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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찬송은 믿음의 꽃

예림의집 2013. 6. 18. 17:29

찬송은 믿음의 꽃

 

I. 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찬양사역을 하다가 갑자기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주님을 더욱 찬양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에 전념하고 있는 이유 또한 더욱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난 15년간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알려진 찬양이나 이름이 없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내 길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고 2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나의 삶은 찬양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시절 나의 삶의 목표를 정하고, 두란노 경배와 찬양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임마누엘 선교단의 정종일 목사님, Sing 코이노이아의 주숙일 집사님 밑에서 잠시 사역을 배우다가 28살부터 본격적으로 찬양보급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예림 찬양단을 조직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면 찬양을 보급하고, 찬양팀을 세우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들이 어찌나 기쁘고 행복한지 지난 15년이 넘는 동안 단 한 번도 좌절하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도전과 방해와 어려움은 있었으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주위의 도움으로 잘 해쳐나가 약 23개의 교회를 거치면서 15개의 교회 찬양팀을 세워나가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부산에서 열린 큰 찬양 집회의 매인 리더로 활동하기도 하고, 기독교 방송에도 나가 간증도 하기도 하며, 작은 책도 내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찬양 사역의 일부로 아주 작은 징검다리에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또 다른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성공으로 교만해졌던 나는 그 길을 거부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저에게서 모든 것을 걷어 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동안 쌓아 왔던 명성, 인맥, 지식, 사역지 등.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불사르셨습니다. 나는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주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받쳐가며 충성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입술이 부르트고 목이 상하도록 하나님만 찬양했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녕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신 건가요?" 하나님께 원망도 하고 울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가 자란 서울의 면목동으로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난 이제 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5년 동안 발이 달토록 전국을 해매며 예배의 회복과 찬양의 부흥을 위해 살았던 내 삶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만나고 싶었던 사람, 내가 다니던 중곡초등학교, 내가 자란 교회들을 둘러보고 생을 마감하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기에…. 용마폭포 위에 올랐습니다.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의 자살 시도였습니다.

 

강하고 급한 바람이 나를 밀쳐 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억울하지 않는가? 그래도 왔다간 흔적이라도 남겨 놓고 가야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내려오는 길 내내 내 귓가에 흐르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왔다간 흔적이라”그리고 내려와서 만든 곳이 "예림의집 카페"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내 한스런 인생, 모진 사연 하소연이나 하려고 만든 카페입니다. 결코 믿음이나 계시나 은혜로 만든 곳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었기에,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냥 만들어 보았던 것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글들을 남겨보았습니다. 하나님 원망하는 글, 부모 원망하는 글, 15년 동안 정말 헛살았나 하는 푸념들…. 처음의 예림의집은 그런 글들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나를 변화시키고, 회복시키고 더 단단히 만들 줄이야! 카페가 변화하듯, 내 자신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여겼던 이곳 예림의집 카페에 한 명, 두 명 식구가 늘어갑니다.

 

모두들 상처 입은 영혼들…. 비록 얼굴은 마주볼 수 없지만, 서로 위로하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이 예림의집이 되기까지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분으로 가득 찼던 원망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상한심령이 되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또 다른 비전을 주셨습니다. 선교에 대한 비전. 처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그 비전을 보며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며, 외로이 혼자인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한숨만 나왔습니다. 내 믿음이 많이 연약했기에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목사가 되기 위함도 아니요, 신학을 탐구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 만민이 주님을 찬양할 그 날까지 선교하기 위하여, 도저히 나의 힘으론 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신학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열심히 공부하여 총신대학원도 오게 되었고 이렇게 나의 찬양의 삶을 논문으로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나의 삶을 세세하게 밝히는 이유는, 찬양이 바로 우리의 삶이기도 하며, 그 찬양의 내용도 우리의 삶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이 글이 100% 나의 창작일수는 없습니다. 내에가 가르침을 주었던 많은 분들, 말씀들, 책들의 내용들이 함께 내 삶 속에서, 머릿속에서 버무려져 글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 논문을 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찬송가학을 통하여 열정어린 강의를 해주시고 이런 소중한 기회를 허락하신 이국병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나의 삶이 찬양으로 기름지게 하도록 인도해 주신 분들이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II. 서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

 

때로는 찬양 부흥사로, 예배 인도자로, 찬송 전도자로 15년 동안 사역을 감당해 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있으나 찬양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본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그들이 진정한 찬양의 의미를 알고 마음껏 찬양할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사용하셨다. 주께서 찬양 받으시길 원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올바르게 찬양하지 않는 이들에게 저를 보내어 그들을 부수고, 녹이고, 다시 빚어 마땅히 받으실 찬양을 받으시기까지의 끊임없는 영적 전쟁으로 이끄셨다. 때로는 실패하여 낙망하기도 하고 좌절의 고통 속에 울부짖기도 하며 끝내 변화되는 놀라는 경험들을 체험하며 온 교회가 온전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감동의 바로 그 현장 한 복판에서 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제 지방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더 큰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심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 목표와 새 사역을 이 곳 양지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했을 때 늘 생각하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는 성도들의 감격 없는 생활, 기쁨이 없는 표정, 너무 형식적인 예배들 때문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 같지만 제가 주님을 구주로 모신 1980년대 후반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몇몇 교회를 제외하곤 장례식을 하는 것 같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늘 그러하시듯 이러한 의문점을 발견한 나를 훈련하시어 찬양사역자로 헌신하게 하신 듯하다.

글 제목에 "찬송은 믿음의 꽃"이라고 적었다. 그렇다. 찬송은 비밀이고 신비이다. 발견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결단코 온전히 드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3~40년을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실한분들 조차 찬송을 몰라서 거룩과 경건만 외치는 교인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찬송의 비밀은 신비로운 것이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놀라운 것이다. 찬양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도 없는 정말 놀라운 비밀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이야기해 보자.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찌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대상16:23-24)”

이 말씀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담긴 귀한 말씀이다.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찬양과 경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혹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다. 또한 잠잠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주님을 높이는 찬양을 할 수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선포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많은 찬양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찬양이 있다.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포하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신지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구원의 큰 은혜를 주신 사랑을 선포한다.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 희생을 통해 영 죽을 우리 죄인들이 죄 사함의 은택을 얻게 된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금도 한결 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고 있음을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찬양 곡들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시편 96편의 말씀처럼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하며 주님의 기이한 행적을 열방의 만민 앞에서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 두루 다니며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곳곳에 선포하기 원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몸 된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합2:14) 그러기 위해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크고 분명해야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보내심을 받은 자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해야 하는 것이다(롬10:15).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 이 죄악 된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은 결코 우리에게 순순히 지배권을 넘겨주질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악의 무리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의 찬양을 방해한다. 그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다가 허접을 보이면 집어 삼키려 한다(벧전 5:8). 그러므로 찬양 사역은 영적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의 싸움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찬송하게 된다.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구원의 소리를 외칠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118:15-16).” 우리가 우리 입술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를 외칠 때 하나님께서는 큰 권능을 베풀어 주신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에서 이 “증거하다”는 말의 원어 의미를 보면 ‘자백하다, 시인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입술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입술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예수 증거의 영’이시다. 전도는 다름 아닌 예수를 증거 하는 우리의 신앙 고백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위대한 이름을 만민들에게 선포하며 구원을 주신 놀라운 사랑을 증거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과 경배다.

여기에는 능숙한 악기 연주, 완벽한 목소리, 해박한 신학적 지식이 없어도 된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광을 홀로 받기에 합당하시고, 구원의 귀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쉼 없이 이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고 경배할 의무가 있다. 성경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선포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찬양의 의미와 능력과 열매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III. 본론-①찬송이란 무엇인가?

 

내가 찬양 보급 사역을 처음으로 시작할 당시만 해도, 지방 교회에서는 찬송은 오직 창송가책만 허용되던 교회가 많았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시끄럽게 한다고, 딴따라를 도입한다고, 박수친다고 쫓겨난 적도 많았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한참 경배와 찬양이 예수전도단, 두란노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지역 교회와의 격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찬송에 대한 바른 정립을 하여, 그것을 교회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먼저 그 과정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CCM에 대한 편견

CCM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한국교회의 정서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먼저 “CCM은 찬양이 아니다, 가요이다”라는 점이다. 그러나 CCM은 이미 가요와 찬양이라는 형태적 편견을 극복했다.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운행 질서를 거부하는 악한 메시지의 음악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고백에 CCM은 기초한다. 대중이 익숙하게 접해왔던 음악 스타일에 복음을 담는 작업이 바로 CCM이다. 이것이 CCM이 가요에 가깝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순기능이다.

또 하나는 CCM을 교회에서 돈 벌려는 하나의 상업 수단으로 이해하는 시각이다.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우리 CCM 음악시장은 제일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위기 속에 문화 소비가 크게 줄고, 이제 막 대중화로 영글기 시작한 CCM시장은 채 무르익기도 전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숱한 부도의 위기 속에서 현재 CCM 기획사가 문을 닫거나, 또는 가수가 사역을 중단했다는 소식은 없다. 이는 CCM 가수와 사역자들이 이미 상업적 이윤의 여부에 대해 초연해 있다는 증거이다.

또 한 가지는 CCM 가수들의 외모를 놓고 '은혜가 안 된다'는 평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이 목사 표를 내기 위해 경건한 양복 차림으로 원주민들 앞에 설 수 있는가. 음악이나 외양, 스타일 보다는 그들의 중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 속에 그들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CCM 음악에 담긴 가사의 문제들이다. 최근 경향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수직적인 가사가 크게 적다는 이야기이다. 또 "아멘", "하나님"과 같은 신앙 용어는 거의 들어가 있지 않는다, 무슨 메시지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에는 나도 많은 우려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그것을 표현의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싶다. 찬양의 목적은 분명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영화롭게 표현하는 방법에는 직설적인 것 말고도 잠재적인 것도 있다. 표현의 다양성만큼 하나님이 찬양 받으셔야 할 지경 역시 넓어야 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과 지경은 넓어야 한다. 태초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염색체가 동일한 것이 없듯, 각자의 신앙고백과 은혜는 다르다. 다양한 은혜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올바른 CCM은 이 정신에 굳건히 기초해있다. CCM은 다양성의 세대를 사는 이들에게 유일한 진리인 복음을 뿌리 내리는 아주 정교한 사역이다. 이는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력, 기도가 필요하다. 물론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역이기 때문에 허점도 보이고, 또 허물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심중에 자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열정은 세대와 감각, 그리고 신앙배경이 다른 모든 거리를 뛰어넘는 이해의 고리가 되리라 믿는다. 그동안 찬양사역을 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편견을 정리해 보고 그 답을 나름대로 해 본다

첫째, “이게 무슨 찬양입니까? CCM은 가요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가요는 다 나쁜 것일까요? 우선 이것부터 짚어봅시다. 가요 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또 이 사회에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그런 노래들도 많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크리스천이 쓴 노래들도 상당합니다. 그것이 결국 나중에 CCM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많고요….

결국 문제는 말초적이고, 상업적인 그런 노래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그런 노래들도 있고요, 그런 노래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지 무턱대고 모든 가요는 다 나쁘다 이런 식으로 단정하는 사람은 사회 생활하는데 불편이 많습니다. 사실 모든 노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음악의 뿌리도 그랬고요. 사실 이러한 편견의 이면에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이미 기독교 교리가 생기던 때에 영지주의의 사상으로 이단으로 정죄 받은 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각설하고요, 가요에 대해 필요이상의 거부감이나, 또는 들었다고, 불렀다고, 즐겼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좋은 가요, 좋은 대중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런 이유로 CCM은 가요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가요 같은 CCM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알게 된 사례를 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또한 잘못된 대중문화에 빠져있던 친구들이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회복하게 되는 역사를 여러분 체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벽, 즉 율법과 범죄 함을 허무셨습니다. 결국 CCM의 역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처럼 본의 아니게 가로막힌 교회와 세상의 벽을 허무는 그런 사명을 감당하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둘째, “CCM은 찬양을 이용해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는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호해에서 나온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CCM은 한마디로 장사가 안 되는 종목입니다. 시장 층이 얇은 것도 그렇고요, feed back층도 여타 대중문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안에 자리한 경직된 “거룩함의 문화”가 CCM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가수가 앨범을 내려면 적어도 기획사나 아티스트 자신 모두 천 여 만원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장사가 안 되는'” CCM계에서 계속 이 일을 하려고 할까요. 제가 경험하고, 만나본 바, 이들 CCM 가수들은 이러한 것을 '사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모여서 노래하고 힘들여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간혹 돈과 명예를 바라보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반드시 실족하고 도태되거나 하나님이 만지시어 바른 사역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CCM은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IMF체제가 들어서면서 각 기획사와 아티스트들은 수익의 평균 50%가량 줄어들었습니다. 문화는 거품빼기의 0순위로 보는 것이 사회 전반의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역을 관두거나 다른 일로 전향한 가수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이 일을 돈 바라보며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상업성에 대한 우려의 잣대를 가난하고 배고픈 CCM사역에 들이댈 것이 아니라 문화적 마녀사냥에 힘쓰는 일부 세력들을 향해 던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기독교계에 몰아닥친 대중문화를 향한 맹목적인 혐오감과 반감 주입으로 돈 챙긴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은 아니지만-결국 대중문화에서 소재가 바닥나자 ‘복음성가 계에도 New Age가 있더라.'라는 식으로 문화 혐오주의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나 잡지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CCM과 상업성은 현재로서는 연관 짓기 힘든 것들입니다. 찬양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말고는 돈과 소망도 버린 사람들임을 알고, 그 사람들에게 상업성의 올무를 던지지 말아야 갰습니다.

