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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단의 역할

예림의집 2014. 9. 22. 10:28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단의 역할

-필자가 본 주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 때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분명히 잉글랜드 수도에서 열린 잉글랜드 목사들의 종교회의였다.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은 엄밀히 말해서 그 종교회의의 회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발언할 수 있는 권리는 있었을지라도 투표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은 이 종교회의와 이상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전체 총대에 비해서도 너무나도 적었다.

 

1.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배경사

-1560년 개신교주의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에 불안정하게 세워졌다. 유럽 대륙의 가톨릭 세력들을 직면하고 있는 두 나라는 그 어떤 때보다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1637년 7월 23일 성 자일레스 교회에서 새로운 예배 예식서가 읽혀질 때 그들은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의하여 새 예식서 사용을 중시하였다.

-1641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찰스 1세와 그의 군대는 그 이듬해에 청교도적인 잉글랜드 국회와 더불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가 두 명의 청교도 목사와 함께 특사를 에딘베러에 보냈을 때, 그 결과는 두 나라 사이에 하나님께 엄숙한 서약 형식으로 한 독특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거룩한 협약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8명을 선출(5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하였고 그들 중 누구든지 3명(두명은 반드시 목사)은 런던으로 내려가도록 위임하였다.

 

2. 스코틀랜드 대표단들(The Scottish Commissioners)

-알렉산더 핸더슨 목사와 조지 길레스피 목사

-로버트 베일리와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

-메이트란드 장로와 아키발드 존스톤 장로

 

3. 웨스트민스터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이 직면한 문제들

①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그 당시에 분리된 두 개의 독립 국가였다는 사실

②종교회의가 회합되어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과 관련된 것들

-많은 부분에서 영국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③종교회의 내에 있는 잉글랜드 사람들의 그룹들

-독립교도들: 토마스 구드윈, 윌리암 브리지, 제레마이야 버러스

 

4. 웨스트민스터 문서 형성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의 공헌

-거룩한 협약과 언약 문서와 더불어서 4가지 중요한 문서가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①공예배 지침서

②신앙고백서

③대·소요리 문답서

④교회정치조례

 

5. 교회 정치 조례

①장로교회 교회정치 형태(The Form of Presbyterian Church Government)

②교회정치 지침서(The Directory for Church Government)

 

6. 장료교회의 발전과 불일치(Presbyterian Development and Disagreement)

-웨스트민스터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은 성경에 명시되어 잇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이차적’인 문제로 간주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양심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매어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이나 독립교도들은 다 같이 성경에는 분명한 한 가지 교회론만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교회관이었지 남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똑같이 교회 정체를 신의 법 원리에 근거를 두려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교회론이 성경적이며 도 ‘선하고 필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위히여 ‘신적 권위’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분열케 하는 힘’을 의미하드지 아니면 논쟁에 참여한 자들은 성경에 존재하지 분명한 성경적인 증거를 주장하는 자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해야만 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단은 이점에 있어서 그들 자신들의 역사와 거의 일관적이지 못하였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교회 정체가 종교개혁 당시에는 신약 성경으로부터 직접 나타난 것처럼 장로회 정치제도를 말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장로회주의가 모든 부분에 동일한 권위를 지닌 완전한 통일체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교회 법정의 부속 기관은 1570년대와 1580년대 후반까지 스코틀랜드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종교개혁 시대에 그 같은 교회 정체의 골격을 ‘신의 법’이라고 주장하 적이 없다.

-장로직에 대한 분명한 신앙은 스코틀랜드에서 점차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제 이 치리서(1578)에 있어서 ‘장로직(the eldership)’은 개별적인 당회와 여러 교회들로부터 온 이웃 교회들의 장로들과의 회합을 가리킬 때 쓴 용어였다. 이 같은 이웃 교회들 간의 장로회의 교통이 점차적으로 ‘노회’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으며 대체로 큰 도시나 지방 여러 지역에서 모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개교회에서 장로들의 회합이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복잡한 이 문제를 명쾌히 설명해 준 제임스 커크 교수는 ‘간단히 말해서 장로회 또는 노회원간의 교통은 개교회 당회와 대체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교파적인 추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근거하여 모이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인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모든 특별한 교회에는 노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노회는 출교권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교회의 장로들로 구성된 회합’을 그는 단순히 하나의 수련회로 불렀다. 카트라이트나 1580년대 스코틀랜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서로 교통하는’ 교회 원리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교회정치의 제반 문제를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 엮으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카트라이트는 상황의 요구에 의해서 ‘권징(예를 들어 교회정치)의 본질에 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어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다보았다.

 

7. 거룩한 협약과 언약의 영향

 

8. 스코틀랜드 대표단들의 후기 역사

 

맺는 말

①기독교와 정치적 혼돈은 이 시기에 산 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②우리가 이 시대로부터 배우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굳게 믿을 때 불관용이 더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③우리는 장로교 지도자들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집중하여 생각해 보았다.

④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최고의 교훈은 성경적인 진리의 균형이 교회법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얼마나 쉽게 상실되어 버리는가를 주목하는 것이다.

⑤17세기는 교회 정치의 온전한 체계를 성경에서 순종하도록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시키려는 너무 지루했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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