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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예림의집 2013. 6. 14. 19:13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들어가는 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요한복음서를 읽노라면 마치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는 느낌에 빠져 든다. 요한은 독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직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요한의 관심사는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로 한정하고 있다. 요한복음이라는 숲을 전체적으로 관망해 볼 때, 예수는 빛이시고, 생명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시다. 그 빛은 죄와 불신앙의 흑암을 몰아내는 신령한 비추임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빛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상당히 깊고, 풍성하다. 본 주제보고서를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려고 한다. 예수의 사역은 땅에 속한 능력(권력, 인기, 정치력)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빛, 즉 사망의 그늘에 비취는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 그분 자신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빛으로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내재된 능력이나 권위를 과시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한적한 한 어촌 마을을 상상해 보라(눅 5:1-11). 예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바닷가를 산책하셨다. 그러나 그 예수로 인하여 그 작은 어촌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분의 설교가 끝난 후 그에게서 빛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에게 작은 배를 빌려 주었던 갈릴리 어부들이었다. 설교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 네 사람들에게 말을 거셨다. 그 때부터 예수는 그들에게 빛으로 비취셨다. 바로 그때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물을 다듬으며 밤샘의 일과를 마무리하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빛의 비춤을 받았고 그 빛은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즉시 생업을 던져버리고 이 낯선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무언가에 매료된 것처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수를 쫒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선뜻 주님을 따른 것은 왜일까? 나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빛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의 울렁거림이 그들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이 신비한 감정은 그분이 무언가를 보여주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 내 가슴에 쏟아지는 그분의 빛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큰 빛이요 강한 자석이셨다. 다시 강조하자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하신 것을 봄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이 어떠한 분이셨는가를 깨달음으로써 그분께 매료되고 사로잡혔다.

지금 이 곳에도 이천년 전에 그 빛이 비추었고, 그 빛에 매료되고 사로잡힌 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인데, 이제부터 그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Ⅰ. 서론

 

1. 빛이란 무엇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김남준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진리요 그 빛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은 빛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빛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아들들이라고 말한다(요 12:36). 그렇다면 빛이 아들로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1-1. 물리적인 빛의 고찰

빛(fw'")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첫 번째를 차지한다. 하나님은 흑암으로 가득 찼던 세상을 향해 “빛이 있으라(창 1:3)."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빛이 이 세상에 가득 찼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빛이 없는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마음을 처음으로 기쁘시게 하는 피조물이 되었다. 그 후로 이 빛은 한 순간도 이 세상에서 살아진 적이 없다.

다음은 정민경 작가의 책에서 몇 가지 정리해 보았다.

①빛의 가장 큰 기능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을 보게 한다. 또한 먼 곳을 보고 분별하게 한다.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분별을 못한다. 어두움 속에서는 길을 잃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먼 곳까지 밝히 보고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어두움의 매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됩니다.

②또한 빛은 추위를 몰아내고, 생명을 유지시킨다. 엄동설한에도 햇볕이 잘 쪼이는 담장 밑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며 산속의 바위 밑에는 진달래가 핀다. 이처럼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③빛은 생물을 자라게 한다. 생물은 성장하는 것이 특징인데 성장하는 데에는 빛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빛은 살아있는 것은 더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지만, 죽은 것에는 햇볕이 쪼일수록 더 마르게 한다. 나무나 풀의 경우 밑둥치를 잘라놓았을 때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말라가지만, 살아있는 풀은 햇빛을 통하여 더 자라게 된다.

④빛은 치료에도 이용된다. 현대 의학에서는 레이저 빛을 사용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기도 하고, 세포에 자극을 주어 살아나게 하고, 매끈하게 살을 자르기도 한다.

⑤빛은 공기 중에 곧게 날아가 물체에 부딪쳐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결코 어둠이 아니다. 그림자는 우리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등 많은 유익을 준다.