 

셋째, “CCM가수들을 보면 은혜가 안 됩니다. 옷차림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 그게 뭡니까? 경망스럽게”이 말은 CCM 가수들이 지나치게 외양에만 관심을 쓴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그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고백하고, 노래하는 대상까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쉽고 간편한 것이 없습니다. 솔직히 사람의 원초적인 판단 기준도 외모입니다. 그러나 총체적인 문화 사역인 CCM을 가수들 개개인의 외모만 보고 판단을 한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드럼으로 찬양을 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 목사님과 같은 정장차림으로, 드럼을 친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특히 ROCK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을 줄 수 있을까요? 같은 논리입니다. CCM 가수들이 외양에 신경을 쓰는 것, 또 나름대로 가꾸는 이유를 가수 개인의 감각적인 매력을 키우려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찬양 사역자들이 하나같이 똑같이 정장차림에 똑같은 말씨에 똑같은 노래 스타일로만 한다면 이 땅에 다양한 문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문화섭리를 아주 간편화, 단순화 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고, 누가 봐도 분명한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 선생은,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심을 수 있을까에 집중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양식을 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CCM 사역자들의 외양과 스타일은 바로 이러한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경건의 모양새는 외양이 아닌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겉만 보지 않고, 중심까지 보는 것.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넷째, “CCM은 따라 부르기 힘듭니다. 교회에서 쓰지 못할 노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고심했습니다. 어떻게 이들에게 설명할까? 우리나라 찬양 문화는 교회에서 얼마나 활용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분별됩니다. 제가 교회 찬양집을 지난해 편집할 때 제가 작곡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라는 곡의 악보를 실었는데, 지금까지 처음에는 성도님들이 알지 못하는 곡이라고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곡은 찬양집 한 권으로 봐서는 종이 낭비를 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그 노래가 '필요 없는 찬양'일까요? 교회 내에 찬양 예배 인도자들은 새 찬양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찬양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을 '사명'처럼 압니다. 그래서 아무리 CCM 가수들이 콘서트를 자주 열고, 교회 집회에 다녀도, 개 교회 찬양 인도자를 통하는 것만치는 못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새로운 찬양을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면 몇몇 성도들이 표정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바뀌지요. 제일 앞에 앉아 계시던 수석 장로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모른 채 몇 주 그 찬양을 하다 보면 그 찬양은 어느새 성도들에게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작곡한 “성령으로 하나 된 교회”도 이제는 저희 교회의 주제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교회만큼 노래 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곳도 없습니다. 모이면 꼭 서너 곡씩의 노래를 부르게 되니까요.대중음악 가수 중에 어렸을 때 교회 한 두 번 안나가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는 회중 찬송의 역할이 크지요. 엇박자도 많지 않고, 멜로디 라인도 단순한 음악들. 그것을 통해 찬양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오는 CCM들은 참 따라 부르기 힘든 곡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ROCK이 나오고 RAP까지 등장하니 골치가 아플 지경입니다. 저도 이 부분은 동감합니다. 저도 따라가기가 힘에 붙이니까요. 저도 찬양 집회 현장에서 쓰이는 노래는 점점 줄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CCM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경솔한 것입니다. 효용성의 가치만으로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경쟁력 차원에서 '점점 어려워지는 CCM'을 이해하는 포용력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요즘 “난해해진 CCM”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싸이의 “강남스타일”도 잘 따라 부르는 요즘 세대들의 높아진 감각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단지 찬양 선곡의 주체가 되는 찬양지도자들이 잘 선별하여 적절한 곳에 적절한 곡을 사용하면 되겠지요.

 

다섯째, “CCM 가수들은 가요하려다 안되니까 CCM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음악을 하다가 복음성가계로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윤항기 목사, 윤형주 장로, 이종용 목사…. 또 요즘에는 대중음악 가수들이 CCM앨범을 내거나, 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조한, 태사자, 조관우, 손지창, 유리상자, 신형원 등등 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박정현도 포함되네요.

그렇다면, 이들이 복음성가나 CCM을 하는 이유는 이쪽에서도 돈을 벌어보려는 심산이나, 또는 가요가 안 되니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계산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외도(?)를 걷지 않고 찬양보급과 찬양팀 사역을 하고 있는 나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보일까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결코 CCM장르는 이익을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들은 인기가 있고, 없고, 젊고, 늙고 간에 CCM을 부르고 싶어 했고, 대중음악계의 치밀한 상업성과 인기의 이해타산 논리를 무릅쓰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용기'라고 보고 싶습니다. CCM을 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교회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통해 배출된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이들은 자기 삶의 달란트와 비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에 몸담기로 체계적으로 헌신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음악이나 인기나 금전이 그들의 목적이었다면 CCM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음악이 목적이 되고 CCM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이 목적이 되고, 음악이 수단이 된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헌신의 귀감이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CCM 가수 중에는 또 음악적 기량을 살려 대중음악계로 진출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CCM에서 인정받았으니 이제는 가요계로 진출해보자는 심리로 해석하는 것을 저는 경계합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원대한 꿈으로, 바로 그것이 그들 삶의 중대한 목적인 것이라고 변호합니다.

 

여섯째, “CCM에는 하나님, 예수님 같은 신앙용어가 많이 없습니다. 이게 찬양일 수 있습니까?”이 질문에는 질문자의 많은 고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만큼 찬양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에게 나는 대도록 친절하게 설명해 드립니다. 우리의 정서상 찬양은 수직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찬양의 온전한 틀로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인 노래, 성도 사이에 권면과 교제의 이야기를 가사화 한 것에 대한 것은 찬송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노래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도 수평적인 노래도 많습니다. <성도여 다 함께>,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가사의 대상이 사람에게 향해있는 노래가 곳곳에서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할렐루야', '아멘'과 같은 신앙용어가 배제되어 있는 노래에 대한지적인줄 압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용어가 들어가 있지 않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 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찬송가에서 빼야 할 노래입니다. 그야말로 무지에서 오는 편견입니다. 분명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영화롭게 표현하는 방법에는 직설적인 것 말고도 잠재적인 것도 있습니다. 표현의 다양성만큼 하나님이 찬양받으셔야할 지경 역시 넓어야 합니다. 아마 똑같은 가사의 노래에 곡조는 성악이나 고전 클래식 취향이라면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성가곡 중에는 찬양이 될 수 없는 곡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지막 일곱째로, “CCM과 찬양은 구분해야 합니다. CCM은 또, 예배에 쓰일 수 없습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아집이요, 편견이었습니다. CCM은 기독교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찬양'과는 다르며, 구분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예배에 쓰일 수 없다는 지적은 15년 전 내가 주장하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찬송가'만이 예배에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찬송가'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예배에 꼭 필요한 경전인 성경과 같은 위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찬송가를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찬송가가 비록 성경과 함께 책으로 붙어 나온다고 해서 그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책입니다. 그러나 찬송가는 찬송가 공회 회원들이 모여서 선곡해서 넣은 곡입니다. 인류 역사의 절대 진리와, 일개 노래책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찬송가에 담긴 곡이 영감이 있다는 논리도 편견입니다. 찬송가 중에는 1800년대 미국 기독교 부흥 역사 때 부를 '찬송 곡'이 없어서 당대 유행가에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꿔 만든 노래가 상당합니다. 특히 고난주간에 부르는 <오 거룩하신 주님> 멜로디의 경우는 독일의 선술집에서나 부르던 사랑노래였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찬송가를 우습게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가치기준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담겨진 가사와 복음을 담은 진리이지, 스타일이나 음악적인 감각은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CCM은 그런 의미에서 정신만 복음에 튼튼히 기초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예배에 쓰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수평적, 수직적이건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지경을 넓히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매주 아니 날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 CCM을 비롯한 찬송들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CCM은 대중음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못 쓴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송가도 전형적인 대중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대중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대중음악'이라면 찬송가가 더 실질적인 대중음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건 찬송가에 있으니까 찬양받으셔야 할 것이고, 이것은 경망스러운 CCM이니까 예배에 쓰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식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무슨 차별이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2. 찬송은 성도의 의무

처음 사역지에 도착해서 제일 많이 듣는 말들이 있다.

“선생님, 저는 찬송에는 취미가 없는 가 봅니다.”

“저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찬송에는 재능이 없나 봐요.”

나는 처음에 이런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들이 찬송도 모르고 성경도 정독을 안 하는구나’

성경 곳곳에 찬송은 취미가 아니라고, 찬송은 재능이 아니라고, 하나님은 너의 목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찬송을 원하신다고, 주님은 고운 목소리 멋진 환상곡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찬송을 원하신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취미라는 것은 강제성이 없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 것이 취미이다. 하지만 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게 적혀 있다. 권유나 권면이 아니라 명령을 하신다. 그 명령을 함께 읽어 보자.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 할지어다(시 9: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시 33:1)”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할지어다(시 150:6)”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찬송하라고 명령하신다. 목사님의 명령도 아니고, 예배인도자의 권면도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찬송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찬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분을 찬송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이 명령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으며 달란트나 은사나 은혜가 아니다! 찬송은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호흡이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나이도, 재능도, 부와 명예와 어떠한 치장도 찬양을 제한 할 수 없다. 내가 이 비밀을 깨달은 순간 나는 눈물이 주체 없이 나고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두 달 넘게 새벽에 주님께 회개하고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야 주님께서 나에게 소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우리에게 의무이지만 또한 우리의 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아들로 인정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자격증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 자격증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 치심을 받은 자"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우리는 이 자격증은 선물로 받았다. 우리는 세상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들을 하는가? 하지만 이 자격증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누구도 빼앗거나 박탈 할 수 없는, 곰팡이가 생기거나 불에 타지 않는 자격증이다. 자격증을 딴 후에 장롱 속에 고이 숨겨 두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운전 면허증을 따고 10년 동안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한 사람이 과연 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 있겠는가? 찬송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는 찬송할 자격이 있고, 찬송할 수 있고, 찬송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 묻어 버린 것조차 잊어버리는 그러한 불량 교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주위에 혹시 이런 불량 교인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면 내가 찬양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그들이 보고 깨달아 변화 받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찬양이 넘쳐 나기를, 그 중심에 우리들이 있기를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다. 찬송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가장 기본적인 의무임을 명심하자. 찬송하지 않는 삶은 불순종의 죄를 늘 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도할 때에 제일 먼저 찬송하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회개한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음식을 먹는 것처럼, 잠을 자는 것처럼 찬송이 삶에 자연적으로 녹아들게 하자.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인 찬송! 찬송이 우리의 생활이 되는 때에 좋은 열매가 열릴 것이고,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 날 것이다.

 

3. 찬송은 소중한 예물.

찬송은 예물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혹시 찬송을 예배를 준비하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로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찬송은 예물이라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도 처음 듣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는 찬송을 예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예물이란 헌금이나 성전에 필요한 물건 등 즉, 유형적인 것만 그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예물은 곧 헌금이라고만 많이 생각해 왔을 것이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했다면 '준비찬송'이라는 말도, 4절까지 있는 찬송을 시간 관계상 '1절과 4절만' 부르는 병패도 없었을 것이다. 헌금하는 지폐(돈)를 가운데를 잘라버리고 양 끝만 드리는 분은 없을 테니까…. 만약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찬송하는 태도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신앙인들의 노래? 예배를 돕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노래? 많은 사람들이 찬송은 신앙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양심을 일깨우는 노래 정도로 생각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예배 분위기를 돕고 심령을 평안케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앞에 열거한 그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현상들일 뿐이다.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지 찬송 자체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찬송을 너무 많이 왜곡시켜 왔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에서 찬송을 일회용 반창고 보다 더 하찮게 여기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쓰고 그냥 방치해 둔다. 찬송이 도구로 전락하는 통탄할 순간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몇몇 신학교의 통탄할 모습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학교는 5월 달에 축제가 있습니다. 이 축제의 한 순서가 찬양 경연대회이다. 찬송을 가지고 누가 잘 부르고 누가 더 멋지게 부르는지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는 현장입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참가비도 받는다. 예선과 본선이 있고 심사위원들이 있으며 예선을 통과해야 본선을 나갈 수가 있다. 찬양을 하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몇 날 며칠을 연습을 해야 한다. 찬양 경연대회가 축제의 꽃이라고 한다. 찬양 경영대회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가 고조 된다고 한다. 여러분!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찬양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단 말인가? 찬양이 축제를 돕는 도구로 전락하는 현장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불신앙적인 일을 막고 싶을 따름이다. 힘이 없어서 안타깝게 여기며 기도할 따름이다.

