은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비판에 관한 글이었다. 또한 1937~38년에 걸쳐 신학지남종교론이라는 제목의 여섯 편의 논문을 연재하였다.

박형룡의 타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변증은 그 표현법이 초기에 비해 후기에 조금 부드러워진 부분은 있으나 그 태도는 여전히 강경했다. 박형룡은 타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고 타 종교에 대한 정복이야 말로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말한다.

2) 목회자로서

목회자로서 박형룡 박사는 1930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신사참배에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1936129일 조선총독부의 교육국장으로 잇던 와타나베는 장로교, 감리교 지도자들을 불러 신사참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 모두 신사참배를 통해 천황에 대한 경외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일제의 신사참배의 설득작업은 강압과 회유, 반대자들의 검거와 압력으로 전개되어 갔고 1930년 말에는 더욱 핍박하면서 강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3899일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게 된다.

박형룡 박사가 신사참배문제에 연루된 것은 1936년 초 숭실전문 학교의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숭실전문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학교를 폐교하느냐의 문제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문을 닫기보다 학교의 대표인 교장 윤산온(G.s.McCune)이 대표자로써 신사참배를 함으로 폐교를 막자는 쪽으로 결정되어져 갔다. 윤산온 교장은 최종결정을 내리기 앞서 박형룡박사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박형룡박사는 대표자의 굴종은 기독교학교 전체의 굴종임으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결국 윤산온도 이에 동의하고 학교를 폐교하기에 된다.

박형룡 박사의 신사참배 두 번째 사건은 1938년 평북 노회를 필두로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평양신학교에 있던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베어버린 사건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련자를 연행했고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으나 유일한 교수 연행자는 박형룡 박사였다. 일제는 신사참배의 지도자로 박형룡 박사를 지목한 것이었다. 평양신학교 내 한국인 교수는 모두 5명중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은 박형룡뿐이었다. 결국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휴교,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박형룡 박사는 일제의 점점 더 조여 오는 강압에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며 박형룡 박사와 함께 한국교회를 향해 신사참배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나 박형룡 박사의 도일(渡日)로 인해 크게 낙심하여 박형룡 박사가 떠난 밤 밤새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8422일 초량교회에서 열린 주기철목사 순교 기념식에서 박형룡 박사는 도망한 나는 면목이 없다며 울었다고 한다. 박형룡 박사의 도일은 주기철 목사에게 가장 소중한 아군을 잃는 슬픔이었을 것이며 한국 교회역시 또 하나의 순교자를 잃어버리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4년간 일본에 있던 박형룡 박사는 만주 봉천으로 자리를 옮겨 동북신학교의 교수직을 맡아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 만주 역시 일본의 지배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동북신학교도 역시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초빙에 앞서 자신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수장으로 믿음의 기초를 세우는 자로써 많은 거대한 사명을 감당했다. 그 믿음의 실천의 부분인 신사참배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최훈 목사는 신사참배에 문제를 네 개의 노선으로 분석하였다. 첫째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의 정조를 범하는 죄악임으로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노선, 둘째 목숨 걸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지만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지조를 지키겠다는 노선, 셋째 비참한 환란과 고충을 감당하기 곤란해서 일신상 목숨 유지를 위해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임으로 아무런 가책 없이 아부하던 지도자 노선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두 번째에 속한다.

194512월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당선된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신사참배에 노선에서 첫 번째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한국 교회와 신앙의 정조를 지켜낸 목회자였다. 그는 당선 인사말을 이렇게 전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출옥성도도, 또한 신사참배로 인해 죄책감으로 아파하던 성도들도 또 아무런 가책 없이 있던 자들도 그의 겸손함에 감동하며 고개를 숙였다.

 

3) 신학자로서

1976신학지남가을호에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청교도적 개혁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믿음, 둘째, 하나님 주권에의 확신, 셋째,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넷째, 성실한 실천, 다섯째 천년기전 재림론이다. 그는 이러한 신학을 근거로 더욱 자유주의와 WCC와의 분열과 분쟁에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제안하고 있다.

