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수 (삼하 19:31-39)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 시간에 “믿음의 분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들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분수란,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를 뜻합니다. 어렵지 않다고요? 쉬운 일도 아닙니다. 솔로몬처럼 박학다식하지 않을지라도 자기 분수만 알면 그 사람은 실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성공하게 됩니다.
이솝 우화가 있죠. 노새와 귀뚜라미 이야기입니다. 어느 가을날 노새는 귀뚜라미의 노래를 듣자 매우 부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 무엇을 먹기에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풀잎 위의 이슬을 먹어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노새는 주인이 주는 곡식이며 풀을 외면하고 자기도 이슬만 먹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물어보나마나 나귀는 이슬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 끝부분에서 이솝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자기 적성과 반대되는 욕망을 품으면 성취하지 못할뿐더러 더 큰 불행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기 분수를 알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그 평범한 말이 그토록 유명한 것은 바로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자기 분수를 잘 안 한 사람을 봅니다. 바르실래라는 사람입니다. 바르실래는 이스라엘의 요단 동편 길르앗 로글림에 살던 부자로 피난길에 오른 이스라엘 왕 다윗을 도운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 구구절절이 흐르는 문맥 속에서 그가 얼마나 충성되었으며 특히 자기 분수를 잘 안 사람이었는지 깊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 신앙에도 분수가 필요합니다.
분수를 알면 어떤 복이 있을까요?
1. 분수를 알면 성공이 있습니다.
32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큰 부자였습니다. 이건 도적질해서 된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한 번 보세요. 그의 이름 ‘바르실래’는 ‘무쇠처럼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무쇠처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철공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무쇠 얼마나 단단합니까? 다른 쇠는 쉽게 뚫어지는데 무쇠는 뚫리지 않습니다. 쇠를 녹여 쇳물을 부어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강한지 모르겠습니다. 바르실래는 그 이름 그대로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 외적 많은 요단 동족 변방에서 무쇠 같은 마음으로 굽히지 않고 사업가로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고 이것이 그의 분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살았더니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큰 부자더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공하려면 자기 소질과 은사를 알고 자기 능력과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은사에 역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왜 못 됩니까? 자기를 절실하게 모르게 때문입니다.
돈이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노하우가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부족하면 더 배우고 더 공부해야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이 밤잠 자지 않을 때 나는 방심해 있다면 어떻게 경쟁에서 승리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영적 환경이 얼마나 악하고 또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밤을 새워 가며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송해도 부족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이제 믿는다든지 주변의 신앙의 배경이 없을 때 몇 배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잠21:17에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했고, 갈6:3에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스스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너무 모르고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것도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뻐하고 날마다 찬송해도 그 은혜를 다 노래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이 분수를 알고 행동한다면 우리가 실패하거나 영적으로 빈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2. 분수를 알면 충성하게 됩니다.
다시 32절에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바르실래는 충성된 다윗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 기자는 그가 큰 부자이므로 당연히 왕을 공궤했다는 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처럼 블레셋과 전쟁하여 전리품으로 바쳤다든지 그런 영웅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가 참 잘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자기 분수에 맞게 왕을 도왔습니다. 삼하 17장을 보면 그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겨 다닐 때 다윗과 그 군사들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을 공급했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분수였습니다.
예수님도 분수를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헌금궤 곁에서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도 헌금하고 가난한 사람도 헌금하는데 예수님은 액수보다 분수를 보셨습니다. 부자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진분수였고, 가난한 자는 몇 푼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가분수였습니다.
분수로 치면 바르실래는 진분수도 아니고 가분수도 아닙니다. 부자였으므로 당연히 도와야 했습니다. 굳이 가분수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냥 분수도 아름답습니다. 압살롬이 난을 일으키자 온 나라가 다윗을 배반하고 그의 아들에게 줄을 섰지만 바르실래는 이제까지 요단 동편에서 복을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도움인지 아는 이상 다윗을 배반할 수 없었습니다.
옛 말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습니다. 이 말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윗과 바르실래의 관계는 왕과 백성, 왕과 신하, 은혜 베푼 자와 받은자의 관계인 줄 아는데 어찌 불충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어려도 왕은 왕이요, 왕이 부족해도 왕은 왕입니다. 피난 길에 올랐어도 왕은 왕입니다. 바르실래는 그 관계를 잘 알았습니다. 더구나 적의 변방에서 다윗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한 분이신 것을 안다면 어찌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후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3. 분수를 알면 겸손합니다.
33절에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그러니까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34절에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한 마디로 겸손의 모습입니다.
나이 많은 자기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나이 많아 왕을 따라가면 왕에게 짐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사코 자기 늙음을 부각시키며 왕의 청에 거절합니다. 그래요. 우리가 진실로 자기를 안다면 교만할 리가 없지요. 모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왜 그 천한 흙덩이로 만드셨을까요. 우리 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다 잘 만드셨는데 왜 늙고 병들고 추한 흙덩이를 우리에게 붙여놓으셨는지,,,
그러나 그래서 위대합니다. 그것은 더 큰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영원히 영원토록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는 티끌에서 취하셔서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사하면서도 나는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인간이다. 병고로 아플 때도 난 인간이다. 심지어 화장실을 가면서도 나는 거기 가야만 하는 땅에서 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린 하나님이 아니다. 보혜사가 아니다. 예수가 아니다. 그걸 모르면 영원히 불행할 것이고, 그것을 알면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4. 분수를 알면 소망이 보입니다.
37절에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여기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입니다. 바르실래는 왕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는 반면 자기의 아들을 부탁하였습니다. “김함”의 뜻은 ‘갈망함’입니다.
바르실래는 아들에게 대한 무언가 갈망이 있었기에 그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것입니다. 나는 노동하며 살았지만 아들만큼은 더 귀히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기의 늙은 육체는 요단 동편에 버려질 것이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들만은 왕을 따라가기를 갈망했습니다. 나는 죽어도 아들만은 위대해지길 바란다.
이걸 연구한 학자들은 렘41:17에 나오는 예루살렘 근처의 “게롯김함”이 왕이 그 아들에게 준 기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왕상 2장을 보면 다윗은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후손들을 후대하라고 했습니다. 왕이 임종 시까지 기억해 줄 정도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죽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내 영혼이 삽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후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인생입니다. 바르실래처럼 나는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행자지합니까? 예수님을 진정 주라고 부른다면 이젠 나를 내려놓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라는 분수를 온전히 지키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경을 바라보고 자기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바르실래처럼 분수에 합당하게 행하여 복 받고 충성하고 겸손하고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가장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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