다음으로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 도취증이라는 것이다. 대개 한 두곡의 찬송을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북을 치고 손뼉을 치면서 성도들을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어간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식의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고 은혜를 받은 것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저 또한 청년 때에 그런 집회에 많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그런 식의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에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던 적이 있다. 그 대답은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뜨겁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 못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열고 뜨겁게 찬송 하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지 물리적으로 몸에 열을 발산해서 뜨겁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몸이 뜨겁다고 마음이 또한 뜨겁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 또는 착각일 뿐이다. 골방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간절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뜨거운 심령인가, 아닌가?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고 땀을 흘리고 침을 튀겨야 뜨겁게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인도자의 교만에서 나오는, 대중들의 열렬한 반응에 따른 자기도취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가려지고 인도자 자신을 드러내는 이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배역의 길로 흐를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너무나 슬프다. 아직도 이러한 인도자가 많은 교회와 찬양의 현장에서 뜨거운 찬양이라는 명찰을 달고 많은 성도들을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것은 죄다. 너무나도 큰 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절벽으로 함께 향하는 죄다.

또 한 가지는 일부 선교단이나 부흥사들의 경우 장소에 전혀 걸맞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큰 고성능 앰프 시스템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소리의 크기를 최고로 높이기 때문에 가히 지붕이 들썩들썩할 지경이다. 아마 그들은 찬송의 소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발상이다. 인간의 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을 느끼고 불쾌감을 느끼고 내용과는 상관없이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찬양에, 예배에 방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에 장해물이 될 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많은 단체나 부흥사들이 소리의 크기와 영성을 비례하다고 여기는 못된 생각이다. 우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마치 맞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불신앙의 표본을 보여주는 말이다. 결코 성경에는 소리의 크기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조용히,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다. 결코 예수님은 요란한 부흥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주관적으로 행동하다가 결국에는 성도들의 감성을 가지고 장난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찬송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찬송을 그저 찬송일 뿐이요, 때문에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불러야 한다. 사실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하게 찬송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찬송을 많이 하되 그것은 오직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끝없이 송축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거듭 강조한다. 그 찬송의 내용이 통회하는 것이든 간구 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 행하심을 높이는 것이든 그 형식에 상관없이 찬송하는 목적만큼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 우리 주변에는 흥분 상태와 성령 충만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특히 찬양인도자들, 예배 인도자들, 목사님들, 성가대원들, 지휘자들… 이들이 찬양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기도해야 합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찬송이 잘못 이해되는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성가대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무슨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해서 말하기를 좋아 한다. 만약 한 곳이라도 틀리는 날에는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쒔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아마 그 장로님은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보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많은 성가대원들 자신이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이 끝난 후 성도들이 아멘으로 힘차가 화답한다면 흐뭇해하고, 별 반응이 없으면 속으로 "에이, 오늘도 죽 쑤었구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즉, 성도들을 의식하며 선곡했고 또한 그런 자세로 불렀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젊은이들을 보자. 그들은 대개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한다. 즉, 찬송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다는 차원에서 선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를 위해 선곡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어떤 찬송을 받고 싶어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송이 예물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뜻 없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내가 어느 날 어느 모임에서 찬양 인도를 할 때이다. "함께 주님을 찬양합시다. <목마른 사슴이>를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니까 한 청년이 손을 들고 대뜸 말합니다. "전도사님 그 찬양 이제 그만 좀 부릅시다. 너무 불러서 지겹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했다. "자매님, 찬송은 자매님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약과이다. 심지어 일부 찬양 사역자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경쾌한 곡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000을 불러 드리겠습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삼류 가수들의 흉내나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부른단 말인가? 이 순간 하나님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계실까? 이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인의 정서와 예배 분위기를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인식해 온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찬송에 대한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올바른 사역자들이 세워져서 올바른 마음으로 찬양을 부르는 곳이 확산됨을 감사드리지만, 아직도 더 많은 곳에서 찬양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

 

"도대체 왜 찬송이 예물이란 것입니까? 왜 침을 튀겨가며 많은 사람들, 리더들을 공격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저와 함께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2. 찬송은 성도의 의무”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찬송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울러 그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찬송 받기를 기뻐하고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주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찬송이다. 여러분이 동의하든 안하든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며 진실이다. 내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해도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찬송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라 주의 보자 앞에 피어나는 향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떠올리는 "다윗"을 보자. 성경 인물 가운데 다윗은 찬송의 대표주자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지은 시편의 대부분은 찬송이 아닌 것이 없다.

시편 69편 30,31절을 보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온전한 자신의 찬송이 살아있는 가축을 예물로 드림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찬송이 예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음을 증거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신약 히브리서 13장 15절을 보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이는 찬송이 예배의 기본이 됨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끝으로 계시록 5장 12절 말씀을 보자.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어린양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차송은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찬송을 찬송 이외의 목적을 위해 부르지 마시길 바란다. 찬송은 그것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오직 삼위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당한 소중한 예물이다.

 

4. 찬송은 복음의 나팔.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 찬송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찬송의 수평적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앞에서 누누이 정의했지만, 우리가 찬송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어떤 사람은 찬송의 수평적 의미를 찾아보자는 말에 찬송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찬송하는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되 그 과정에서 발생 되는 몇 가지 현상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 첫째로, 우리는 찬송에 담긴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선교의 열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구나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많은 소리를 듣게 된다. 물론 그 소리 가운데는 유익을 주는 어떤 음악이나 새로운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단순 소음으로 괴롭힘을 주는 공해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찬송도 그 가운데 하나의 소리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모든 찬송이 소리로 표현된다. 아울러 소리로 표현된 찬송은 그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그 울림 반경 내에 있는 사람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게 된다. 바로 여기에 찬송의 선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오늘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잠시 휴식을 하는 가운데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사람의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고 아울러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다가 찬송이 계속되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차츰 찬송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찬송의 내용이 무엇인가? 말씀 그 자체를 선율로 담았거나 아니면 복음적인 고백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찬송은 복음이거나 복음의 해설처럼 들리게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오늘 그들이 들은 소리는 결코 예사로운 소리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들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들의 심령에서 역사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생활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가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기억되다 이내 사라지는 것에 비해 찬송에 담긴 복음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결코 그대로 소멸되지 않고 그 소리를 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갈아엎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 자신들이 말씀을 통해 새롭게 된 것 같이 우리 주변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통해 복음을 듣고 이미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찬양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특히 감사했던 것은 찬송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들의 간증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군복무 시절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교회에 발을 들여 났었다는 어는 형제의 고백, 예수를 전혀 모르는데 누군가가 선물로 보내준 성가 테이프를 무심코 듣다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 등 우리가 드리는 찬송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매주 수요일, 금요일 학교 쉬는 날 1시간씩 전철역 입구에서 찬양을 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그렇게 하였다. 어느 날 한 신사분이 찬양하는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양을 다 드린 후 짐을 정리하는데 다가오시더니 저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그분은 과거 열심히 주님을 믿고 교회를 따르던 집사님이었는데 교회의 관계의 실족으로 주님을 버리고 세상에 몸을 맡겼다고 했다. 내가 찬양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분의 귀에 찬양을 들리게 하셨고 주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하심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노원역 7호선과 4호선 교차 통로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곳에는 다리가 없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분이 계셨는데. 그날은 그분이 엉엉 울고 계시는 것이었다. 찬양을 하다 그분을 본 저는 깜짝 놀라서 찬양을 멈추고 어디 많이 아프시냐고 물었다. 제 찬양의 가사를 반복해서 듣다가 그 가사의 내용이 자신을 찌르고, 위로하고, 사랑이 그리워서 울고 있다고 했다. 그분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평안을 빌어주고, 명함을 전해주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였다. 지하철 곳곳에는 찬양하기 좋은 공간이 많이 있다. 지하철을 타고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어디서든 내려서 좋은 장소를 찾아 찬양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기타를 가지고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찬양하다 보면 관심을 갖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제 찬양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들에게 제 명함을 드리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하시라고 한다. 또 저희 카페를 소개하며 언제든 꼭 한번 놀러 오시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찬송의 수평적 의미는 육신의 한계 즉, 상황을 초월하여 부르는 찬송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좋은 예를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선교 여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국에 있는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오클레소프 장군이 이끄는 조지아 주 이민단의 소속 목사로 1735년 10월 중순 시몬드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인해 요한 웨슬리 자신 뿐 아니라 선원들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의 소리가 있었다. 바로 함께 승선하고 있는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의 평안에 넘치는 찬송의 소리는 선교사라고 뽐냈던 요한 웨슬리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의 체험을 '오늘은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날 중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날' 이라고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사건인가? 배가 거의 침몰해 가는 상황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이 뱃전에 둘러앉아 찬송했던 것은 결코 웨슬리에게 감동을 주고자 함이 아이었다. 반석이 되신 주님께 영혼의 닻을 내라고 그의 영광을 찬송함이 그 순간 그들의 목적 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동기는 그랬는데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날 보았던 그 놀라운 현상은 한줄기 빛이 되어 그의 가슴에 남았고 결국 그 빛은 2년간의 조지아 주 사역을 쓰라린 패배로 장식하고 본국에 돌아갔던 그를 올더스케이트에서의 성령 체험으로 이끈 한 줄기 서광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우리는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신은 아마 빌립보 감옥 하면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로 무고하게 매를 맞고 투옥된 바울과 실라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입니다. 자, 그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2000여 년 전이니까 그 감옥 안의 모습은 지금 교도소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6장 23절에 보니까 많이 때린 후 가뒀다고 했다. 발에는 차꼬를 채우기까지 했다.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굶주리기까지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라! 그런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중쯤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다. 죄수들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비웃었을 것이다.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불의한 일의 대가로 자신들은 감옥에 들어왔지만 그래도 원망과 저주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아무 죄도 없이 매를 맞고 갇히게 된 그들이야 어서 풀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울부짖는 것이 당연하겠거늘, 전혀 그런 항변 없이 오히려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있으니 어찌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미쳤다고만 생각했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다. 왜냐하면 상황에 굴하지 않고 찬송하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그들 중 일부에게는 심한 영적 문제로 도전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저주가,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찬송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찬송하는 그들을 모두 미친 사람으로만 생각하겠냐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나의 희망사항일 뿐일지라도 나는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아하, 예수쟁이들은 역시 다르구나! 보아하니 억지로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평소에 떠들어 대기를 기쁨, 소망, 감사, 평안 그런 것들이 모두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구나…."

그렇다면 그날의 사건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자신들이 수없이 외쳤던 복음을 확증해 보이는 것이요, 듣는 이들에게는 단편적으로나마 들었던 복음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입니다. 저는 90년 3월 27일 입대해서 석 달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27사단 '이기자'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그곳은 훈련사단으로 행군으로 힘들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더구나 저는 81mm 중화기 중대에 속해서 행군할 때마다 무거운 포를 어깨에 메고 다녀야 했다.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문뜩 행군할 때마다 버릇이 하나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들릴 듯 말듯 찬양을 하면서 행군을 하면 힘도 별로 안 드는 것 같고 행군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행군할 때마다 흥얼거렸다. 그러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늘 옆에 같이 걷던 고참병이 넌지시 제가 물었다.

"김 이병. 너는 행군이 힘들지도 않나? 무슨 노래를 그리 흥얼거리면서 행군을 하나? 힘이 남아도나 보지?"

"네, 힘이 남아서 부르는 게 아니고 이 노래를 부르면 힘이 납니다. 그래서 늘 부릅니다!"

"이 사람아 그럼 혼자 부르지 말고 같이 부르자고. 좀 배우게 크게 불러봐!!"