Harvie M. Conn 교수는 그의 장로교회 신학 연구에서 박형룡을 한국 보수 신학계의 대표자로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메이첸으로 불리우기도 하고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기수라고 호칭되기도 하였다. 신학자로써 그를 살펴보기에 너무나 광범위하고 어렵지만 그의 논문과 그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박형룡의 조직신학

박형룡 박사는 변증학을 연구했지만 더 많은 부분 조직신학자로 그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래서 그를 변증 학자로 시작하여 조직신학자가 된 분으로 밝히고 있다. 박형룡은 한국 신학사상 처음으로 교의신학을 7권으로 엮어낸 신학적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는 교의신학 맨 서두에서 정통주의,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교의신학 혹은 교의학을 논술하려 한다고 먼저 신학적 입장을 밝힌다. 그리고 그 정통적인 신학 사상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과 그 자신의 계시인 무오한 기록인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쓰게 된 것이라고 저술의 목적을 제시한다. 박형룡의 신학은 교의 신학의 구조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 신학 서론을 제하고는 벌코프의 구조와 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론 전개의 순서나 서술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제견을 덧붙어 벌코프의 신학을 보충 강화시켰으며 특히 기독론 취급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2) 자유주의에 대한 박형룡박사의 신학(성경 영감설과 관련하여)

박형룡의 평생 사명은 자유주의와의 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김재준과 박형룡의 관계가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박형룡의 태도를 많은 곳에서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립적 관계로 묘사하는 것을 즐겨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박형룡은 보수신학의 시작을 연 학자요 김재준은 자유주의 신학의 시작을 연 학자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신정통신학을 지향하였으나 처음부터 한국에서 그의 신학을 펼치지는 않았다. 처음 그의 신학은 보수적이었으나 한국의 보수주의적 신학과는 달랐다. 그러나 김재준의 신학적 태도가 자유주의적이었고 이러한 태도가 자유주의의 문을 열었다. 또한 해방이후 더욱 자유주의적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박형룡과 김재준의 갈등은 김재준이 평양신학교 교수임용에서 박형룡이 저지함으로 시작되었으며 김재준이 신학지남의 편집위원으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표면화 되었다. 이후 박형룡은 1935년 이후 김재준을 신학지남의 편집위원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였다. 이러한 김재준과의 갈등의 근본에는 성경관의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이후 이 차이의 전쟁은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커다란 파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재준의 성경관에 대한 그의 말을 직접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성서무오설'을 나는 다른 각도에서 확실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것은 과학이나 역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얻는 길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인데 영생을 주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 즉 그리스도라는 살아있는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일진데 성경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 얻는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그때에는 '성경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한대로 다 이루어 주는 데 무엇이 틀렸다 할 것입니까? ---나는 이런 의미에서 신구약 성경은 '신앙과 본문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데 더 견실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이와 같이 김재준의 성경무오설은 사상 무오설 혹은 목적론적 무오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오직 성경만이 증거하고 있으며, 오직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성경은 영생을 얻는 유일하고 무오한 진리인 예수를 증거하는데 있어 절대 무오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재준은 "성경책이 곧 계시"가 아니며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가 계시이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의 목적으로서 죄인을 구속하시려는 목적을 주는 유일하고 무오한 것임을 주장한다.

김재준은 목적론적 무오설을 말한다 하여 성경의 권위를 저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문자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이며, 오히려 문자 무오류설을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예수를 통한 구원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어김없이 증거하며 드러내기 때문에 문자적 오류, 과학적 오류, 역사적 오류 등이 있으나 이러한 오류 때문에 성경무오설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김재준은 조선신학생 진성서 사건의 진술서에서도 문서설 등 성경의 관학적 역사적 탐구가 신학의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는 아니며 성경이 신언이라는 것에는 영향이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신화, 역사, 격언, 시가, 제의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있으며, 과학적 오류가 있으나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서 현대인은 가장 적절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을 깊이 깨달으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확신하다"고 하고 오히려 성경절대 무오설을 주장하는 자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성경파괴하는 이단이라고 재판하던 수도승과 같다고 비판한다.

이와 반대로 박형룡의 성서 이해는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성경이 곧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유일한 문서이며, 그 전부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박형룡은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성경의 자증을 제시한다. 1935년의 박형룡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창세기 저작자 문제' 특별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모세가 오경의 저작자임을 성경이 자증한다고 주장하며 오경 자체의 증거, 구약 다른 책들의 증거, 신약에 그리스도의 증거와 다른 책들의 증거를 나열한다. 이 자증으로 말미암아 성경이 무오류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0신학지남"종교의 권위"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확무오함의 근거를 5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성경 무오의 자증이라고 한다.

