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와 기독교
배춘섭박사(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교수)
서론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영화는 현대판 종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즉, 영화는 일상의 시공을 초월케 하여 다른 차원의 시공으로 인도하는 데 이것이 꼭 “종교와 유사한 행위”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Avatar)는 “종교의 아바타”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자요 비기독교인인 그가 이 영화의 3D 상영을 통해 무려 1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여 세계적인 흥행을 주도했다는 것과, 둘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란 존재는 현실을 초월해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자주 꿈꾸는데 이 비기독교적 영화가 한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개체이자 대안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국 CNN 방송이 보도한 것처럼, 영화를 관람했던 사람들이 영화 속 나비족의 ‘판도라 행성’에 대한 동경 때문에 적지 않게 우울증이나 자살충동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이를 정확히 반증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상적 쟁점들과 기독교적 시각에서 성경과 충돌되는 문제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곧 『아바타2』가 한국에서 또 다시 개봉된다고 하니,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영적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 이 영화를 기독교의 세계관 입장에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시놉시스(Synopsis)
영화 『아바타』는 지구의 자원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기 2154년 ‘자원관리개발부’(Resources Development Administration)가 우주의 다른 소행성인 판도라(Pandora)에서 대체 광물자원인 언옵타늄(unobtainium)을 채굴하려는 과정에서, 지구인들과 행성의 거주민인 나비족(Na’vi)과의 갈등을 토대로 내용이 시작된다.
행성 판도라에는 청색의 토착민 ‘나비족’들이 신성한 영혼들의 나무인 모신(母神) ‘에이와’를 숭배하며 살아간다. 이런 판도라의 행성은 지구와 달라 대기의 공기가 독성이 있는데 이로인해 인간은 산소마스크를 써야만 한다. 그러던 중 지구인 과학자들은 ‘아바타’를 계발하는데, 이런 아바타를 조종하려면 인간과 유전자(DNA)가 일치하여 정신교류가 가능해야만 한다. 이 때 ‘제이크 설리’(Jake Sully)는 전직 해병으로서 ‘하반신 마비’ 때문에 인간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하지만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그의 형이 갑작스런 사고로 죽자 형과 같은 유전자(DNA)를 지녔다는 이유로 아바타의 조종사로 선택된다.
그러던 중 제이크는 팀장 어거스틴박사와 인류학자 노옴 스펠먼과 함께 생물학 샘플과 데이타 수집을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제이크는 사고로 나비들의 공격을 받아 일행과 헤어지게 되어 숲을 헤매던 중 나비족 추장 에이투칸의 딸이자 여전사인 ‘네이티리’(Neytiri)와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는 네이티리가 거주하는 홈추리 본부에서 나비족의 방식으로 교육을 받으며 네이티리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 때 제이크는 한 동안 소식이 없었던 보안대장 콰리치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만약 자원관리개발부(RDA)가 홈추리에서 나비들을 내보내고 본부 밑에 묻힌 광물을 채광할 수 있도록 정보만 주면 자신의 다리를 치료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제이크는 네이티리와 가깝게 지내면서 RDA의 요청을 거부하고 나비족과 한 편이 되어 네이티리와 함께 행성침략자(지구인)들과 맞서게 된다. 결국 RDA 책임자인 셀프리지는 보안군에게 홈추리 파괴명령을 내리자, 그레이스는 아마도 홈추리는 판도라의 유기체가 연결된 생태계신경망의 진앙지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올수 있다고 충고하지만 셀프리지는 전쟁을 단행한다.