"네! 알았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이렇게 해서 우리 소대는 행군할 때마다 찬양을 부르며 하게 되었다. 훗날 이것이 우리 소대가가 되었다. 소대원들은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른 체 신나게 따라 불렀다. 주님을 모르는 자들을 통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도 20명의 청년들의 행군나팔로~~ 전혀 내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난 단지 찬양을 부르며 행군하면 즐거웠을 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었던 것 같다. 내가 상병쯤 되었을 때 난 군종이 되었고 마침내 우리 소대 전원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소대원이 모두 교회에 나오는 날. 예배시간 특송 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이 외치세~ 주의 이름높여~ 다 찬양하라~"

나는 단연코 이 복음의 시작이 제가 이등병 때 행군하면서 불렀던 그 찬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 빌립보 감옥 같은 억울한 상황, 군대 행군과도 같은 힘든 상황에 가로 놓일 때가 자주 있다. 진학, 취직, 사업, 가정, 건강 등의 문제로 인해서,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가 외쳐온 복음의 능력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나가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결국 바울과 실라처럼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예전처럼 찬송하면 자신의 믿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 확증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그가 외친 모든 것이 허상임을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찬송의 선교적 의미는 크고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인 반면에 그동안 수없이 외쳐왔던 복음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는 실험이기도 하다.

 

5. 찬양과 하나님의 나라

이쯤에서 내가 따로 정리하였던 찬양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기에 부를 수 있는 의무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찬양 중에 거하시며 경배 속에 그 보좌를 세우시고 좌정하신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이 나타나고 그 통치가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아니 세계 교회 안에 찬양과 경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통치가 세계 곳곳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과 그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이 전쟁에 임할 준비를 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을 군사로 부르셨다. 선한 싸움을 알리는 출전 나팔은 이미 높이 울렸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응답하여 주님 앞에 나와 찬양과 경배를 드림으로써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영적 싸움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찬양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 백성들의 예배하는 삶으로 이루어진다. 모두가 알듯이 국가의 구성 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그 국민은 예수를 믿는 우리이다. 그리고 영토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한 곳, 즉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인격, 모임,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의 인정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반응(찬양, 경배, 순종의 삶)이 일어나는 곳을 가리킨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우리 안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전인격이 주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 나라 안에 들어가게 된다. 찬양의 원어인 "할랄"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의 감격적인 반응을 말한다. 특히 할랄의 한 형태인 "할렐루야"는 그 반응의 절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강하게 느껴질 때 거의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며 하나님의 현존과 그 능력 앞에서 솟구치는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의 외침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강렬히 의식되어 그 놀라움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 안에서 분출되는 소리가 바로 이 "할렐루야"이다. "할렐루야"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대한 반응의 절정이다. 시편 가운데 이 "할렐루야"가 자주 사용된 시편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 구원과 심판, 인도와 그 권세, 권능, 사랑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인 150편은 온통 "할랄"로 가득 차있고 "할렐루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있다.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할 때 당연히 그리고 언제나, 영원히 일어나야 할 반응, 그것이 바로 "할렐루야"인 것이다.

 

찬양과 증거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 된다. 존경하는 분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 분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보고 듣는 데서 그의 훌륭한 점을 자랑할 수도 있다. 특히, 나중의 경우는 굉장한 반응이 일어나 파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찬사를 듣고 그 분의 존재와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든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함께 찬사를 나눈다든지 하는 멋진 광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듣고 기뻐하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듣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증거 되고 선포되는 것이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어떤 사람이나 취미에 대해 우리가 흥분하기까지 하면서 관심을 보이고 자랑하면 지켜보던 사람들도 역시 같은 흥미를 느끼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난 감격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고백하여 찬양한다면, 우리를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때론 바보짓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찬양과 영적 전쟁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찬양은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역대하 20장에서 야하시엘은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선포한 것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것을 모르고 우리 뜻대로, 우리 힘으로 싸우려 하면 승리할 수 없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주님의 '주권'을 그 전쟁에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은 바로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누구를 지휘관으로 삼아야 하는지, 누구의 작전에 의지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이름이다. 우리가 주님 아래,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면 이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영적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문제이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유다 백성들은 예배로써 전쟁을 준비했고 찬양으로 싸워 이겼다. 예배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고 응답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리고 주께 감사 찬양을 함으로써 승리를 맛보았다.

 

반대로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요인들이 있다. 우선, 죄를 들 수 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여호수아 7장은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점령한 이스라엘이 조그마한 아이성을 치다가 실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아간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가로챈 것이 발각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그들은 아이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무지도 패배로 이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울부짖는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 지식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그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상)"라고 했다.

또한, 불신과 그에 따른 두려움, 염려, 자포자기 등도 패배를 부른다. 열왕기하 6장에는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사로잡기 위해 그가 있던 도단성을 포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엘리사의 사환은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며 두려워하였는데, 엘리사의 기도로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고난 후에는 담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세계 최강의 "하나님의 군대"를 앞에 두고 적에게 항복 할 뻔 했지 않았는가? 예배자는 어느 상황에서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을 바라보는 눈을 열게 된다. 승리의 용사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보는 눈을 말이다.

사무엘상 4장에는 이스라엘의 치욕적인 패배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제사장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였고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여 사람들이 가져온 제물을 빼앗아 제 마음대로 처리했다. 그러던 어느날 블레셋이 공격해 왔고, 이스라엘은 첫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법궤를 가져 왔어도 그들은 전쟁에서 지고 법궤마저 빼앗겼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 들을 떠나 버린 것이다. 제사의 핵심, 즉 하나님과의 만남을 멸시한다면 우리 가 아무리 종교적인 형식을 갖추어도 영적 전쟁에 서 패할 수밖에 없다. 승리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서울신학교 이선우 교수

 

6. 찬송은 서원과 결단의 고백.

자, 이제 찬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마지막 정의를 내려야 할 순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찬송이 문자적인 해석에서부터 수평적 의미까지 상당히 포괄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매일 부르고 내 평생 불러야 할 이 노래가 내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정리하고자 한다. 그 답이 바로 이번 장의 주제이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정말 대단하다. 대게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요, 뜨거운 선교의 열정에서 작시, 작곡되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대문에 찬송을 하다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찬송을 많이 하다 보면 그 어떤 상황보다도 더 감동적인 내용의 곡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를 돌아보아도 찬양할 때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찬송하는 소리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사도 바울이 수백만이요, 베드로, 야고보가 그렇게도 많은데 생활 속에서는 좀처럼 신앙의 거인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공략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 국민이 모두 잘살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목표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안 되니까 항상 애를 태우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2~3년 내에 1인당 국민 소들을 3만 달러 이상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또 다른 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아파트 분양가를 지금의 절반 시세로 낮추도록 하겠다고 큰 소리 친다. 그러나 이 모든 공약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정치가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댄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성도인 우리가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비난할 만한 도덕, 윤리, 믿음의 신의를 과연 지키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과연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우리는 분명 찬송이 예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지요. 모두가 다 기억해 둘 신앙의 고백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들 입술에 있는 찬송과 우리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는가 말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들의 행위를 보실 때 과연 찬송으로 여길 만한 삶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수준의 인간들을 잠시 기만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너무 많이 기만했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 왔기 때문입니다. 혹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잇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몇 곡이 찬송을 예로 들어 봅시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찬송가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이 찬송은 청소년층 보다 장년들이 더 많이 부르는 곡이다. 설령 입이 만 개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입으로 죄를 짓거나 망령을 부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찬송하는데 쓰겠다는 사랑의 고백이다. 그런데 오늘 하루 우리들의 입술에서는 과연 찬송이 얼마나 있었을까? 만 개는 그렇다 치고라도 한 입을 가지고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덕을 세우기보다는 저속한 언어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더럽혔는가? 돌이켜 보시길 바란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이다. 이 시대에 활자화된 말씀이 없었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 성경에 대한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고 아울러 말씀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찬송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달고 오묘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성경읽기를 싫어하는지 저는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 자신이 마치 방송 모니터라도 되는 듯 TV는 매일 일삼아 보면서 성경 한 장 읽지 않고 하루해를 보내는 주부들이 그 얼마며, 신문은 그토록 즐겨 읽으면서도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지 않은 채 한 주간을 보내는 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우리가 매일 신문을 읽듯이 성경을 보면 한 달에 성경을 1독을 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백성들을 어리석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 성도들의 심령을 흐리게 하는 스포츠 신문의 크리스천 독자들이 그 신문을 거부하고 그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닌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달라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한국교회 성도들을 보면, 예배는 비교적 열심인데 정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힘이 없고 깊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오는 성도들에게 늘 권면 합니다. "제발, 기본적으로 성경 3독만이라도 하십시오." "제발, 하루에 한 구절씩은 암송해 보세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기 나이만큼은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이 만큼이라는 말에 미리 겁먹지 말라. TV시청 시간을 대폭 줄이고 잡스런 글을 읽지 않으며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면 충분하다. 저는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난 후 처음 3년간은 매년 3독 이상씩 성경을 읽었다. 나의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후 매면 1독 이상씩 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시편 119편의 내용처럼 믿음과 지혜와 영감의 근원이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이탈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사실 예배드리는 것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배당 건물의 대형화에 비해 저녁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저녁예배 자체를 포기하고 성도들의 편의에 따라 오후에 예배를 드린다. 어는 주일 낮 예배에 오천 명 모인다고 자랑하는 교회의 저녁예배나 오후예배 때는 그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것을 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노래하면서도 세상 일락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영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몇 년 전 내가 대구의 어는 교회 청년회 지도교사로 있을 때이다. 마침 연말이 되어 그 다음 해의 임원 선출을 위해 청년들이 모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서로 임원을 하지 않겠노라고 발뺌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보다 못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찬송을 서너 번 반복해서 부르게 했습니다. 이윽고 찬송이 끝난 후 임원으로 권유받았던 몇몇 청년들에게 물었다. "이 찬송을 부른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 은혜롭습니다. 언제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나가 고함을 질렀다. "이런 양심에 화인 맞은 인간들! 지금 당신들이 뭐라고 고백한지 아십니까? 내 평생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일 하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서 청년회 임원을 하지 않겠다니 주님을 우롱해도 유분수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들이란 말입니까?" 혹시 당신은 그런 경험이 없는가? 주님의 일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노래하고서도 항상 뒷전에서 맴돌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마지막으로 국민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찬송가 323장을 보겠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주님의 두 가지 표정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감격의 표정. 또 하나는 슬픔의 표정이다. 왜냐하면 사실 어느 찬송인들 주님이 귀하게 여기지 않겠냐만 특별히 이 찬송은 그 헌신의 깊이가 더 하고 사랑의 농도가 진해 이 곡을 부르는 내 자신의 가슴도 뜨겁거늘 하물며 그것을 듣는 주님의 마음이야 오죽 하시겠는가? 이거야말로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었던 고백이요, 주를 위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린 베드로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국 성도들은 이 찬송을 모두 즐겨 부르고 있다. 아마 한국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 베스트 10곡을 뽑으라면 이 찬송은 언제나 그 순위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찬송은 찬송하는 그 순간만큼은 한국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사도 바울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셈이다. 그러니 주님이 기뻐하시다가 이내 슬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IV. 본론-②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지금까지 차분히 내 글을 읽어왔다면, 찬송을 단순히 신앙인의 정서를 위한 노래 정도로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내 이야기가 아마 큰 충격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 번째는 더 진지해고 신중하게 찬양을 대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반면 아예 입을 열지도 않는 분도 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제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뿌려졌다는 징표인데, 그로 인해 영적 몸살을 앓고 잇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찬송에 대한 인식이 매우 새로워 졌으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이제는 찬송하기가 약간 겁도 날 것이고, 한 편으로 한 가지 매우 큰 의문이 생겼을 것이다. 바로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이 생긴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제 이야기를 듣고 이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 글을 쓰게 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똑바로 알고 똑바로 나를 찬양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글에 심으신 목적인 것이다. 찬송을 새롭게 알게 된 당신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궁금하게 여기도록 하신 이는 바로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 할렐루야!

그래서 지금 부터는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내가 찬송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을 때 나에게도 동일한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송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찬송은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네, 배에다 힘을 주고 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부르십시오." 저의 질문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잘 아는 교회음악과 교수한테 다시 자문을 구했다. "교수님 어떻게 하면 찬송을 찬송답게 할 수 있을까요?" "어깨와 턱의 힘을 빼고 입을 타원형으로 벌려서…." 목사님과 교회음악과 교수의 한심스러운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문득 식성에 전혀 맞지 않은 반찬 때문에 식사 시간마다 곤욕을 겪어야 했던 지난 하숙생활이 떠올랐다.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들의 입에서 전혀 엉뚱한 소리만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금 그 방법을 알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수많은 밤을 새웠다. 어디서, 누군가에게 배울 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성경보고를 끝도 없이 했던 기억이 난다. 흔히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말을 아주 쉽게 그리고 또 자주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방법을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 때문에 목적은 좋은데 과정이 좋지 않고 그 열매 또한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이 내 삶의 가늠자가 되고 때로는 브레이크가 되어 범사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고 세속의 유혹을 단절시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찬양집회, 세미나, 부흥회, 집회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에 항상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이것이 찬송으로서 가치가 있습니까? 이번 집회 때 이 곡으로 찬송하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기뻐하실까요?" 왜냐하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한 일이 아버지께 상달되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찬송이 그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결과로 끝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찬송하기를 원하시는 걸까? 그것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내가 겪었던 찬양사역의 함정에 대해 잠시 집고 가도록 하자.