⑥빛은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는 성질이 있어 거울 효과가 생기게 해 준다. 이 거울효과가 우리 일상의 많은 곳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 가운데 빛만큼 독특한 성격의 물질은 없다. 현대물리학에서조차 빛의 모드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빛은 때때로 아름다운 색깔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 색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이러한 빛의 특성은 다른 사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성질이다.

1-2. 관념적인 빛의 고찰

햇빛이나 전기등의 온갖 조명 빛들이 외적인 어두움을 밝혀 준다면, 관념적 말하는 빛은 사람의 내면세계를 깨우쳐 흑암을 몰아내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도 학교의 선생님이나 훌륭한 학자가 사람들의 빛이며, 어릴 적에는 부모나 선배도 빛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지식적 존재다. 지식에 따라서 양심이 조성되고, 그 양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정글북’의 소년 모글리가 좋은 실례다. 외형은 사람이지만 배움이 없이 늑대를 부모로 알면 늑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지식이 사람 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고 필요한 지식을 함유해야 문화 속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이런 지식들이 빛이다.

보통사람들의 생활적 지식을 뛰어넘어 당대나 후대의 많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는 철학자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더 큰 빛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인도해 주는 사상계의 선각자들이다. 사람의 본질은 무엇이고,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가? 창조주의 존재유무와 사후 세계 등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게 하는 자들이다.

또한, 빛은 가치를 깨닫게 한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가치가 무효가 된다. 빛이 없다면 전혀 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빛은 그 자체가 지닌 가치를 분명하게 들어나게 한다. 빛을 잃으면 가치를 모른다. 그러나 밝은 빛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위해 이웃을 위해 보람되게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들은 정신세계의 질을 고양하며 윤택하게 하는 면은 있지만,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와 생명은 없다. 모두가 인본주의에서 나온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1-3. 성경적인 빛의 고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신 것이다. 그 분은 창조주로서 만유의 근본이시며, 만유가 그 분으로 말미암는다. 즉 만물과 만상과 우주 운행의 동기와 동력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우주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왜 만물의 영장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그 존재 목적은 무엇인지를 밝혀줄 분은 오직 창조주 한 분 뿐이시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하셨다. 빛이 있는 생활은 미래를 직시한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목적이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빛은 세상을 밝혔고, 구원이 문을 보여 주었다. 바로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까닭을 가장 간결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곳이 요한복음 3:16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죽음 너머를 볼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우리들의 미래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가 있다. 요한복음 5:24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하신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으로 인해 자신의 앞날을 환하게 바라본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고난 가운데에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순교를 눈앞에 둔 순간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6-8).”고 했다.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 그는 하늘을 보았고,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환영하시는 빛 가운데 계신 주님을 보았다. 그에게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빛을 발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에서 누릴 미래의 영광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 천지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 이 존귀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그분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이 빛을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이 빛을 따라 살아가면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게 되다. 이 빛을 가슴에 품으면 모든 것을 분별하게 된다. 이 빛을 기준으로 삼으면 삶의 바른 가치관을 지니게 된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 사는 사람은 삶의 질이 다르다.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고 살기에 오늘의 생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하고 부하고, 병들고 건강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좋은 영원한 세계, 빛 되신 주님이 계신 그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좋은 예가 있다.

한 음악가가 있었다. 그는 질병으로 반신불수 상태였다.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돈을 빌렸으나 이를 갚지 못해 감옥에 갇혔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는 악보를 펴놓고 창작에 몰두했다. 이 사람이 세계적인 음악가 헨델이다. 그가 감옥에서 만든 작품이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할렐루야”이다. 무엇이 이토록 그의 삶을 빛나게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2. 빛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곳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가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8).”

2-1. 세례요한 생명의 빛을 본 자.