한편 제이크는 나비족인 오마티카야 족에게 자신들이 온 목적을 알리게 되는데, 이 내용을 들은 네이티리는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콰리치의 부대는 홈추리를 파괴하고, 네이티리의 아버지인 추장 에이투칸을 포함한 여러 나비족 토착민들을 사망케한다. 결국 제이크는 나비족의 신임을 회복하려고 목숨을 걸고 하늘을 나는 괴물 토루크를 훈련시켜 ‘영혼들의 나무’에 있는 오마티카야족을 찾는다. 이런 열정때문이었는지 제이크는 네이티리와 새 종족 지도자 추테이의 도움을 받아 여러 종족출신의 수 천명의 전사들을 모아 인간용병들과 접전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나가기 전 ‘에이와’와의 교감을 통해 나비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반면 콰리치는 ‘에이와’ 나무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나비종교와 문화를 무력화시키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보안부대의 공격 때문에 나비들은 심한 타격을 입게 되지만, 갑자기 판도라의 야생동물들이 전쟁에 함께 가담하면서 전쟁의 판세는 뒤바뀌게 된다. 제이크와 나비의 종족들이 지구인 세력을 꺾자 네이티리는 ‘에이와 신의 응답’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제이크는 보안군 폭격기가 ‘영혼들의 나무’를 공격하기 직전에 상대의 폭격기를 파괴시킨다.
다른 한편, 콰리치가 아바타 링크의 유닛을 찾아내어서 제이크의 인체를 공격하려하자, 네이티리는 그를 죽인다. 전쟁 막바지에 네이티리와 제이크는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네이티리는 생전 처음으로 제이크의 인체를 목격하게 된다. 전쟁 후 셀프리지와 남은 RDA 세력은 판도라에서 추방되지만 제이크와 노옴과 기타 과학자들은 남도록 허락을 받는다. 결국 제이크는 오마티카야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의 제식에 의하여 인체로부터 나비 아바타로 영구 변신하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인간사회를 대표하는 ‘제이크 설리’와 나비족 ‘네이티리’의 교감과 갈등 그리고 화해를 그려가면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현대문명과 원시문명으로 구분된 사회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은 과연 함께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현대화 된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을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주요 쟁점들(Main Issues)
영화 아바타는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대중적 호응만큼이나 이에 걸 맞는 다양한 쟁점과 담론들을 제시하였다. 이런 쟁점들로 인해 이 영화는 여러 계층의 사회적, 정치학적, 종교적 관심의 반영과 함께 강도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필자는 상당히 다양하고 혼합적인 세계관과 사상이 영화에 복합적으로 묻어났다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관객들이 더 몰입해서 흥미롭게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이유도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내는 매개 장치와 사회적 관심 등 많은 다양한 쟁점들(issues)이 내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사회-정치학적 측면에서 이 영화는 각 국의 사회적 쟁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인실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실제, 영화 속 지구인들과 나비족의 전쟁 장면(Scene) 중 자원관리개발부의 용병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비족을 폭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평론가 존 놀티(Nolte)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명백한 정치적 영화”라고 언급했고, 존 포도레츠(Podhretz)는 “아바타 영화는 반미주의에 대한 표현”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가장 민감하게 이 영화에 반응했던 나라는 가히 중국일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영화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2D 아바타 영화를 전국적으로 상영을 금지시킨 바 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속내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실상을 보면, 중국정부는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소수민족들과의 여러 마찰 속에서 그들에게 가했던 강압적 진압이, 마치 영화에서 토착민 나비족을 강제로 철거시켰던 용병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에 상영반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종교학 분야에서 보아도 세계관의 다양성과 혼합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 측면에서 볼 때 캐머런 감독은 모든 종교의 사상들을 혼합하여 다원주의적이고도 비기독교인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한 마디로 민속학, 종교학, 철학, 지질학, 고고학 등의 지식을 총집합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생산해 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푸른 빛깔의 나비족 모습의 『아바타』는 전통적 인도종교인 힌두교의 아바타 사상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본래 『아바타』는 힌두교의 ‘파니니’ 경전에서 ‘신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강림’이나 ‘환생 혹은 현현’을 가리켰던 용어로서,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를 뉴에이지 사상에서는 ‘선각자나 스승’의 뜻을 지닌 단어로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아바타는 인도의 세 신들 즉, 비슈누(Visnu)와 브라흐마(Brãhma)와 시바(Shiva) 중 비슈누와 밀접히 연관되어 사용된다. 