 

1. 찬양사역의 함정과 극복

인간적인 함정

찬양 사역에 있어서 가장 먼저 찾아오는 함정은 모든 이들이 겪는 인간적인 함정이다. 이 함정은 우리가 인간일 수밖에 없기에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다.

첫째로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찬양 사역을 하면서 우리는 '자기의 생각에 따라 오늘 집회가 잘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관중들의 반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관중들의 반응에 따라 그 날 집회의 성패를 판단할 수 없는 없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순회 집회를 해보면 지역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충청도 지역은 반응이 다른 곳보다 덜 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덜 한 것은 아니다. 찬양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참으로 그분을 의지하며 시작했다면 집회가 끝난 뒤에도 '집회가 잘 되었나 못 되었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만족에도 도취되지 말고 관중의 반응에도 휩쓸리지 말아야하며, 믿음으로 찬양 사역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연예인들처럼 항상 대중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찬양을 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또 하나는 인기라는 함정이 있다. 사람들이 '나의 찬양 사역'에 대해 칭찬하게 되면 나는 '내가 모든 것이 괜찮은 사람'인 양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칭찬은 찬양사역자에겐 독배와도 같다. 그들은 나의 짧은 1시간 정도의 찬양하는 모습으로 판단할 뿐이다. 우리는 항상 부족한 우리를 도구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서 항상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수 있어야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바로 그가 비교 의식에서 탈피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엑스트라로 소품으로 여기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될 때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 의 엑스트라만으로 기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이 질문을 동반한 찬양 사역을 하여야 할 것이다.

사업주의화 되는 경향도 찬양 사역자들의 위험한 함정이 되고 있다. 사역의 범위가 커지면서 음반을 내게 되고 문서를 내게 되면, 찬양 사역은 또한 하나님을 기준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으로만 흐르게 되는 경향으로 흐를 수가 있다. 우리는 찬양 사역의 기준과 중심을 '나'에게 두어서도, '반응자들'에게 두어서도 안 되며 오직 '하나님'께만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 에 민감해야 되겠는데, 이것은 다른 방법이 없고 사역자들의 평소의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찬양 사역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찬양은 '올린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감정에 들뜨기 쉬운 점이 있다. 그렇기에 찬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분께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정의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찬양은 '말씀'과 함께하지 않으면 방향성을 잃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신비로운 현상을 말씀의 기초위에 세우지 않고 행하기 때문에 방향성 없이 마구 빗나가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없으면 '신비주의 찬양'이 되어 버린다. 반면에 찬양과 말씀이 연결될 때에는 커다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찬양 사역자인 우리의 하는 '일'보다 우리 '자신'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찬양 사역자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정립되어 지지 않으면 우리는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찬양 사역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성숙된 만큼 표현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을 표현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으신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항상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내 그릇에 합당한 찬양을 하고 있는가?"

 

 

영성이 이끄는 찬양

지금부터는 찬양의 적극적인 도전에 대해 말할 것이다. 진정한 영성이 세상문화의 경쟁력이다. 매스미디어 산업과 포스트 모던이즘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독교 음악도 이젠 그 빛을 드러내며 해가 갈수록 수많은 창작 복음성가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교회와 예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조금씩 도입하면서 기독교 문화의 발 빠른 도약이 눈에 보이도록 변화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 찬양문화는 한국교회와 예배의 한 기준을 세우며 많은 찬양 사역자들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이렇게 홍수처럼 범람하는 찬양의 물결 속에 진정한 영성이 살아있는 찬양을 만들고 또한 영성 있는 찬양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솔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시대의 예배를 리더 하는 예배인도자나 CCM 사역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예배현장에 서있지만 진정한 영성이 이끄는 예배인도와 찬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현실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사역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역을 위한 찬양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향한 자신의 예배를 위한 찬양인가? 하는 유치하지만 솔직한 질문을 해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 1).”

우리는 영적 예배에 대한 깊은 의미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제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뛰어난 실력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오직 우리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제사(예배)로 드려질 거룩한 예배 자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우리를 상당한 착각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예배자의 순수한 찬양 자체보다는 상품으로 포장된 그들만의 브랜드로 사역자들의 값을 평가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 장비로 음악을 만들었느냐, 실력 있는 연주가의 반주와 리코딩을 빌미로 삼아 찬양 사역자들의 수준과 값어치를 정해 버렸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역을 위한 테크닉 보다 영성을 살려야한다. 물론 세상문화와의 경쟁력을 갖추려면 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 좋은 음향장비와 사역자의 테크닉도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자로서, 실력이나 테크닉이 이끄는 찬양은 예배의 본질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반드시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겸손히 무릎 꿇는 기도와 영성으로 찬양문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찬양사역 자로서 가끔은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옥중에서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생각하게 된다(행 16:25-34). 이들은 캄캄한 옥중에서 손과 발이 묶여있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찬양한 이들에게 홀연히 큰 지진과 함께 옥토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린 기적의 사건을 체험케 한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과 고가의 음향장비 그리고 찬양의 테크닉이 아닌 그들의 영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이 이끄는 찬양과 기도로 그곳에 준비된 영혼을 구원하는 결실을 낳았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해야할까? 사단의 문화에 빼앗긴 찬양의 도구와 본질을 되찾아 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찬양해야 할 우리의 본질은 바로 영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요즘 찬양신문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언론, 방송에서 역량 있는 신인 사역자 발굴을 위한 각종 대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동안 국내 찬양문화를 이끌고 온 많은 사역자들이 바로 이런 대회들을 통해 발굴되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대회를 통해 찬양사역을 시작하는 분들이나 현재 필드에서 사역하는 동역 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 가 있다면 화려한 상품으로 포장된 노래는 흘러가는 유행가처럼 늘 새로운 노래만 추구하는 자기욕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 영성의 옷을 입고 외치는 찬양은 부르면 다시 부르고 싶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목말라 하고 보고도 또 보고 싶은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역이 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영성은 세상문화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2. 찬양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가끔씩 받는 황당한 질문 중에 하나이다. 차라리 ‘천당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물으면, 자신 있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됩니다!’ 라고 답을 해줄 수 있지만 어떻게 하면 찬양을 잘 할 수 있느냐고 들이대는 질문에는 그야말로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운전기사는 운전을 잘 해야 하고, 요리사는 요리를 잘 해야 하듯이,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잘해야 하는 몇 가지 전공필수(?) 과목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찬양이다.

본시,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달리 음악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음악의 종교인지라, 찬양을 잘 하지 못하면, 참으로 예수 믿기 힘들고, 두고두고 평생 고생이며, 심지어 교회 내에서 사역 지를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는 전도사니들의 한숨을 접하며, 찬양을 잘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기도도 잘 해야 하고, 전도도 잘 해야 하며, 헌금도 최선을 다해 바쳐야 하고, 헌신봉사도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는 현세에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고 천국 가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찬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얼마나 찬양 받기를 좋아하시는지, 죽어 천국 가서도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영원히 해야 하는 것이기에, 찬양의 소중함과 당위성, 찬양의 우선순위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교과목 중에 단연코 전공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최고의 과목이 바로 찬양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찬양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 칼로 무 쪼개듯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 하면, 찬양을 잘 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 조건만을 충족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실로 여러 가지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 변수라는 것들도 무슨 과학이나 수학으로 측정 가능한 simple & clear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정과 마인드만 있으면 누구라도 즉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도, 헌금, 전도, 헌신, 봉사 등의 여타 항목과는 달리, 찬양이라는 놈은 ‘음악’이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입고 있고 반드시 이 껍데기를 깨부수고 들어가야만, 안에 있는 맛있고 말랑말랑한 찬양의 속살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음악이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정복하고 깨부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며, 찬양에 어려움을 느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도, 실상은 이 음악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의 벽’이라는 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서 축하해 줄 때, 그냥 말로 ‘생일 축하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밋밋하고 썰렁하기 때문에, 거기에 곡조를 붙여서 ‘Happy Birthday to you~~’ 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말로 할 때보다 훨씬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어려움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너무도 많이 부르고 들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일 축하곡을 매번 다른 곡으로 불러줘야 한다면, 더욱이 완전 4부로 화음을 맞추어 매주 한 번씩 의무적으로 축하해 줘야 한다면, 그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이미 축하가 아니라 부담이며,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다시는 이런 생일축하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벽이다. 어차피 생일축하곡 이니만큼, 가사의 내용은 다 비슷비슷하지만, 어떤 곡조(음악)로 포장되었느냐에 따라, 쉽고 즐거운 축하곡이 될 수도 있고, 어렵고 짜증나는 기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음악의 벽을 넘지 못하면, 정작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인 메시지(가사의 내용)까지 죽어 버린다.

 

찬양도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옛날부터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곡조의 찬송가를 부를 때면 절로 감흥이 나며, 가사의 내용이 쏙쏙 머릿속에 들어 와 그야 말로 완전한 ‘나의 노래’가 됨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 까닭은, 이미 너무도 익숙한 곡조가 완전히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부르는 사람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가사만 얹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부르지 않던 생소한 찬송가를 부를 때는 그렇지 않다. 처음 듣는 곡조 배우랴, 박자 신경 쓰랴, 가사의 내용은 거의 관심 밖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신경 쓰고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같은 완벽한 multi-processing을 지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신경을 쓰다 보면 다른 한 쪽은 자연히 소홀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은, 곡조와 가사, 즉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만 완전한 찬양(기능적으로)을 할 수 있는데,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 보면,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유능한 사냥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직 곡조를 화려하게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소위 전공자들이나, 화려하고 감미로운 선율이나,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리듬에 중독되어 말초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일부 CCM 가수들, 또한 무분별하게 그것을 추종하는 개 교회 찬양 인도자들, 심지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사들도 곡조의 화려함에 묻혀 그냥 휩쓸려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반면에, 가사에만 심취하여 음정박자에 무관심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는 일부 나이 드신 노년층 어르신들, 수 십 년 동안 부른 찬송가의 음정박자를 아직도 틀리고 있거나 음악적인 오류나 잘못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부 목회자들, 이 모든 것들이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들이다. 만약, 두 마리 중에 어느 한 마리만 잡아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주저 없이 곡조를 버리고, 가사(내용)를 택해야 하겠지만 질서의 하나님, 음악의 하나님, 조화의 하나님께서 당연히 아름다운 선율이 덧입혀진 온전한 찬양을 더욱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찬양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때가 왔다. 곡조 없는 가사는, 앙꼬 없는 찐빵같이 무덤덤하고 맛이 없으며, 반대로, 가사 없는 곡조는, 그야말로 영혼 없는 몸과 같이, 전혀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기형적인 모양이 아니라 아름다운 곡조와, 영혼을 울리는 가사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새롭고 공교한(시 33:3) 찬양이라는 것이 명백한 이상 이 음악의 벽을 누가 먼저, 누가 빨리 정복하고, 가사의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느냐가 찬양을 잘 할 수 있는 관건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가장 먼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음악의 벽을 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음악 하면 부르르 치를 떠는 사람부터, 악보의 콩나물 대가리만 봐도 지끈거리며 두통을 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만 잡으면, 음악의 벽을 넘어 찬양을 잘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해법이 분명히 있으며 결코 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절대 절망할 필요까지는 없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는, 노래실력(가창력)을 키워야 한다.

이 말만 듣고, 벌써 ‘나는 안 돼~’ 라며 좌절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서의 노래 실력은, 가수 같은 프로급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래를 함께 따라 하며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정도면 되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노래를 못하는 음치(音癡)로 태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창력의 향상이 가능하다.

본래 음악적인 재능(음악성)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영향이 크다는 것이 음악계의 정설이나, 그러한 영향이 절대적인 상위 1~2%(음악천재) 및 하위 3%(음치)을 제외한 95%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은 자기의 노력과 개발 여하에 따라 상당 수준까지 음악성을 높일 수 있다. 음대에서 성악을 배운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호흡법과 발성법을 제대로 익히고, 음감(音感)을 기르는데 주력한다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창력을 키워 노래를 잘 할 수 있다. 여러분이 하위 3% 그룹에 속한 음치가 아니라면 ‘나는 노래를 못해’ 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변명이거나 거짓말이거나 음악적인 재능을 썩히고 있는 무관심한 부류일 것이다.

공짜 음악 선생님인 찬양단 리더나 성가대 지휘자를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라. 짧은 시간이지만 틈틈이 하는 훈련과 연습을 성실히 따라 해 보라. 악보를 빨리 읽을 수 있도록 시창연습을 많이 하시고, 개인연습이 힘들면, 최소한 정해진 정규 연습에 절대 빠지지 말라. 시간과 돈을 좀 더 투자한다면, 서점에서 얼마든지 음악의 기초이론이나 노래 잘하는 법을 설명한 좋은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러분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열심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보와 발전이 없다면. 연습 할 때마다 음정박자 못 잡고 자꾸 지휘자에게 지적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미안하지만 하위 3%의 음치그룹일 확률이 높다. 여러분은 주님의 뜻에 따라, 노래의 달란트를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찬양단 말고 다른 봉사를 찾아보라.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받지 못한 신유, 방언, 가르침 등의 은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교회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래도 창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나를 찾아오라!