빛과 색을 눈 먼 사람에게는 증명 할 수 있는가.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분홍색을 무엇으로 증명하나? 빛과 색깔은 눈뜬 사람이 본다. 장님은 못 본다, 색깔은 만져도 모른다. 눈 먼 사람이 어찌 빛과 색깔을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죄인이요 눈먼 자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을 떠나 죽은 자가 어찌 생명의 빛을 보겠는가. 죽은 자가 다시 새 사람으로 살아나지 않고는 절대로 생명의 빛을 볼 수 없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과 분리 된 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태어난다. 눈이 멀고 죽은 자로 태어난 자이다. 죽은 자가 어찌 생명의 빛을 보겠는가. 그러니 생명의 빛을 못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생명의 빛은 생명의 빛을 본 자가 증명해야한다. 생명의 빛을 보았다 해도 생명의 빛을 무엇으로 어떻게 증명하나,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명의 빛을 보고 놀라고 감격하고 변화 된 사람은 그 놀라운 경험을 말과 행동과 삶과 죽음으로 표현하여 증명할 수밖에 없다. 세례요한은 증거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요 1:6-8). 그의 증거의 목적은 “모든 이로 하여금 빛 되신 예수님을 믿게”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요 20:31). 그는 먼저 눈을 뜬 자, 보고 들은 자로서 눈 먼 자로 태어난 사람들(모든 이)에게 설명이 아닌 삶으로, 죽음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2-2. 빛에 대한 요한의 선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사 40:3) 그 빛의 정체를 가르쳐 알게 해 주는 증거자가 했다. 하나님은 그 빛에 대해 증거 하기 위해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세례 요한”이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다.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동명(同名)의 사람이 여럿 있다.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요1 :42, 요21:15∼17)도 있고,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 요한(행4:5∼7)도 있고, 마가 요한(행12:12, 골4:10, 벧전5:13, 행13:13)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이던 요한(마4;21, 행12;1∼2, 막5:36∼37)도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도 있다. 성경에는 이런 동명이인(同名異人)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그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본문의 요한을 세례 요한이라고 부른다.

2-3. 하나님의 선물 요한

성경은 요한의 출생에 대해서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태어났다”라고 했다. 여기 "났으니"란 말은 문법적으로 부정 과거형이다. 이 표현은 이미 오래전 결정이 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써 요한의 출생이 '출생이전부터 출생되었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된 하나님의 선물로 이 땅에 왔다. 요한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어두움에 대한 빛의 증거를 위해서이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낸 빛의 증거자였다. 요한복음 1:19이하에 요한의 증거가 나온다. 요한은 분명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고 했고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라고 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7절)"고 말하면서 빛 되신 그리스도만을 높였다. 29절에 이르러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35절에 드디어 예수그리스도께서 빛처럼 밝히 드러나신다.

요한은 그 이름의 의미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의 증거자 요한은 아주 먼 옛날 이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고,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3. 어둠과 빛의 관계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3-1. 어둠의 영역과 빛의 영역

세상에는 어두움의 영역과 빛의 영역이 있다. 빛의 영역은 주님을 따르는 삶이고, 어둠의 영역은 사단을 따르는 삶이다. 원래 세상은 타락 이후 어두움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다. 사단의 세력에 의해 정복당했었다. 사단의 세력은 어두움의 영역 안에 자신의 메시지들을 숨겨놓았다. 마치 비무장지대에 숨겨놓은 지뢰와 같다.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지뢰들을 묻어놓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세상 속에서도 길을 보여주는 삶이어야하고, 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진리의 길이 아닌 길로 가면 거기에는 온갖 무서운 어둠의 지뢰들이 터진다. 어둠의 지뢰들이 여기저기서 꽝꽝 거리는데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길이 아닌 길을 간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사용하는 지뢰는 목숨을 빼앗아 가지만 어둠의 지뢰들은 오히려 육적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비록 영혼은 파괴될지라도). 어둠의 지뢰들은 무엇인가? 끝없는 타락한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오는 미움, 불법, 참소, 다툼, 무례함, 비판, 시기, 탐욕. 정욕, 사치, 허영, 분주함, 무정함, 무관심, 불효의 지뢰 등이 있다. 오늘도 이 세상에 속하여 수많은 어둠의 지뢰들을 밟아가면서도 의식이 깨이지 않고 코마상태에 빠져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어둠의 지뢰 속에서 그것들을 무용지물이 되도록 만드는 놀라운 비결이 있다. 바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둡게 살다가 영원한 어둠의 세계인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것이 어둠의 인생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다. 그분이 오시면서 이 세상은 그분의 빛으로 서서히 밝아지고 있다. 마태 13장 33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여기서 누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 가루 서 말 같은 어둠의 요소가 누룩을 만남으로 전부 부풀게 된다. 부풀게 되었다는 말은 본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누룩으로 달라진 새로운 본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누룩을 우리 속에 담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론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3-2. 어둠과 빛의 상관관계

