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목사는 웁니다
얼마 전에 창골산봉서방 카페에서 보내주는 전체메일을 읽다가 나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발견했다.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인지 모르지만 글의 내용에 맞게 내가 제목을 <울보 목사>라고 붙여 보았다.
<울보 목사>
오늘도 나는 웁니다. 무능해서 울고
부족해서 웁니다. 성도의 삶을 보면
가슴을 치며 또 웁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내가 싫고 내가 못나서
그래서 나는 오늘 또 웁니다. 교회를 보면서 그저 웁니다. 주님을 보고 교회를 보면
송구스러워서 웁니다. 감사해서 웁니다. 구원받은 것이 감사요,
목사가 된 것이 감사요,
아빠가 된 것이 감사해서 웁니다. 성도가 있어서 감사하고,
교회가 있어서 감사하고,
주님이 있어서 감사해서 목 놓아 웁니다. 한없이 감사해서 무작정 울고 또 웁니다. 나는 울보, 울보 목사입니다.
또한 어떤 원로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글을 읽었다.
"목회하면서 집을 바치는 교인도 보았고, 땅 팔아 바친 교인, 전세금 뽑아 바친 교인, 심지어 피를 뽑아 팔아서 헌금하는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을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로운 간증을 들어도, 때로 통곡하고 회개해도, 뜨거운 성령 체험이 있었어도 성질 하나 뽑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사는 게 아니라 땅의 것을 더 많이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온전히 품고 살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옛 품성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불협화음을 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교회가 산다. 우리의 더러운 성질이 죽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다 죽어야 교회가 바로 서게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어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며 귀한 손님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죄 많은 한 여인이 자기의 평생 동안 모은 가장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씻으며 울었다.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그 여인을 욕하며 그 여인의 수종을 아무 말 없이 받고 계시는 예수님 또한 비난했다. 그 여인은 죄인이요, 더러운 삶을 살아온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품고 있었으며, 그 여인에 비하면 자기들의 삶은 얼마나 깨끗한가, 하고 자고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낫게 여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에 비해 자기들이 여러 모로 복 받은 자이며,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에 하나님이 택하여 자녀 삼아주셨다는 착각을 하고 산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배워도 실제로는 자기는 가치 있는데 반해 다른 누구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러한 오만과 교만에서 벗어나 있는 자는 드물다.
몇 개월 전에 〇〇마을에서 한 여인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여인에게 여러 번 전도하고 심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논과 밭이 꽤 있고 자식들도 다 잘 살고 있어 살림이 넉넉한 70대 중반의 여인이다. 그럼에도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며 자린고비의 삶을 살고 근천스럽게 살고 있어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산다. 농촌에서 여자 혼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큰일은 농기계로 한다 해도 몸도 실하지 않은 70대의 여자의 힘으로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은 힘들다. 특히, 생산물을 운반할 때 트럭이 필요하다. 그녀는 동네에서도 인심을 잃어 아무도 그녀의 일을 거들어 주려 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녀는 목사님이라면 자기의 일을 거들어 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한 것이다.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을 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그녀에 대해 말이 많았다. 사적인 일에 목사님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어느 권사님은 사택에 전화를 하여 그 사실을 고하고 제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 권사님에게 말했다.
“권사님, 그런 말 마세요. 그렇게라도 교회를 다니다가 그분이 시간이 지나 복음을 알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면 그걸로 된 거지요. 일을 도와주고 안 도와주고는 목사님이 형편 따라 결정할 것이니까 그런 일로 마음 쓰지 마세요. 기도나 많이 하고 때를 기다리세요.”
그 이후에도 여러 성도들이 그녀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을 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몇 개월이 지나도록 교회를 잘 다녔으며, 간간이 필요할 때면 목사님에게 일을 부탁했다. 목사님은 형편 닿는 대로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못 도와주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그녀가 교회를 잘 나오니 우리 부부는 그저 감사하고 좋기만 했다.
어느 주일 오후에 예배 시간 30분 전에 예배당에 나갔다. 주일 오후 찬양 예배 때 찬양을 인도하는 순서가 되어서 찬양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드시고 두어 시간 쉬시다가 오후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성도들이 하나씩 둘씩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어느 성도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씩씩대며 들어와 자리에 앉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교회에서 먹고 남은 밥을 왜 자기가 가져가냐고. 자기는 논도 많고 밭도 많은데 교회에다 쌀 한 가마니도 안내면서 무슨 염치로 남은 밥을 가져가고 그래.”
내가 듣다 보니 바로 그 성도에 대한 험담이었다. 오전 예배 때 설교 내용이 바로 ‘언어로 감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는 ‘아멘, 아멘’하지만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듣고 있기 민망해서 말을 저지시켰다.
“집사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성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목사님이 말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설교를 하건만 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세요?”
강대상에서 예배 전에 기도를 하고 있던 목사님도 그 말을 들었던가 보다. 웬만해서는 성도들에게 속상한 말을 잘 하지 않는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한 마디 했다.
“한 영혼이 교회에 나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와 수고가 있는 줄 아십니까? 아무렇게나 뱉은 말 한마디로 한 영혼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간다면 그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영혼을 살리는 말은 할지언정 영혼에 흠집을 내는 말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이 실족하면 목사는 그 영혼을 위해 오랜 시간을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교회를 허는 사람입니다. 제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인지라 언제나 말로써 말썽이 많이 일어난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야고보서 3장 2절에서도 가르침을 주고 있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말에 의해 상처를 입고 문제가 발생하여 수습하기가 어렵게 되는 일이 많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에서 말로 인하여 빚어지는 불상사가 아주 많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의 성질을 뽑아내지 못한 까닭이다. 성도들 간에 말로 인하여 생긴 불화를 보며, 그리하여 교회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목회자는 속울음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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