1~2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노래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이제 음악의 벽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절대 착각하지 말 것은, 가창력을 키워 놓았다는 것은 음악의 벽을 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지, 결코 넘은 것이 아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기초체력을 튼튼히 다져 놓는 것이 선수로서의 기본 조건을 갖추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올림픽 메달을 위한 첫 걸음을 겨우 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가창력과는 별도로 많은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TV에 나오는 가수들을 볼 때마다 가끔씩 부러운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히트곡을 하나 만들어 내면 그 한 곡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엄청난 돈을 벌고, 운이 좋으면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부를 챙기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히트곡을 내기 위한 노력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교회의 찬양단은 그렇지 않다. 늘 새로운 곡을 성도들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다. 찬양단이 정말로 잘하는 몇 곡을 선정해, 매 주일 그 곡만을 부르며 찬양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생각해 보기도 한다. 매 주일 연습 때문에 마음 졸이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고, 매번 하는 곡이니 완성도도 놓고 실수할 염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찬양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이웃한 두 집에,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두 며느리가 있었다. 한 며느리는, 요리 솜씨는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요리법을 연구하고 배워서 날마다 새로운 요리를 온 가족에게 선보이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음식이 맵고 짜고 간도 안 맞고 태워먹기도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며 날이 갈수록 음식솜씨가 좋아지는 며느리를 보면서 시부모와 남편의 마음은 뿌듯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집 며느리는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자신 있는 한두 가지 요리만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온 가족에게 매일 그것만 먹였다. 바쁜 시간에도 그 요리라면 눈 감고도 후닥닥 만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맛이 좋으니 며느리의 요리솜씨를 칭찬하던 가족들도 매일 똑 같은 음식만 먹다 보니, 완전히 질려서 나중에는 안 먹게 되었다. 시부모는, 며느리가 뭔가 다른 음식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이러한 며느리를 좋아할 남편이나 시부모는 아무도 없다. 결국, 시부모의 눈 밖에 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메뉴도 이와 같다. 좀 부족해도, 좀 모자라도, 우리가 날마다 연습하고 노력하며 날마다 새로운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여삐 보시는 것이다. 자신 있게 잘 만드는 메뉴라고 해서 매일 그것만 내놓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식을 외면하시고 드시지 않는 날이 곧 올 것이며 심지어 완전히 하나님 눈 밖에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닥칠지도 모른다.

우리가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 주일 새로운 곡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찬양단의 숙명이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곡을 익힐 수가 없고, 곡(형식)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면, 가사(내용)는 더더욱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찬송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것.

지금까지 찬양의 기능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면 그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입버릇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대견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이 성숙한 고백을 하기까지 나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내적 갈등과 아픔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쉽게 고백하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내가 주님께 깨어지기까지의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 관료들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하는 것만큼도 사랑과 정성과 열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일하는 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혹시 표현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헌신하는 것을 뉘라서 감히 이러 쿵, 저러 쿵 평가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체들의 행실에 대해 우리가 서로 권면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합당한 자세와 그 기준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송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서로 권면하려고 한다. 다 같이 역대 상 16장 28,29절을 읽어보자.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는 분명히 찬송을 비롯한 모든 섬김의 기준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 이라는 것이다. 합당이라는 말의 뜻은 '딱 알맞다'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권위에 꼭 맞는 찬송과 헌신을 하라는 뜻이다.

옛날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가끔 흑백 TV를 통해 대통령의 해외 나들이 때에 행정부에서 주관하는 환송 및 환영 행사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대단했다. 심지어 김포공항에서부터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차량 한 대도 세워놓지 못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짓들이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나 아무튼 권위 좋아하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에게 큰 도전과 무언의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권위일망정 그것을 세워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며 명색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나의 불성실과 무책임한 모습이 너무나 초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다.

 

대중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찬송 중에 껌을 씹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데 옆 사람과 잡담이나 늘어놓는 사람, 매 주마다 등산복 차림으로 나와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들, 심지어 화장실에서나 신을법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사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님을 그저 인자하신, 좋으신, 편안한 하나님으로만 제한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최소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매너도 없이 하나님을 만왕의 왕 운운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성도들에게 찬송을 시켜놓고 설교 노트나 뒤적거리는 목사님들, 찬송 중에 히득거리며 지난 주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옆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철없는 어른들. 이 모두가 구약시대 같으면 아론의 두 아들들처럼 성소에서 불을 받아 죽어야 마땅한 모습들이 아니겠는가? 사실 찬송의 내용을 보면 대단하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독재자도 그 백성으로부터 이런 찬송은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최대의 존칭어, 최고의 수식어. 아! 그런데 찬송하는 그 모습이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을 송축하는 모습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 모습에서 부터 세상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게 되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요즘은 거의 모든 교회에 찬양단이 있다. 특히 요즘은 성가대가 없어지고 찬양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교회가 점점 늘어 가고 있다. 제가 부산 해운대쪽에 파송되어 갔을 때다. 이미 그 곳에는 찬양단이 있었다. 제법 규모가 있고 이름이 알려진 찬양단이었다. 다른 교회에 초청되어 가기도 하고 여러 번 자체 발표회도 하는 그런 찬양단이었다. 하지만, 그 찬양단에는 문제가 있었다. 미리 그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숙지했지만 그 문제로 인해서 그 교회서 내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담임 목사님이 발견한 그들의 문제는 차츰 그들이 외형적인 것, 의식적인 것, 의무적인 찬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오를 하고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가 기억납니다. 첫날 그들 앞에선 나에게 총무가 일어서더니 그 찬양단의 회칙 등을 말해주었다. 그 뜻은 자신들이 여지 것 해 왔던 전통에 따라 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듣고 연습을 마쳤다. 주일날이 되었다. 10시 50분 예배를 위해 10시까지 모두 모여 연습과 기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시가 되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조금 지나서야 세 명의 자매가 와서 주섬주섬 세팅을 하기 시작합니다. 10:20분이 되서야 마이크 세팅소리, 드럼 조율 소리, 스탠드를 이리 저리 옮기느라 분주했다. 20명의 찬양단원이 준비가 되었을 때는 10:40분이었습니다. 결국 기도도, 준비도, 연습도 없이 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배 끝나는 시간까지 실수도 없이 무사히(?) 아름답게 찬양단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었다. 많은 분들도 찬양에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이런 일이 한 달간 반복 되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예배란 성도를 기쁘게 하는 것이 하니라 하나님을 창양하고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사님과 함께 울며 결단을 내렸다. 다음 주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예배가 진행되었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그 교회는 예배시간 내내 찬양단이 강대상 앞에 서 있었다.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지금 서있는 이 찬양단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해산합니다. 찬양단을 다시 구성하겠습니다. 기존의 찬양단원들도 찬양단이 되려고 하면 정해진 오디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술렁거렸다. 예배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우리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통쾌해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그렇게 만만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의 모든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그분이 흠향하실 것이라는 교만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분께 합당한 것들만이 그분께 드리워질 것이다. 그 후 그 교회는 찬양단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놀라운 회개의 부흥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교회에 제대로 된 예배를 원하셨으면 타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나를 그곳으로 불러 자그마한 발화점을 삼으시고 교회를 갈아 엎으셨겠는가? 그 때 그 사건은 지금도 부산지역에선 회자되는 큰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그 교회를 하나하나 조각내셨고 그 후 회개하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더욱 넉넉히 축복해주셨다. 6개월이 지난 후 내가 그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또 다른 곳으로 파송되어 질 때에 그들의 배웅하는 그 모습들은 나를 맞이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대부분 예배시간에 늦거나, 연습 시간의 늦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첫째가 바로 교통체증이다. 차가 연착 되었다느니, 도로가 미끄러워 막혔다느니…. 여러분 차가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인가? 요즘은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서 지하철을 이용하면 절대로 늦을 이유가 없다. 제가 15년 동안 찬양 사역을 하고 있지만, 교통사고를 당했던 적과 철원의 군부대에 방문할 대 검열 문제로 지체되었던 단 두 번의 경우 외에 집회에 늦은 적이 없다. 수많은 교회와 집회 장소를 다녔지만 지각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의무이며, 마음에 소원을 품고 기다리는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미 코리안 타임이란 말은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만큼은 코리안 타임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왜 이렇게 둔감할까? 코리안 타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두 번째 이유는 밥 때문이다. 아침밥이 늦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 후 점심식사를 대접한다. 아침 한 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 우유 한 잔만으로도 가능하다. 오히려 아침을 먹지 않는 것이 오전에 찬양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매번 굶으라는 것이 아니다. 아침밥이 매번 지각하는데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까지 것 굶고 온전히 예배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계란 프라이 한 개와 우유 한통 후딱 먹고 집을 나서시길 바란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들지 말자. 대통령이 만찬을 베풀어 놓고 신하들을 기다리고 있다면 그 모습이 과연 얼마나 우습겠는가? 하찮은 세상 관료들도 면담 시간에 제대로 맞춰가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거늘 하물며 우리의 입으로 만 왕의 왕이라고 찬송하는 하나님을 이렇게 홀대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흔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명자"라고 부른다. 사실 목사나 선교사만을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명자로 세우셨다. 그렇다면 이 사명자라는 명칭의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일까? 한문으로 사용할 사(使)에 목숨 명(命)을 썼는데 이는 곧 "목숨을 걸고 일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육신의 생명을 소멸하면서 주의 일을 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기능을 팔면 되고 시간을 할애하면 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의 차원은 그렇지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주의 일은 마치 여가를 즐기듯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름 앞에 사명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했다. 충성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충성을 하려면 목숨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현재 교회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질문이다. 다음 성경 구절을 함께 읽어보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이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 하겠는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 1:8)”

이제 제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자. 입으로만 왕이라고 부르지 말자. 입으로만 주의 영광 위해서라고 떠들어 대지 말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제발 예수님의 탄식을 이제 멈추게 하자!

 

4. 찬송은 감사함으로 하는 것

예림찬양단을 처음 조직할 때에 많은 질문을 메일로, 전화로, 댓글로 받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질문은 "찬양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였다. 즉, 오디션의 첫 번째 관문이 무엇이냐는 말이었다. 그래서 저는 평소의 제 소신을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저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고 있는가를 제일 먼저 확인해 봅니다."

사실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동역 관계를 맺어오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라면 주의 사역은 오직 감사함으로만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역자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 많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 첫째 덕목으로 “감사함”을 손꼽는다.

흔히 찬양 사역은 재능이 뛰어나면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십중팔구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이 땅 위에서 꼭 받으려고 한다. 물론 그 재능이 그 사람의 생활 방편임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일날의 헌신까지도 수입원의 하나로 여긴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는 어떤가? 사례비를 흥정하면서 내가 얼마짜리니 하면서 다니는 사이비 사역자들도 많이 발견하게 되다. 나중에 무슨 상을 받으려고 그러는지 참으로 걱정이다. 아니, 무슨 책망을 받으려고 저러고들 다니는지 심히 걱정되고 안타깝다.

그런가 하면 주의 일은 열심만 있으면 누구나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감사함이 전제되지 않은 열심은 대개 자기의 의를 세우기에 급급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뭔가를 하고 있고 또 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하는 경우이다. 과거 내가 젊은 시절에 이러한 함정에 자주 빠지곤 했다. 그런 사람들의 열심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십상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대부분 리더에게 오히려 근심을 끼친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에서나 전도 잘 하고 헌신 잘 하는 사람은 재능이나 열심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속에 감사의 샘물이 넘쳐나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르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한다. 감사함으로 하는 헌신은 이처럼 하나님도 기뻐하시거니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 좋게 하는 요인이 된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비단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도 감사해야 할 조건이 너무나 많다. 나는 어린 시절을 참 가난하게 지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완전히 흰 쌀밥은 1년에 다섯 번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추석, 설날, 대보름날, 아버지 생일, 내 생일날이 바로 그날들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유일한 소망은 제발 쌀밥 좀 실컷 먹어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먹는 것을 가지고는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음식을 버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좋아졌는가? 어느 시대에나 상대적인 빈곤은 있게 마련이기에 모두 다 똑같을 수만은 없지만 불과 20년 전과만 비교해 봐도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는가 말이다. 거기다 우리는 생존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되었지 않는가? 그런데 오히려 그 때보다 웬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더욱 많은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을 풍성히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힘들 때 일수록 과거의 고통에서 지금껏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예배하며 잠잠히 주님의 사역에 동참해야할 때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대통령을 만나 뵈려면 접견표를 가슴에 달아야 하는 것처럼 주의 일을 위해 성소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라는 신분증에 감사라는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헌신의 표를 가슴에 달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가슴에는 과연 어떤 표가 달려 있을까?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 가운데서 마지못해 헌신하는 이 시대의 사명자들. 우리 모두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

이 말은 제발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자신의 재능이나 자신의 의지 때문이라고 뽐내지 말라는 말이 아닐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고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셨으니 나는 단지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생색을 낼 수가 있겠는가? 아울러 나를 위해 마지막 한 방울의 물과 피까지 다 쏟으신 주님 앞에서 내가 처한 환경,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토록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 세상 적으로 볼 때에야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남들은 어둠이 깔리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여관으로 향하여 자신의 쾌락을 쫒고 휴일만 되면 산과 바다로 줄행랑을 치는데 비록 시원찮게 보이는 신앙생활 이지만 그래도 믿는답시고 여름이라고 물놀이를 제대로 갈 수가 있나, 휴가는 교회 수련회에 맞추어 그 기간 동안 휴식이 아니라 봉사를 위해 다 쓰는 여러분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것이다.