빛과 어둠의 관계를 잘 묘사한 F. F. 브루스의 글을 소개한다.

“작은 촛불 하나가 가득한 어둠을 물리칠 수 있지만, 방안에 가득한 어둠에 의하여 촛불의 광채가 흐릿하게 되진 않는다. 빛과 어두움은 정반대다. 빛과 어두움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같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적수가 되지는 못한다. 빛이 어두움보다 더 강하다. 어두움이 빛을 거슬러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을 동등하고 영원하게 서로 대적하는 것 같아 보이게 하는 이원론적인 체계들은 다 거짓된 것이다.”

브루스가 잘 묘사했듯이 어둠의 세력은 빛을 이겨내지 못한다. 사탄의 어떠한 계략도 빛 되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패퇴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둠이란 빛이 있을 때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함으로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가 바로 어둠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3-3. 빛은 성 삼위 하나님의 속성.

다음 구절을 읽어보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위의 구절들을 읽어보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빛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많은 이단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파괴하기 위하여 위의 구절들을 이용한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역으로 내가 질문을 해보겠다. 하나님은 빛이 필요하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의 창조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에 특수한 목적(하나님과의 교제)을 가지고 창조될 인간을 위한 창조인 것이다. 요한문헌에 제시되는 빛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했다. 그래서 그 빛이신 하나님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을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신 분이다. 그 빛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어두원진 세상을 밝히시려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어두움가운데 죽은 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 찾아오신 빛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질서가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순결이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Ⅱ. 본론1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4.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요 1:1-5)

영국에 제임스 심프슨(1811-1870)이라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다.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에서 빵을 만드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리하고 공부를 잘해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의학을 전공하여 29세의 젊은 나이에 그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심프슨은 항상 환자들이 수술을 할 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던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세기 2:22-22)”라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 의사의 상식으로 볼 때, 사람의 몸에서 갈비뼈 하나를 떼어 내는 것은 매우 큰 수술인데, 아담은 잠에서 깨어나서 고통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하와를 보자“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세기 2:23)”고 했다. 그래서 심프슨은 “하나님이 아담을 잠재우시듯, 환자를 잠재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무사히 수술을 끝낼 수는 없을까?”하고 고민하다가 수술용 마취제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47년 11월에 심프슨은 클로로포름이라는 마취제를 발견하고 논문을 통해 발표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1853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황후가 왕자를 분만할 때 이 약을 사용하여 분만에 성공함으로써 이 마취법은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경”의 작호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말년에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를 할 때, 한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제자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심프슨이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 내 생애에 가장 큰 발견”이라는 대답을 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심프슨은 뜻밖에“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이다.

4-1. 예수님의 자기 선언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절).”