이는 성경은 완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고,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이 온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1954신학지남에 발표한 "성경관의 제상"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감이 성경 각부에 동등하게 확장되어 있음으로 무오하다는 완전 영감의 책이며, 디모데후서 316절 등을 인용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류가 없음을 스스로가 증거(자증)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전통적 성경관의 기초로는 완전영감의 교리가 확립되어 있다. 성경의 완전영감은 성경전체가 가르친 교리이므로 교회의 교리로서 유구히 서 있다. 성경은 그 자체의 가신성을 증거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딤후3:16). 성경에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람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20:21)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가 중요한 진리의 변론을 성경의 단일어에 기초시킨 것은 그것의 문자들의 영감을 인정하신 증거다(10:35; 22:43-45; 3:16) ---성경은 이같이 자체의 축자영감을 포함하는 완전영감을 자증하고 있다.

 

박형룡은 이런 자증의 말씀을 거부하는 김재준과 신정통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는 1947년 김재준의 진술서에 대한 비판에서 김재준이 성경이 신학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나, 성경이 과학적,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전제하는 고등비평을 인정하는 그 자체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영감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이라고 비판한다. 성경이 자증함에도 불구하고 고등비평을 행함은 자증하는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고 성경 전체의 권위를 의문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바르트와 브룬너 등의 신정통주의를 향하여 성경과 계시의 동일성도 부인하고 성경의 무오설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바르트와 부룬너는 자기들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이라는 미명(美名)으로 자칭하나 성경과 계시의 동일성도 부정하고 성경의 무오성도 따라서 최고권위도 반대한다. 제일(第一)의 바르트 신학의 근본원리는 성경은 신의 언()을 매개하나 그것 자체가 신의 언은 아니라고 함이다.

 

뿐만 아니라 부룬너가 1950년 방한하여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 "성경은 그리스도를 태운 차니 왕은 권위를 가지나 차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하는 강연의 내용을 비판하면서, "부룬너는 성경을 믿지 아니하노라 하니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는 어떻게 믿는가 성경은 그리스도를 태운 차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차니 그것에 권위가 없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최고의 권위로서 성경을 믿어야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사 속의 박형룡 신학

해방이후 한국에서의 박형룡 박사의 사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유주의와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큰 세계의 분열 속에 박형룡 박사는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 속에는 자유주의와 투쟁이라는 전제도 속해 있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행동은 그 속에서 큰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한국교회 근대사의 분열과 박형룡 박사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그 책임에 대한 관점은 각도에 따라 다르다. 그 각도를 모두에게 맡기며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전개해 본다.

 

1952년 첫 번째 분열

일차 분열의 중심에는 고려신학교와 박형룡 박사를 생각해야 한다.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의 근본적 회개와 교회재건이라는 두 명제 앞에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통해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와 성도들은 회개를 주장했고, 신사참배를 했던 성도들은 교회 재건의 우선을 주장했다. 남한의 출옥성도들이 부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려신학교를 세워 새로운 교회정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그들은 만주에 있는 박형룡을 떠올렸다. 송상석 목사를 만주에 보내 박형룡 박사의 가족을 한국에 모셔왔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을 통한 이 길은 아주 위험한 길이었다.

박형룡은 1947년에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박형룡은 취임식에서 사도적 신학론을 강연했다. 여기서 박형룡의 신학과 역사의식을 알 수 있다. 첫째 박형룡은 이 신학교가 평양신학교의 계승이라 믿었다. 둘째 그에게 고려신학교는 더 큰 계획의 기초공사에 불과하며 전국적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셋째 그는 과거 신사참배의 회개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6개월 후 서울로 올라옴으로써 고려 신학교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출옥 성도파를 예의주시하던 교회들에게 더욱 고립화와 비난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결국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들은 고려파라는 이름으로 장로교와 분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박형룡과 고려신학교의 결별이 장로교와 출옥성도들의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측에서는 이 분리에 대한 박형룡의 책임을 그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측은 교회관의 차이로 보고 있다. 박형룡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고, 잘못된 교회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고려파는 신사숭배의 죄를 지은 교회를 나와 그 교회를 더욱 정화 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의 신앙 노선의 차이가 있었다는 관점이다. 둘째, 양자 사이에 신학교 운영방법에 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중도적 시각으로 신학교 운영방법에 대한 차이와 약간의 신앙노선의 차이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박형룡 박사가 고신과 결별한 것에는 고신을 이끌고 있던 한상동 목사와의 견해 차이를 보기도 한다. 첫째는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고려신학교를 총회 산하에 둘 것인가 독립적인 신학교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박형룡 박사는 고신을 가능한 빨리 총회 인준 신학교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 장로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신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를 자신의 보수 신학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졌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교권의 간섭 하에 들어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둘째 신학교 위치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를 서울로 옮기고자 주장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그대로 부산에 두고자 했다. 중앙으로 진출하여 전국을 망라하는 신학교를 원했던 박형룡과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셋째, 외부 선교부와의 협력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다. 한상동은 정통장로회 선교부와 독립 선교부만 관계를 갖고 싶어 했고 그래서 미 정통장로교 선교사들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미국 남장로교나 호주 및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와의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박형룡은 외교적으로는 좀 더 두루 관계하기를 원했다. 넷째, 권징에 대한 견해 차이이다. 한상동은 신사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숙안의 이행에 의해 권징을 받아들여야만 교회에 재건에 동참할 자격을 회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 문제에 발목이 잡혀 보수 신학 교육과 복음전도 같은 시급한 사업에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국 교회 총회측은 출옥성도(고려파)를 거부했고 출옥성도들은 총회를 뛰쳐나가려 했던 그 시점에 박형룡 박사의 입장과 행동이 양측 분열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1953년 두 번째 분열