왜냐하면 힌두교에서 비슈누는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세계에 내려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도움을 주는 신으로 이해되는데, 그렇게 강림하고 현현하여 변한 모습을 일컬어 아바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셋째, 세계관에 대해서라면 뉴에이지 사상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 속에는 뉴에이지, 즉 범신론 사상이 짙게 깔려있다. 범신론이란 자연을 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그 사상적 출발점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 외(外)의 동서양철학이나 종교사상을 보면 범신론적 사상체계의 다양한 신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자연물을 인간보다 위대한 신으로 여겨 자연을 의인화하여 신으로 섬기는 경우나, 어떤 보이지 않는 정령(anim)을 믿는 샤머니즘과 조상숭배 형태의 신앙적 형태까지 다양하다. 쉽게 말하면, 범신론자는 인간과 자연계를 하나의 뭉쳐진 종교공동체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신론자들은 창조자로서의 인격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유는 창조자가 세상을 창조할 때 전체의 존재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합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창조자는 피조물을 창조하자마자 전체 존재의 한 부분이 되어 종속되고, 스스로 제한적 존재가 되어버리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부분으로서 종속되거나 제한되는 창조자는 절대자가 될 수 없고, 우주 만물이야말로 신성이 깃든 신들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힌두교를 신이 무수히 많다고 해서 다신교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힌두교는 엄연히 자연주의 일원론에서 출발한 범신론적 사상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동물, 자연계를 엄격히 구분하는 기독교와는 달리 힌두교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범신론적 사상으로서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브라만에 의해 창조된 우주만물은 동시에 브라만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브라만은 하나의 인격적인 신이라기보다 ‘신성한 절대원리’, 또는 ‘실존자체’를 의미한다. 즉, 힌두의 무수한 신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자 브라만의 여러 기능과 형상이 제각각 나타난 아바타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화 『아바타』가 생명존중을 강조한 것은 모두 힌두교의 가르침, 즉 범신론 사상을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비족이 자연계의 동식물과 소통하며 그 생명을 존중하는 것처럼 힌두교들고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존재로서 다 함께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즉, 인간과 동물은 현생에서 쌓은 삶의 결과 즉, 카르마(업보)에 따라 환생하는 과정에서 인간이나 동물로 다르게 태어날 뿐이다. 그래서 힌두교의 일파인 자이나교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지극한 존중과 비폭력을 통해 영혼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나타난 신성한 영혼들의 나무(tree of souls), 즉 여신 ‘에이와’는 인격적인 존재라기보다 모든 생물들 속으로 에너지를 흘려주는 힌두교의 브라만과 같은 ‘에너지의 생성지’와 같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겠다.
문제제기(Problem Statement)
이런 쟁점들 속에서도 영화 『아바타』는 인간실존의 회복을 위해 거듭남과 희생정신이라는 기독교적 정신을 매우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기독교의 일반은총뿐 아니라, 타종교의 윤리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환언하면, 이 역시 기독교적 메시지의 정수라고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성경과 충돌하는 세계관, 즉 비기독교적 신앙체계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기독교적인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육체가 없는 인간이 아바타를 입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영혼이 없는 아바타는 물질로만 존재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아바타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가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데, 이런 아바타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을 활짝 여는 ‘신비스런 문’의 기능을 감당한다. 즉, 이 영화는 육체 없이 아바타를 입고 영혼의 상태로서 ‘활동하는 사자’(the living dead)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세계관이 밑바탕에 존재한다. 바로 이런 사후세계와 죽음에 대한 해석차이 때문에 기독교와 영화 『아바타』가 서로 융합되거나 화해할 수 없는 가장 걸림돌이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종반에 가면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가 자신의 육체를 포기하고 나비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데, 마지막에 이교의 제식에서 리드 과학자 역시 그들과 함께 이교도가 되는 영화의 한 장면은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다준다. 물론 감독의 바람은 관객들로 하여금 끝까지 아바타와 마음을 같이 하여 이교제식까지 관객의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결론적 메시지는 ‘죽음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다’라는 점이다. 오히려 죽음은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내지는 ‘또 다른 삶의 연장선상’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이 영화는 담아내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기독교 외(外) 타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윤회’와 원시토착종교의 ‘죽음’에 관한 사상들을 한데 묶어 놓은 종합물인 것이다.