이 말씀은 등불들이 밝게 비추고 있는 성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선포이다. 예수님은 빛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설명하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빛의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셨을까? 이 점에 대하여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은 그의 책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상황은 초막절이기 때문에 초막절을 밝혔던 빛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며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문맥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생활을 기억하며 지키던 초막절 다음날이었습니다(요7:7, 14, 37). 초막절에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등불을 밝혀놓았습니다. 이 등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광야에서 생활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있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달아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을 때 그 빛은 초막절 밤에 성전을 환하게 밝혀주었던 그 빛과 광야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 진영을 환하게 밝혀주었던 불기둥을 연상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기 선포를 “I am who I am” 또는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라 하는데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יהוה)”로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이 나타나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일곱 가지로 선포되고 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6:35), ②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 ③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④나는 선한 목자라(요10:11), 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⑥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⑦내가 참 포도나무요(요15:1).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예수님을 빛이라고 할 때 첫째,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둘째, 영적 소경의 비참함을 깨닫게 하여, 셋째,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4-2. 소경의 눈을 고치신 의미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기 전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9:5).”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인가? 첫째, 예수님만이 소경에게 빛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하심은 예수님만이 소경에게 빛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소경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른 예수님은 소경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다.

둘째, 예수님만이 영적 소경들에게 빛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자 눈을 뜬 사람은 자신이 소경 거지이었음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갔다. 바리새인은 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자세히 물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그대로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지 못하여 그의 부모에게 물었지만, 부모는 출교 당할까봐 두려워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두 번째로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나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셨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는 일을 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고 욕하면서 그 사람을 내어 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와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셨고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다.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떠서 구세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3 유일한 빛

이처럼 신성의 빛은 믿음으로 나아온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친 빛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빛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빛이 없다. 이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흑암 가운데 있는 이유는 그들의 체험 가운데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론을 공부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빛이 없을 수도 있다. 많은 믿는 이들이 성경을 가리켜 빛으로 충만한 책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까지도 흑암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요한복음 5장 39절과 40절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이 성경은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화를 냈습니다.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세상의 유일한 빛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소경이었다. 주 예수님이 없는 곳은 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가 없는 우리 자신, 그리스도가 없는 우리의 생활은 다 흑암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실재적으로 어둠과 자아에서 구원하시는 빛이신 그리스도 믿는다면 달라져야 한다. 빛의 아들들(요 12:36)로 살아가야 한다. 이 부분은 “8.빛의 아들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5. 빛에 대한 공간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각기 다른 관점과 관심사를 가지고 기록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신 내용이 나타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시기 위하여 “나는 …이다(εγω ειμι, I am who I m).”라는 방식을 자주 사용하셨다. 이러한 직접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며, 그 빛을 따르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이 빛을 받은 자 역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1. 빛에 대한 공간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

요한복음은 사복음서중 독특한 복음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첫 장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며 20장에서는 도마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한다. 요한복음은 성서중에서 제일 나중에 기록된 복음서로 요한이 죽기 전에 하나의 인생 회고록의 성격이 있는 성경이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내용 줄곧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 로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 사랑하시던 제자가 바로 요한 자신임을 밝힌다. 요한이라는 인물은 사랑의 사도로 불리지만 변화받기 전에는 참 여러 가지로 모자라고 야심 많고 성격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누가 크냐는 주제로 동료 제자들과 다투었고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께 천국자리에 대한 청탁을 하였고 가야바의 뜰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을 정도로 대제사장 진영에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며(단번에 예수님의 제자임을 들킨 베드로와는 대조적) 예수님의 돌아가시기 전에는 혹시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으나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도록 부탁한다. 끝내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망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베드로보다 더 젊은 요한이 먼저 달려갔지만 그는 가다가 도중에 멈췄다. 그러한 요한이 모든 인생을 정리할 즈음에 요한복음에서 회고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신은 한 없이 죄인이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제자로, 사랑의 사도로 변화를 허락하신 예수님께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던 제자"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공관복음서는 그 기록연대가 3-40년대로 그리스도교 초기에 기록된 책이다. 그리고 공간복음서중 마가, 누가 복음서는 남의 증거에 의하여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록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말씀도 생각하여야 할 말씀이라고 본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성경이다. 또한 그분의 이적을 다른 복음에는 이적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요한은 표적이라고 기록하였다. 그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이적은 그의 하나님을 증거 있는 것이다.

5-2. 빛에 대한 이해의 차이

공간복음은 빛을 성도들의 거룩한 행위(빛과 소금)로 본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빛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는 빛의 아들들(요 12:36)이라고 명명한다.