 

우리가 비록 세상 즐거움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더 이상 일락을 좇아 살 수만은 없는 처지이고 보면 차라리 주님의 일이라도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해서 예수 믿는 즐거움, 사역하는 즐거움이나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보자고 스스로 위로 겸 다짐을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노래했는데 그와 같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 주변에 무수히 쌓여있는 은혜의 선물 축복의 보화를 우리는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럴 때 비로써 감사의 찬송이 터지고 아무 조건 없이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전심전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여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감사라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진정한 감사의 고백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 적어도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만큼은 되어야 한다. 하박국 3장 17,18절 말씀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5. 찬송은 전심으로 하는 것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면서 그 기준을 인류 성악가나 대중가요 가수들의 가창력에 두셨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여 찬송가를 폐기처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가창력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어느 수준을 요구하지도 않고, 아울러 아름답게 불러야만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할 때에 가창력 때문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내가 신학교를 다닐 때에 방과 후 공부로 "음치탈출"을 진행했었다. 당시 20명의 학생이 열심히 음치탈출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제가 그들에게 첫날 한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악기" 라는 말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운 목소리, 화려한 연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 그 자체, 주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울러 남보다 가창력이 좀 더 뛰어나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찬송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외형에 있지 않고 그 중심에 있으며 바로 그 열정의 농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어떤 찬송을 해왔을까? 혹시 겉모양은 그럴 듯한데 전심으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나 않았을까? 비록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나 제가 처음 이 사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찬송하는지 장송곡을 부르는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교회가 수 없이 많았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잘못된 보수 신앙관 때문입니다. 보수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칭 보수, 보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웬일인지 찬송하는 것만큼은 비 성서적으로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또한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찬송을 제법 찬송답게 하는 교회를 향하여 이단, 삼단 운운하던 시절이 불과 지금으로 부터 15여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도 다 오후예배를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던 방식 데로 '열린 예배'로 드리지 않는가? 어쩌면 그냥 형식만 따갔는지도 모른다. 철저한 회개와 반성 없이….

 

한번은 제가 어느 지방 도시에 찬송 세미나를 인도하러 갔을 때 일이다. 그 교회는 그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세를 자랑했고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교회였는데, 안내를 맡은 장로님의 입에서 계속해서 보수 타령뿐이었다. 그리고 최근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한 오르간 자랑이 대단했다. 과연 장로님이 자랑한데로 오르간 연주소리가 성전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천여 명의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 서두에 물었다.

“여러분은 모두 붕어들입니까? 왜 입은 벌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하나님이 과연 이 오르간 소리를 듣자고 이 전에 임하셨겠습니까? 생명 없는 이따위 악기에게 여러분의 사명을 위임해 버렸습니까?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보수, 보수 강조했는데 과연 이 모습이 보수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하는 보수는 똥물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교인들이 얼굴들이 급격히 홍조를 띠며, 진짜 똥물로 변해 갔다. 먼저 그 장로님은 씩씩대기까지 했다. 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일까? 천만이다. 아마 하나님은 통쾌해 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보수를 가장 불신앙이요, 아직도 중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심령 상태를 자가 진단하여 겉으로 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앞은 상처를 제가 건드렸으니 그들이 당황하고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우리의 근대사 속에서 우리 선배들은 일제치하와 6.25를 겪고 보릿고개를 넘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너적 즉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 정서의 근간으로 심령 깊숙이 깔려 있음을 잘 모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금세기에 접어들어 듣지 말고 보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때문에 찬송을 해도 꼭 탄식하듯 하고 기도를 해도 울부짖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아울러 전심으로 찬송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교문화 사상의 잔재이다. 오랫동안 이 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유교사상의 잔재가 아직도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찬송행위, 즉 성서적인 찬송의 방법이 오히려 유치해 보이고 경망스럽게 느껴져서 아무 쓸데없는 절제의 브레이크를 스스로 걸어왔던 것이다.

거기다 음악적이 요인까지 겹쳐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집고 넘어가야 한다. 무슨 뜻이냐면, 찬송가는 서양 음계로 작곡되었다. 서양 사람들의 정서에 맞춰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세계화에 따라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적지 않게 이런 문화적 차이가 적용된다. 그리고 4부을 위한 편곡 때문에 대부분의 멜로디 음이 너무 높다. 아마 한국사람 대다수는 멜로디 음 높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겠으나 장년들에게는 이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회 때는 대부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게 된다. 이 문제는 지휘자나 반주자가 조금만 지혜를 가지면 해결 가능한 일인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회중 찬송을 할 때 음이 높은 곡은 그 음을 2도 정도만 낮춰서 반주 하시면 장년층이 찬송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새벽 기도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이런 몇 가지 요인 때문에 그동안 수많은 교회의 찬송이 침체되어 왔고 그것이 보수적인 신앙 행위로 미화되기까지 했으나 결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제는 속히 개선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요즘 많은 교회에서 오후예배를 열린 예배로 드리고, 창양단도 만들고, 찬송가 이외의 곡들도 예배 때 사용하는 등 찬양의 모습들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찬양의 의무를 성가대에게, 찬양단에게 떠넘기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찬양이 활성화 되었다고 하는 교회들을 막상 방문해 보면 그것은 실력 있는 또는 유명한 CCM가수가 있거나 찬양단이 잘 조직되어 있는 교회들일 뿐, 실상 성도 자신들은 찬양생활을 하지 않는 곳이 많다. 찬양예배 시간에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전심으로 찬양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제가 지난 15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찬양팀을 세웠지만 그것은 그들이 예배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코 그들이 성도들의 찬양을 대신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 즉 예배, 기도, 찬양, 감사, 헌신…. 등은 모두 하나님과 나의 개개인의 일대일 관계이다. 누가 대신해 주거나 대표해 주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명심하길 바란다.

 

아직도 독자의 의문을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모두 인정을 할께! 당신 말이 다 옳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찬양하란 말인가?”그 대답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다. 우리들의 친절한 찬송교사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 86:12)”

바로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심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는 모세를 통한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섬김에 관한 한 기본 강령이요, 찬송할 때 절대 요소이다. 예수님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다(마 22:37,38). 그럼 어떻게 해야 전심으로 찬송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것을 항상 기억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누가복음 19장 37절에 보면,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라고 했다. 그렇다. 자신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영생의 반열에 세워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항상 태양이 작열하듯 쏟아지는 축복을 바라보면 전심으로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5년 전 내가 이 길로 처음 들어 설 때에 많은 사람들 가족, 친지, 벗, 선배들, 같은 동료들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했었다. 기도 잘못해서 미친 줄 알았습니다. 그 당시 제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고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은 것뿐이다. 내가 나아갈 길을 확실히 찾았고 그래서 그 길을 출발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여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라고 찬송했던 것처럼 사실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에게서는 항상 감격적인 찬송이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줬기 때문이 아니라 반사적인 신앙행위로써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나 찬양단을 모집할 때에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받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라고 말했다. 당신의 가창 실력은 당신 자신보다 내가, 그리고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까 굳이 어느 CCM가수 흉내나 내지 말고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런 마음 자세를 기뻐 받으시고 아울러 그렇게 하는 가운데 제가 모든 단원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노라고 말하면, 그동안 기가 죽어 제대로 찬양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뛰어난 가창력이 아니다. 구원의 열정, 그 감격을 보자는 것이다. 기쁨의 고백을 듣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구원의 기쁨을 장송곡 하듯이 하겠는가? 다음 구절을 함께 큰 목소리로 마음에 세기며 읽어보자.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38:1)”

 

 

V. 본론-③찬송의 열매들

 

많은 사람들이 찬양의 목적과 열매 즉, 찬양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효과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찬양을 하면 치유가 일어난다, 마음에 기쁨이 온다, 관계가 회복 된다 등의 이런 현상들은 찬송의 목적이 아니라 그 열매들이다. 찬양의 목적과 방법은 앞서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그 열매들을 맛보는 시간이다. 찬양은 많고, 다양하고, 놀라운 열매들이 많이 맺는데 그 이유는 찬양의 능력에 있다. 먼저 그 능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찬양의 능력

우리가 찬양을 하면, 하나님께서 찬양 속에 임하시고 또 일하시기를 기뻐한다면 찬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성경에도 찬양을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13:15절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양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고백하고 선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함, 능력, 사랑 등이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능력인 것이다. 시편 50:14-15,23; 시편 40:3; 행2:43-47을 따로 시간 내어 일어 보라. 우리의 찬양을 통해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과 일을 듣고 알게 된다. 이때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경외하고 또 믿게 되며 신자들은 더욱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찬송은 말씀에 곡조를 붙여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영혼의 고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 한 부분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기도를 통해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한다면 찬송은 우리들의 영혼의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 우리들의 심령을 하나님께 열게 한다.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위대하고 강하심을 자랑하며, 온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된다. 찬송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들의 병든 몸과 영혼은 치유가 되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안이 열리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찬송을 부름으로 마음에 평안과 영혼의 기쁨을 얻게 된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악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물리치는 힘과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찬송가운데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악한 어둠의 영이 권세를 부리지 못하고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기 전에 찬송을 드리게 되면 우리들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송을 진실한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드릴 때, 하나님은 찬송을 통하여 우리들 심령가운데 크신 사랑과 은혜로 역사하실 것이다.

찬송을 통해 우리들 마음과 영혼의 더러운 죄의 찌꺼기가 정화되고,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맑고 깨끗한 심령으로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더러운 죄가 가득하다면 찬송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심령에 찬송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찬송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입술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은혜의 길잡이이다. 우리들 심령가운데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찬송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찾아오셔서 찬송을 통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2. 찬양과 치유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세속적인 음악치료는 단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힘이 있겠지만, 영적인 음악은 인간의 영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힘까지 가지고 있다. 악령이 든 사람을 고치는 것은 신경정신과적 치료를 가지고는 치료가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치료를 통해서만 악한 영을 내쫓고 구령할 수 있다. 다윗이 본격적인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음악치료사로서의 모습이었다. 사울 왕이 악신에 들려서 번뇌할 때에 수금을 잘 타는 다윗을 왕궁으로 불러들여서 수금을 연주하게 했다. 그 때 다윗의 음악은 세속음악이 아니라 신앙에 의거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인 음악이요,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음악이었다. 그 다윗의 음악, 즉 찬양에 사울의 질병이 깨끗하게 낫곤 했다.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7 : 23하)”

찬양을 통해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을 치유한 것이다. 이처럼 찬양은 영적인 치유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 거기에 그런 영적인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찬양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병든 육신을 치료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나아가 영을 온전케 해 주신다. 우리 거룩한 성전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치유되고, 나아가 온전케 되는 일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가 결론을 내지 못한 사항은, 찬양을 치유의 용도로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고, 나도 아직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찬양을 하는 동안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아무 부담과 거부감이 없지만, 치유를 위해 찬양을 사용하는 것은 아직도 고민된다.

 

3. 찬양의 여러 가지 유익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면, 우리의 간구 소리에 응답해 주셨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양해야 한다. 응답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베풀어 주신 긍휼에 대해 감사치 않고 잠잠히 있는 것은 배은망덕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잊어버리면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다.

