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죽음에이르는7가지죄

교만을 이기는 길-자기 실상 바로 보기

예림의집 2015. 7. 3. 13:30

교만을 이기는 길-자기 실상 바로 보기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은 교만의 기초를 제거함으로써 교만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자기 실상을 제대로알지 못한다. 칼뱅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만해서 자신이 의롭고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세상의 오염된 도덕적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조명해서 별 문제가 없으면 자신이 도덕적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덜 악한 거은 선한 것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행여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바로 외면해 버리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칼뱅은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절대자요 전능자이신 거루간 하나님을 보게 되면 그분을 통해 자신을 알 수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인 것밖에 볼 줄 모르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다.

 

  C.J. 루이스의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신화를 재구성해서 쓴 것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을 자기 얼굴을 위장하고 감춘 채 얼굴 없이 살아가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주인공 오루알은 자신의 추한 얼굴을 늘 위장하고 살았는데, 아름다운 동생 프시케를 빨리 데려간 신을 고소하기 위해 신 앞에 나아간다. 그런데 신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수건을 벗은 자신의 본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리고 왜 신이 자신의 불만에 해명해 주지 않았는지,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깨닫게 되었다. 신을 만난 것 자체가 그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게 될 때 자기 얼굴을 찾고 실상을 알게 된다는 소설의 내용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 첫 장에서 말한 메시지와 아주 흡사하다.

  :우리는 생각을 높이 올려서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하여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고, 또한 그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완전한가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표준인 것을 생각하면, 그 이전에 정의인 것처럼 뽐내어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들이 그야말로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지혜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주던 것들이 지극히 어리석은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고, 또 덕스러운 열심의 모습을 보이던 것들이 지극히 비참한 무능함으로 드러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하나님의 순결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임을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의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마치 한 줄기 빛에 어둠 속 먼지가 생생히 드러나듯이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한갓 지렁이와 같이 누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사 41:14). 이런 자기 실상을 제대로 보고 알게 되면 인간은 한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사야는 천상의 어전 회의 광경을 보고 두려워하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자백하였다. 베드로도 그랬다. 그는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아들인 뒤, 즉각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송다(눅 5:8)!"라고 고백하며 두려워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내세우며 고난의 부당함을 강변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그분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기묘한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와 지혜를 깨닫게 하자(욥 39장)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의 길에 대해 감히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우매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내뱉은 온갖 말을 부끄러워함 철회하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욥 42:2)" 어리석음을 회개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으로 낭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노출시키는 핵심적인 방법인데,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실제적인 통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과 그분이 요구하는 의의 수준을 끊임 없이 인식함으로써 자기의 처지를 정직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였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그것을 통해 의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의 무능과 불의를 깨달으면서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율법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을 동시에 보여 주는 거울 기능을 한다는 칼뱅으 주장처럼, 인간은 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참한 실상을 알고 절망하고 낮아질 수 있다.

  초기 사막 수도사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 함께 모여 말씀을 읽었다. 오늘날 '거룩한 독서'로 알려진 '렉치오 디비나'는 이 수도원 전통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에 매일 함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시편 말씀으로 쓰인 찬송을 부르고, 개인적으로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침묵으로 깊이 기도했다. 이런 과정 가운데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는 수도 생활 이면에 존재하는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고, 조금만 불편해도 화를 내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하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옹졸한 모습을 선명히 비추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수도사들은 자시늬 더러운 내면을 더 치열하고 생생하게 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겸손에 대한 열망도 컸다. 그래서 주의 은혜와 도움을 간구하는 '예수 기도'가 수도사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수도사들은 많은 말 대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더럽고 형편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의 형태로 구성된 짧은 기도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드리곤 했다. 이 기도는 2세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동방의 수도원에서 시작되어 서방 교회로 전해졌고, 현재는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자신의정직한 모습을 치열하게 들여다 보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복된 기회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