 

6. 빛이신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사역은 빛의 사역이다. 빛이 오면 어둠이 떠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어둠의 상징인 죄가 해결되어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의 어둠, 공동체의 어둠, 한 나라의 어둠까지도 예수의 빛이 비추는 순간 사라진다.

6-1.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빛은 생명입니다. 빛이 없으면 동물도 식물도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빛이시며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 2)" 빛은 치료의 광선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빛으로 오셔서 치료의 광선을 비추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만드신 분은 어떤 질병도 치료가 가능하시다. 뿐만 아니라 빛 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두려움도 무서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자녀는 그 부모와 함께 산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6-2.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밝고 깨끗한 세상을 주셨다.

빛은 밝음을 의미한다. 어두운 방에 스위치를 켜는 순간, 어두움이 물러가고 영혼이 밝아지고, 개인과 가정이 밝아지며, 얼굴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더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찌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욥 11: 17-19)."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빛이 들어오면 우리의 얼굴이 밝아질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밝아져서, 이제는 우리도 빛의 자녀처럼 밝고 깨끗한 삶,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 8-9)”

6-3. 셋째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삶을 주셨다.

빛은 따뜻함, 뜨거움, 즉 열정을 의미한다. 어릴 때 우리가 즐겨 하던 놀이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큰 돋보기를 가지고 운동장에 나갔다. 돋보기를 해의 각도에 잘 맞추어 작은 구멍처럼 만들어 검은 종이에 한참을 대고 있으면 결국 검은 종이가 타버려 연기가 나고 구멍이 뻥 뚫렸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빛은 뜨거운 열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삶에 따뜻함, 열정이 생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뜨거움과 열정이 생겨서 혹시 미워했던 사람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용서하고 싶은 마음, 또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 10-11)"

마음속에 빛이 없으니까 눈도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다.

Ⅲ. 본론2 빛의 자녀로 살기

 

7. 사람들의 빛에 대한 반응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7-1. 무지한 세상

요한복음은 7개의 표적(증거)과 7개의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왜 표적(증거)이 필요한가? 세상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여 주시고, 증거자를 보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빛의 증거자가 필요한 것은 빛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빛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증거자가 필요한 것이지 빛이 증거를 받아야 빛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빛은 참 빛이시다. 이미 세상에 계셨다. 각 사람을 비취고 계셨다. 9∼10절을 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세상은 알지 못했지만 빛은 이미 세상에 있었다. 영원한 생명의 빛은 이미 각 사람들을 향해 비취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을 알지 못했다. 그 참 빛 속에 영원히 있고 풍성함이 있으며 치료함과 회복이 있고 기쁨과 축복이 있었지만 깨닫지를 못했다. '자기 땅'이란 의미는 '자기 집'이란 뜻입니다.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그의 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오늘날도 세상은 이렇게 무지하다. 빛이 있으나 빛을 깨닫지 못한다. 세상을 만드신 세상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어둡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빛을 알아서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세상은 크게 세 가지 뜻으로 나뉜다. 첫째,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배제한 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로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 둘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후 회복하고자 하는 세상이다. 셋째, 타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세상이다. 오늘날도 빛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다. 누가 이 빛에 대한 증거자일 수 있을까? 바로 빛의 아들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큰 자라고 하셨다. 그것은 빛에 대한 증거 때문이다. 누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빛의 아들들이 빛의 증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7-2. 세상의 반응

①그를 알지 못했다(요 1:10).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는데 그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빛 보다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을 때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모르면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②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영접은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지으신 이가 오셨고, 주인이 오셨는데 영접을 안 하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주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영접은 그만두고라도 그 빛을 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 속에는 율법만 지키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시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율법은 알았는데 새 법은 몰랐다.

③그를 믿지 않았다. 왜 믿지 않았을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러면 믿음이 무엇일까? 믿음은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 약속이 바로 이어서 선포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은 핵폭탄과 같은 파괴력을 가진 말씀인데 이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율법만 지키던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몰락했다.