둘째, 신성한 영혼들의 나무인 ‘에이와’는 비기독교적 여신숭배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바타에는 장면마다 여신숭배의 상징들이 나타난다. 이런 상징들로는 주로 나선(spiral) 모양의 식물로 자주 나타나는데 이런 모양새는 나비족이 거주하고 있는 홈트리(Home tre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이 여신숭배 사상에 해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겠다. 과연 여신숭배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신성하고 거룩한 종교인가?
이 점에서 기독교비평가 조 쉬멀은 말하기를 “캐머런 감독은 원주민 종교가 무해하다는 거짓말을 한 반면, 멜 깁슨 감독은 마야 사제들을 피에 주린 제신들에게 붙들린 존재들로 묘사한다”고 했다. 또한 해럴드 퍼거슨도 “세계 고대문화 역사에 나타난 여신숭배는 가장 피상적으로 관찰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인간의 희생제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신숭배사상에는 사랑스럽고 정겹게 인간을 돌보는 신의 묘사가 없다”라고 말했다. 즉, 고대의 아즈텍문명, 마야문명, 잉카문명에서 발견되는 제신들은 모두 인간희생을 요구하는 ‘악령들’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교적 여신숭배사상을 ‘에이와’라는 이름으로 ‘야웨’ 혹은 ‘여호와’와 비슷한 이름으로 기독교화 하여 신성함과 거룩함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던 이 영화의 거짓됨을 바르게 분별해야 하겠다.
셋째, 영화 『아바타』는 범신론과 관계된 애니미즘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비족은 신성한 영혼들의 나무(에이와)에 주위로 모여서 양팔을 뻗어 서로가 서로의 몸을 접촉함으로써 거미집 같은 영적 소통의 망을 이룬다. 이는 생명의 망으로서 자연으로부터 생명(에너지)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에이와의 연합을 통해 신성한 정령들과 소통을 상징한다. 이렇듯 이 영화는 자연주의, 샤먼이즘, 애니미즘, 윤회적 세계관,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정령주의 의사소통,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범신론적 사상이 비기독교적 세계관으로서 영화의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아주 중요한 쟁점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사회정치학적, 종교학적, 세계관의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특히 종교학적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과 비추어 살펴보았을 때, 이 영화는 성경의 세계관과 충돌되는 커다란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육체가 없는 인간이 아바타를 입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이요, 둘째 여신 ‘에이와’라고 불리는 신성한 영혼들의 나무를 통해 본 비기독교적 여신숭배사상이 실은 역사상 잔인하고 더러운 종교이자 범신론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독교의 ‘여호와’나 ‘야웨’와 연관되어 거룩함이나 신성함을 연상시키는 거짓된 미화작업이요, 마지막으로는 범신론과 관계된 애니미즘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만물에 흡수되어 피조세계와 하나 된 정령주의로서 하나님을 대체하고자 했던 신화화작업 등을 중요한 문제로 볼 수 있겠다.
물론 이 외에도 비기독교적 신앙체계들이 더 있지만, 아무튼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Avatar)는 충분히 “종교의 아바타” 역할을 감당했음을 이상 살펴보았다. 이제 영화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게 되었다. 엘리아데의 지적처럼 영화는 현대판 종교이자,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오는 강력한 소통의 매개체이다. 한 마디로 영화에 담긴 세계관을 분별하여 읽어내지 못하면, 관객은 영화에 담긴 세계관에 따라 무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계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문화 안에서 상대적 가치를 좇아 기준이 없는 세속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절대가치인 성경을 좇아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구하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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