박형룡이 만주 봉천에 머물러 있는 2년 동안 남한에서 유일한 총회 인준 신학교는 김재준이 이끄는 조선신학교였다. 김재준은 1946새사람11호에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며 선교사의 집권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김재준의 조선신학교에 대한 교회의 우려는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박형룡의 귀국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사실 김재준의 성경관은 바르트주의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한다든지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를 약화시킨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형룡은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에 나타난 성서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서관이요 교리문제에 대한 변명은 신신학의 교리관이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5338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였고 조선신학교 파는 총회로부터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기독교장로회)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59년 세 번째 분열

장로교의 세 번째 분열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참여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먼저 그 당시 상황을 잠시 돌아가 살펴보면 총회 직영 신학교는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나 1949년 박형룡과 보수주의지도자들은 사립 신학교의 총회 인준을 받아 총회 내 인준 신학교가 두 개가 되었다. 두 학교를 합동하려 시도하였으나 쉽지 않았고 51년 양 신학교 모두 폐쇄하게 된다. 그리고 51년에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조선 신학교의 반발을 예상하여 감부열 선교사가 1대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재준이 파면 당하자 53년에 2대 교장으로 박형룡이 취임하게 된다. 50년대는 박형룡 박사의 전성기의 시대였다. 이 신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였고 교회와 해방 전 선교사들에게 박형룡은 한국의 신학자로써 인정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박형룡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이고 배타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가 교장에 취임할 때 여러 가지 우려를 하였고 결국 그 우려는 583천만 환의 불법전용사건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WCC가입문제가 대두되었다. 총회 내에서도 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처음 박형룡은 온건한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3천만 환의 사건이 터지면서 그이 입지가 작아지고 교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입장이 더욱 강경하게 돌변하게 된다. 그전에는 WCC문제를 논할 때의 쟁점은 신신학과 단일교회가 쟁점이었으나 이후에는 용공(容共)주의가 더하여 져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공산주의에 많은 이득을 주고 있다면서 당시 정치적 반공사상까지 교회로 가져 들어온 것이다. 결국 양측은 서로 공방과 비방을 심화하다가 44차 총회를 끝으로 세 번째 분열을 하게 된다. 박형룡이 처음부터 WCC의 반대 입장에 선 것에는 그와 칼 매킨타이어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 결론

 

앞에서 잠시 살펴 본대로 박형룡 박사의 삶이 한국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발자취는 신학적 중심의 확립이었다. 그는 일본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의 문제에서 교회의 갈등 앞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물론 그가 삶으로 그것을 지켜내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신학자로써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그 시대 교회의 중심잡기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김재준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물결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앞에서도 그는 분명하게 성경의 권위와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확고한 가르침을 한국교회에 알려주었다. 그는 신학자로써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밑그림을 형성하는데 크고 중요하고 바른 영향을 끼쳐주었다. 그것이 그를 지금까지 존경하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확신과 사명은 한국교회가 분리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흔적의 아름다운 부분은 우리 속에 계승되고 부족한 부분은 더 낫고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 속에 계승되길 소망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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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박세환. “죽산 박형룡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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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한국 장로교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