7-3.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세상의 빛으로 믿고 주님의 따라야 한다. 변함없이 꾸준히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때로는 좋은 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도 있다. 우리 믿음생활에 의심과 회의가 생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믿고 거기에 몸을 던져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그 생활에 놀라운 변화들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체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지만 그를 믿고 따르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또한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에 대한 연구보고서임에도 이 부분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5:14-16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아니라 믿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현재직설법’이다. 즉 앞으로 빛이 될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빛이 되라는 당부가 아니다. “너희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바로 그 빛이다”라는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와 교제하는 가운데 모든 면에서 달라진 모습을 통하여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빛으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세상의 빛으로 믿으라.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비한 실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고,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주님이 세상의 빛이듯이 우리도 세상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변함없이 믿고 따르므로 생명의 빛을 누리자. 그리고 그 생명의 빛을 받아 세상의 빛으로 살자!

 

8. 영접하는 자

그럼 누가 하나님께로 난 자일까? 어떻게 하면 빛의 아들들이 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한 가지의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말씀을 보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 성경은 대단히 중요한 축복의 약속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서 난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 영접이란 말은 '환영'이란 뜻이다. 곧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영접'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11절의 '영접'이란 말의 뜻은 민족적인 환영, 공동적인 환영의 의미이고 12절의 '영접'은 개인적인 환영의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되는' 이란 말은 부정과거형으로 한번 됨으로 영원히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되는' 것은 '믿는' 것으로 된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자녀'를 표시하는 단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양자가 됨으로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의미의 "휘오스"라는 단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본성적인 자녀'의 의미를 가진 '테크논'이 있다. 전자는 바울이 많이 사용했던 단어이고 후자는 본문에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다. 중생의 결과로 되는 관계를 의미이다. "권세"라는 말은 성경에 여러 단어로 사용이 되고 있지만 여기 사용된 단어는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합법적인 권리'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행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자녀 된 권세가 여러분에게 있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여러분은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

 

9. 빛 가운데에서 사는 삶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고, 그들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9-1. 우리들은 빛의 자녀이기에,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어려운 것은 바울은 빛을 가리는 어둠, 즉 죄 된 우리의 옛사람 때문이다.

9-2. 빛 가운데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이렇게 빛 되신 예수님을 날마다 가까이 해서 우리의 어둠의 영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이 침입하도록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을 말한다(롬 6: 11). 빛이 어두웠던 마음에 찾아와서 모든 어두움을 쫓아낸다. 그 빛이 찾아옴도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이 어둠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결단과 선택을 한 다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면, 그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드러내야 한다. 이 은혜를 드러내지 않으면, 또 다시 어둠 가운데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9-3.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자.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는 그의 계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고 우리가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우리에게 주신 율법을 집약해 놓은 것이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고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Ⅳ. 결론

예수님, 우리의 빛이다. 모든 것은 빛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세1,3-4). 빛은 우주의 기원이며 창조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서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땅에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무질서를 빛으로 정리정돈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두운 시대를 마감하고 하늘을 열어(마태3,16) 성령의 새 시대를 시작하셨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과 어둠의 시대는 가고 빛과 생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죄악과 저주의 시대는 끝나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빛이신 예수님은 인류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셨다. 노아 홍수가 끝나자 하나님께서 일곱 빛 무지개를 걸어(창세9,13) 새 시대를 알려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빛이신 당신을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아 이 땅에 새 시대가 시작되었을 알려주셨다.

여명(黎明)은 하루가 시작된다는 표시이다. 빛은 어둠을 물러가게 하고 하루를 연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여신 빛이시다. 우리도 예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며 주님의 명령에 따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빛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빛이 비추어질 때 우리는 기쁨이 충만해진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에겐 구석구석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 주님이 비추어주시는 빛으로 우리의 얼굴에, 가정에, 나라에, 교회에 환한 빛이 비추어지길 기대한다. 우리의 삶과 심령과 신앙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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