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교리[교의]는 필요한 것인가?

예림의집 2014. 3. 31. 11:52

2. 교리[교의]는 필요한 것인가?

 

1) 교리에 대해 부정적인 첫 번째 그룹

- 현대 신학자들

-자유주의 신학자들

-교회 무형론자들

-계시 의존적이 아니라 이서을 중시한다.

-교회의 전통이나 유산을 무가치하게 여김

☆반론: "역사가 분명히 증거하는 바는, 교의에 대한 오늘날의 반대조차도 실제로는 교의 그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특정 종류의 교의에 대한 반대이며, 현대 신학자들의 눈에 예뻐보이지 않는 그런 종류의 교의에 대한 반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37).

-교회의 오랜 역사에 의해서 산출되어지는 전통 교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기독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은 수 많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됭었다.

-이신칭의, 삼위일체

-공의회, 판결 문서, 신앙고백서, 교회공적 문서 등

-믿음의 선진들의 글과 유산들: 어거스틴, 안센, 버나드, 종교게혁 신학자, 근대의 신학자, 설교가 등)

☆우리는 절대화와 무가치화의 태도를 조심하여야 한다. 균쳥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2) 교리에 대해 부정적인 두 번째 그룹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천과 체험을 강조하며 이를 교리와 대조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사람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천과 체험과 경건을 교리와 불리 고착화 하였다.

-균형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반론: (사실상) 교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인용 ― A. W. 토저) A. W. Tozer, "How Important Is Creed?," in That Incredible Christian (Harrisburg, PA: Christian Publications, 1964), pp. 21-22

* 한역: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규장, pp.104-109.

 

. (토저가 말하는 바의) 요점

┎“Not creed, but Christ!”

┖교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 없이, 믿는 것[신앙 함] 자체가 불가능하다.

신조를 깎아내리고 체험을 참 기독교의 유일한 척도로 추켜올리는 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완전히 유행이 되어버렸다. 내가 알기로는 존 옥슨햄(John Oxenham)의 시(詩)에 나오는 ‘신조가 아닌 그리스도를!’(Not creed, but Christ)이라는 말이 진리의 음성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 옆에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좋게 느껴졌다. 이 말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신조무용론’(信條無用論)의 옹호자들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귀중한 비밀을 찾아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이 역사적 기독교의 장황하고 복잡한 교리체계를 관통하여 곧바로 그리스도에게 도달하는 쾌거를 이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들보다 그리스도께 더욱 집중함으로써 그분을 더북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런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중 략)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참 그리스도인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풍성한 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진리를 진술하고 자기의 진술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렇게 진술되고 방어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조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신조무용론자들은 이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들의 주장이 이렇게 들릴 수도 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지 인간이신지, 인간이며 하나님이신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이 자신의 시대의 미신적인 것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셨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충돌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누구인가?’ 였다.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주장을 스스로 철회하셨다면,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셨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셨다.

(중략)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밖의 다른 방법은 없다.

 

☞ 실전 훈련: 다음 이단 집단이 홍보 자료로 배포한 내용에서 문제되는 점들은 무엇인가?

전국에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신앙하시는 성도님들께,

성도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예수님의 계시 편지를 성도님에게 전하는 하늘 우체 배달부입니다. 이 계시 편지를 음성으로 전합니다. 음성으로 전하는 사람은 OOO 예수교인입니다. 하나님의 편지 곧 말씀을 전하는 구약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목자들이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죽인 자들도 그 시대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마 23장과 행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셨으니 아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날 계시 말씀을 그들과 같이 듣고도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어 구원 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 지금 때는 계시록이 응한 계시 때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복음은 계시 복음입니다. 그리고 추수 때입니다. 이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영적 이스라엘 세계가 끝나는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시대가 끝나는 때입니다. 이는 모세 때에 가나안 세계가 끝나는 것 같이, 예수 초림 때 율법과 육적 이스라엘 예언과 선지자도, 육적 이스라엘도 끝나는 것 같이 오늘날 주 재림 때의 추수 때는 씨 뿌린 밭 영적 이스라엘 교회가 끝나고 심판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주님의 추수 때 주 재림의 추수 때 추수되어 가지 못한 자들과 교회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꼭 알아야 할 점은 예수 재림은 영으로 와서 신약에 약속한 것을 이루는 것이므로 성경의 약속의 뜻을 알지 못하면 주의 재림을 초림 때와 같이 알지 못하는 점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성도는 약속의 목자 곧 주님의 사자로 온 자에게 듣고 깨달아야만 바른 신앙을 하게 됩니다. 주 재림 때의 사건들은 신약에 미리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져 그 실체들이 나타납니다...

하늘의 이 계시 말씀 편지는 알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성도님께 주 재림의 계시를 알게 하는 편지입니다. 이 계시의 편지는 빛과 생명이기 때문에 마음을 밝게 함으로 깨닫게 되고 보게 됩니다. 신약에 배도 멸망 구원의 일 중에는 일곱 인을 떼는 사건과 일곱 나팔의 소리와 일곱 대접의 재앙이 있고, 비밀로는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머리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과 마지막 일곱째 나팔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아십니까? 이 비밀을 몰라도 이 때에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이 비밀은 한 사람에게만 알려준 것이므로(것임으로) 그에게 듣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며, 예수님의 일곱 인으로 봉한 하나님의 책에 일곱 인을 떼시고 그 열린 책을 한 사람에게 주어 먹게 하시고,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전하라 하였으니, 이 책의 계시 말씀도 받은 그 한 사람에게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실상 계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실상 계시란 약속의 말씀이 이룬 실체를 증거하는 말인 것입니다. 이 편지는 이 지시를 받아 알리는 편지입니다 (2011. 3월 배포 자료).

 

3)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부흥 (인용 ― 로이드 존스)

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제가 제시하려는 마지막 원리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재발견할 때 결국 부흥이 일어난다는 데 전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흥에 앞서 항상 교리의 재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부흥이 갑자기 임하는 것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갑자기 임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부흥이 실상 그 이전부터 조용히 진행되어 왔다는 것,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미리 예비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비 작업은 항상 이 중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중심적인 진리들을 재발견하는 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컨대 종교개혁의 역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개신교의 부흥은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중대한 진리를 불현듯 깨달은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그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진리로 되돌아간 것이 성령의 부으심을 예비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영국을 비롯하여 개혁의 물결이 퍼져나간 모든 나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7세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도는 달랐지만, 똑같이 이런 진리들을 강조함으로써 청교도 시대의 큰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②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그 정의상 자신의 진리 위에만 부어질 수 있으며, 그 진리만을 높이실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령은 거짓말을 높이실 수 없습니다.”

* 자료 출처: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 『부흥』(Revival), 복있는 사람, pp.69-70;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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