찬양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는 데 아주 중요한 방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우리의 짐을 덜어 주고, 우리의 소망을 높여 주며,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찬양은 성도의 신앙 맥박을 촉진시키며 주님을 새롭게 섬길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건전하고 활기찬 운동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받은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은 동료 인간들에게도 유익을 끼치는 길이다. “겸손한 자들이 그로 인해 듣고 기뻐할 것이라(슥 9:9).” 만일 우리가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이 불쌍한 사람이 구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34:3-4).”라고 말한다면,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노래”를 듣고 약한 심령들이 힘을 얻을 것이요 축 늘어졌던 성도들은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가르치고 권면할 때 그들의 의심과 두려움이 쫓겨나갈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이 광대하다고 말하면, 그들 역시 그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도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VI. 결론: 찬송은 믿음의 꽃

 

어느덧 마무리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찬양의 가치를 되새겨 본다. 금은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있어서 찬양은 좋은 것과 축복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방어를 위한 우리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하다. 말씀과 찬양은 우리의 영적 싸움의 주 무기이다. 우리는 이 찬양으로 지옥의 문들을 강타해야 하고, 조소와 반발을 각오해야 하며, 지옥 문 앞에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 그들의 마음이 돌이킬 수만 있다면….

“찬양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적인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 대신에 그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데 그 최상의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그것을 잃은 손해는 누구라도 믿기 어려울 만큼 큰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만 하면 수많은 문젯거리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찬양의 가치란 원수들이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되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방해할 만큼 굉장한 것입니다. 적당히 양보하여 타협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악인데 이렇게 되면 마귀의 간계에 꼼짝없이 붙잡히게 됩니다. 찬양은 우리의 무기창고에 있는 것 중에서도 적을 대항하는 데 쓰는 주된 무기입니다. 찬양은 곧 힘이요 힘은 찬양입니다. 찬양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새로워지고 뜨거워지게 됩니다.”- 잭 테일러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1. 찬양사역자를 위한 조언

이제 이렇게 나의 사역의 1막을 정리하며 이제는 찬양사역의 일선에서 서서히 물러가 더 큰 사역, 세계 선교를 위한 비전을 준비하게 되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기에 지난 15년간의 사역을 돌아보며 후배 찬양사역자들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해볼까 한다.

의욕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

찬양 사역자들은 작곡, 편곡, 연주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되는데 이때 예배에 실험적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재의 빈곤에서 또는 새로운 것에 대한 탐닉이 원인이 되고는 하는데 의욕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적합한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번 길들여진 음악은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와 같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음악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무시하지 말라

찬양 사역자들이 교회의 세속화에 앞장선다면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을 찬양으로 인하여 범죄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독교 예배의 바른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음악은 감각주의나, 감상주의 모든 세속주의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그 질이 고상하고 조심성 있는 특징을 지을 것이다. 예배에 맞는 곡을 고르고 또 그것을 잘 부르는 것은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직접적 목적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합당하게 노래하는 것은 음악의 궁극적 목적이다.

 

예배에 좋은 봉사자로 있어라

찬양 사역자들은 예배의 주인이 아니다. 예배에서 다른 예전을 맡은 사람도 그 예배의 주인은 아니다. 각기 예배의 봉사자로 있어야 한다. 음악이 너무 음악적 이려고 할 때 음악은 예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신이 오르간을 연주하거나 지휘를 한다고 해서 회중이 악보와 다르게 부르거나 곡 해석을 자신과 다르게 하고 있다고 예배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일반 회중들은 일반적으로 호흡이 짧고 청음과 발성이 잘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때문에 그들은 불합리하게 노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예배를 중단시키고 교육을 실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의 음악적 수준은 회중이 찬양에 갖는 관심의 척도가 되므로 성가대나 찬양단, 교사들을 상대로 꾸준히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2. 찬송은 믿음의 꽃

이 제목은 본 논문의 표제이기도 하다. 이 표제는 또 내 스승이었던 Sing-코이노니아의 주숙일 집사님께서 1992년에 쓴 <찬송은 믿음의 꽃입니다>의 표제에서 따 온 것이다. 그분 밑에서 찬양의 기본을 공부하면서 언젠가 그분을 능가하는 책을 한편 내보리라 다짐했는데, 지금껏 이루지 못하고 이 논문으로 대신하면서, 그분의 가르침 대부분이 나의 찬양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나도 그와 같은 제목을 달아본 것이다. 또한 본 논문에 곳곳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표절이라고 한다면 표절이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이, 그분께서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그 가르침이 나의 15년 찬양 사역에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떠면 당연히 그분의 주장이 나의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찬송은 믿음의 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글로 내 논문을 갈무리할까 한다.

어느 날 나의 아내가 “지난 15년의 삶, 찬양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나의 삶은 찬양의 열매를 먹고 지금껏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것은 비밀이고, 신비이다. 이제 그때 아내에게 못한 답을 지금 하려고 한다. 믿음의 열매인 찬송에 대한 비밀을 밝혀 본다.

한 마디로 말해 "찬송은 믿음의 꽃"이다. 열매는 열매로되 계절을 가리지 않는 꽃.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경을 가리지 않는 꽃. 그 열매의 달콤함이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하나님의 보자에까지 이르는 꽃. 십자가 위에서 가장 크고 풍성하고 완전하게 맺어진 꽃. 고난과 훈련과 시련 속에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맺어지는 꽃.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여 첫 번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소중한 꽃. 그것은 바로 찬송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을 맺고 가꾸는 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토양이 있어야 하고 평안이라는 수분과 감사라는 거름이 항상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열매의 씨앗은 결코 돈으로 살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어떠한 권세나 권력을 이용해서 빼앗을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속에 무엇보다 이 열매가 활짝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으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믿음의 유, 무를 가리는 척도요 영생의 푸른 신호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믿음의 유. 무를 가리는 시비에 휩싸여 때로는 판단 자가 될 때도 있고, 그 판단의 대상이 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내린 판단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헌금 잘 하고 교회 봉사 잘 하면 대개는 일등 신자 칭호를 받는다. 젊은 나이에 권사, 장로가 되면 신앙의 우등생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근거가 모두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헌신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헌신의 척도를 봐서 직분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예외가 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한번 보자. 사랑이나 헌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바치고 충성하는가? 그런 그들도 그 집단에서는 물론 일등 신자 칭호를 받는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내렸던 그 수많은 판단의 기준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요 세상적인 시각 이었다는 말이다. 계시록 3장 1절의 "내가 네 행위를 아나니 네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데 교회만을 향해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땅에는 이런 책망을 받아 마땅한 교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는 결코 어떠한 직분이나 성도라는 구별된 명칭이 곧 믿음의 표요, 영생의 요람은 아니라는 사이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자로는 결코 잴 수가 없는 이 믿음의 분량은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찬송"이다. 왜냐하면 생활 속의 찬송은 그것이 곧 믿음의 유. 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무슨 엉뚱한 강변이냐"고 묻고 싶은가?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기쁨이 없을 때, 감사가 없을 때, 바로 그때에 여러분 입술에 과연 찬송이 있었던가?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은 믿음의 여러 요소들로 인한 증세이지 믿음의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증세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을 말이다. 믿음의 요인이란 그것이 때문에 믿음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 찬송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고 타인이 지시하거나 제어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성경적인 예로 누가복은 1장 5절에서 20절까지 깊이 묵상해 보자. 보신대로 천사 가브리엘이 제사장 사가랴에게 세례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내용이다. 이 글에는 당시 최고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의 신앙 상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감히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던 종교 지도자의 믿음의 허상이 낱낱이 들어난다. 제사장 사가랴는 매우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들이 그토록 간구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자신들의 형편으로는 더 이상 자녀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가랴 앞에 선 천사 가브리엘의 말한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위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14~17)”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인가? 스가랴의 오랜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는 내용이다. 이름까지 지어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도 그의 출생을 기뻐한다 하였다. 나실인으로 구별 되었다고 했다. 아들을 주심만도 감사한데 그가 할 일까지 말씀해 주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라고 했다. 당시에 가장 존경받던 선지자 엘리야! 아들을 낳는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거기다 그의 존귀함이 어느 정도이며 그의 출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울러 그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 과연 어떤 것인지 까지 아주 자세히 일러 주고 있다. 우리 가운데 혹시 이러한 경험이 있을까? 아마 현실이 아니라 꿈에서라도 이런 경험을 했다면 자다 말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송할 것이다. 감사헌금을 갑자기 10배 이상으로 넉넉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가랴에게는 꿈이 아니요, 현실이며 그것도 사사로운 장소가 아닌 성소에서 분향 중에 체험한 일이건만 그 입술에서 할렐루야가 나오기는커녕 가장 불신앙적인 투정이 나오고 말았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저 말이 제사장에게서 나올 말인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반응이다. 제사장인 그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의 내용을 모를까? 사가랴의 이런 불 신앙적 반응은 감히 상상도 못할 놀라운 것이다. 너무나 답답하고 망신스럽다. 그 결과를 한번 보자.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사랑의 하나님은 너무나 관대하시다. 나 같으면, 내가 하나님이라면 당장 죽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사장의 입에서 나온 가장 불신앙적인 반응의 말…. 잘 보라. 찬송해야 할 때 찬송하지 않으면 이처럼 영적 벙어리가 된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말을 잘 한다 해도 기도하지 못하고 찬송하지 못하는 성도의 입은 결국 벙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벙어리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마치 영광의 면류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자랑하기에만 급급할 뿐 정작 그 심령은 불신앙으로 가득 차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주님이 교회를 이끌려고 하면 냉소를 보내고 세속적인 명분을 내세워 거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찬양사역을 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고 싸우고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이 교회 장로요, 권사요, 안수집사요, 그 교회에서 몇 십 년씩 몸담은 토박이 신자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소위 말하는 그들이 그어 놓은 경건이라는 잣대를 이용해서 정작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다.

 

이제는 똑같은 아니 비슷하지만 반대의 상황에 놓인 마리아의 반응을 한번 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1장 26절에서 38절을 함께 일자.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당시 마리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처녀였다! 요셉과 결혼까지 약속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전혀 남자를 경험해 보지 않은 동정녀에게 수태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많은 이단이나 반 그리스도 교도들이 이 부분에서 "마리아가 동정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라는 말로 진리의 말씀을 깎아 내리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그 주장은 가장 중요하고 근본인 "믿음"을 배제하고 그저 이성적인 잣대로 성경을 그들의 주장에 짜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다. 성경이, 많은 증인들이, 그리고 우리의 양심의 중심이 되시는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가 동정녀임을 증거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동정녀의 수태는 당장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잉태는 마리아가 전혀 바라는 소식이 아니었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중 자매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나와 약혼한 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날 배가 불러와서 "난 다른 사람과 동침한 적이 없는데 저절로 아이를 가졌다."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제 마리아의 반응을 보자.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것과 나이든 부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 이 두 가지경우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믿기 어려울까? 인류 역사상 동정녀를 통한 출산은 마리아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지금까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든 부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종종 있어 왔고, 지금도 가끔 일어나고 있는 일입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해 그 전례를 남기셨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스라엘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어 제사장 사가랴의 입을 통해 증거 되어 온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방응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아이를 낳는다."라는 같은 사건 안에서, 그 의미는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 볼 때 사가랴에게는 축복이고 마리아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응은 정 반대였다. 당연히 찬송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사가랴의 입은 의심의 자물쇠로 굳게 잠겨 10개월 동안 벙어리가 되었고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 매달릴 것만 같은 소박한 시골 처녀 마리아의 입에서는 기막힌 찬송이 터져 나왔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잇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시리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1:46~55)”

이 마리아의 찬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자. 우리의 찬양이 되어야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윗의 여러 찬송을 좋아하나 그것들 보다 더욱 이 찬가를 좋아한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이 주신 교훈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에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믿음이라는 토양 위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찬송의 꽃이 피어나는데, 그래서 찬송은 바로 믿음의 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 중에서야 누구인들 찬송을 못하겠는가? 생활이 풍요할 때야, 잘 될 때야 누구든 감사치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욥의 경우처럼 엄청난 환난 가운데 놓였다면 그래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아마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욥을 보라. 그 처절한 실패의 터전 위에서 찬란한 찬송의 노래를 피우고 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때문에 찬송이야말로 보이는 믿음이요, 가장 객관적인 믿음의 가늠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수시로 자신의 삶 가운데 찬송이 있는가를 점검하시길 바라며,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찬송이라는 믿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풍성히 열매 맺기를 축복하며 논문을 맺는다.

 

2012년 10월 4일 양지에서….

 

 

 

 

 

 

VII. 참고도서, 참고 사이트

 

 

<참고 도서>

 

1. 찬양예배 핸드북. 김영수 저. 도서출판 기쁜 날. 2009. 04. 13

2. 찬양과 예배의 실제. 김영수 저. 도서출판 기쁜 날. 2005. 11. 30

3. 교회 음악의 이해. 이택희 저. 도서출판 질그릇. 1993. 03. 20

4. 찬송은 믿음의 꽃입니다. 주숙일 저. Sing 코이노니아. 1997. 01. 22

5. 예배와 찬송. 한국찬송가위원회 저. 비전사. 2009. 03. 30

 

<참고 사이트>

1.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2. 찬양나라 http://cafe.daum.net/Ho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