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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저주

예림의집 2012. 3. 29. 05:18

세 가지 저주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는 신학자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믿어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버림받은 심령이다. 둘째,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지식적인 책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한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와야 한다. 이것이 안 들리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원망과 불평뿐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노라.(빌 1:4)” 무슨 일을 생각할 때마다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다.

 

    작년 2월에 우리 부부가 어느 마을에 전도를 하러 갔는데 늙으신 할머니 한 분이 보일러 시설도 안 된 콘테이너 집에서 살고 있어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우리를 집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으나 목사님의 간곡한 말에 문을 열어 주셨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온통 냉방이었다. 이유인즉슨 큰아들이 돈이 필요하자 형제들에게 어머니 집이 너무 낡았으니 고쳐주자고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 돈을 자기가 가져다가 자기가 써버렸다.

 

 

    그리고나서 헌 집은 헐어버리고 값이 싼 중고 콘테이너를 한 채 사서 살라고 이렇게 마련해주었노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식 다 쓸데없다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탄을 하셨다. 작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할머니는 추위에 질려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노라고 하셨다. 마침 건축 기술이 있는 목사님은 할머니께서 따뜻하게 살 방도를 제안하였다. 재료비만 들여서 집을 한 바퀴 스티로폼을 두툼하게 넣고 벽돌로 쌓고 미장을 하면 된다고 하였더니 할머니께서 제발 그렇게만 해주면 교회를 잘 다니겠노라고 하셨다. 목사님은 너무 신이 나서 봄이 되자 장로님과 둘이서 일주일동안 그 일을 했다.

 

     그리하여 할머니께서는 집이 따뜻하고 아늑해서 좋다고 하시면서 교회를 나오셨다. 그러나 귀도 어둡고 마음은 딴 데에 있는 할머니는 예배 시간에 전혀 말씀을 듣지 않으셨다. 여름에는 예배 시간에 말씀은 안 듣고 파리를 잡으려고 두 손을 모으고 파리를 따라 두리번거려서 장로님 부인이신 김권사님이 집에 가는 동안 예배 시간에 그러면 안 된다고 했더니 그 다음 주에는 교회를 안 나오셨다. 심방을 했더니 “지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지가 뭘 안다고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해?” 하면서 이제 교회를 그만 다니겠노라고 하셨다. 간신히 달래고 천국에 가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여 다시 교회를 다니셨다.

 

     그러더니 가을이 되니 텃밭에 심어 놓은 곡식을 거둬야 한다면서 빠지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빠지고 하셨다. 다시 심방을 했더니 할머니께서는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사실은 내가 예수를 안 믿어. 안 믿어져. 목사님이 우리 집 고쳐주어서 고마운 마음을 갚으려고 몇 번 나갔지 어디 내가 믿음이 있어서 나갔나? 그리고 천국이 있다고 하는데 누가 봤어? 죽어봐야 알지 그걸 어떻게 믿어. 교회 가면 내가 괴로워. 믿지도 않으면서 오래 앉아 있으려니 몸이 여기 저기 쑤시고 그래서 못 가는겨. 하여간에 목사님께는 미안혀. 우리 집 고치느라고 그토록 고상허셨는디. 내가 언제 한 번은 나갈 테니까 나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심려 놓으시고 다른 사람들이나 전도혀봐.” 라고 하셨다. 우리는 너무 어이도 없고 마음이 아파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그 할머니를 생각하노라니 우찌무라 간죠의 세 가지 저주 중에서 첫 번째 저주가 떠오른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 저주이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맞은편에 누군가가 포장마차를 치고 장사를 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메추라기 농장을 하는 어느 분이 메추라기 알을 다 낳은 폐 메추라기를 잡아서 싸게 팔고 덩달아 술장사도 한다는 것이었다. 장사가 제법 되었다. 의외로 메추라기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 교장선생님이 메추라기 고기를 엄청 좋아하여 내가 그걸 선전한 값으로 매 번 사다 주느라고 고생 깨나 했다.

 

      그 집에서 메추라기를 몇 번 사느라고 얼굴을 익히게 되어 알고 보니 남자는 이 마을이 고향인데 학생 시절에 우리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청년이 된 후에 도시에 가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한다고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다 실패하고 아내와는 이혼도 하고 지금의 여자를 만나 고향에 와서 메추라기 농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와 얘기를 나누고 지금이라도 다시 신앙생활을 회복하시라고 했더니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그 농장에서 메추라기를 잡는 일을 하는 조선족 3명도 주일이면 우리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가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남자는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포장마차에 일부러 찾아가서 여자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녀도 가끔 교회에 나왔다. 그러나 웬 일인지 늘 시큰둥하였다. 우리가 찾아가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반가이 맞아 주기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리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느껴지곤 하였다. 하여튼 수없이 찾아가서 전도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큰 사고는 아니었으나 원래 허리가 안 좋은데다 다시 교통사고로 허리가 놀라서 통증이 심하고 꿈쩍을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는 몸이 약하니 마음도 약해져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병원으로 찾아가서 전도를 하여 여러 명을 교회로 인도하곤 했다. 우리는 그 날도 기대를 하고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가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병문안까지 올 줄은 몰랐다면서 고마워하였다.

 

      그리하여 긴 시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드디어 그녀가 진실을 밝히게 되었다. 그녀는 젊어서부터 친구들과 친척들의 권유로 교회를 나가 보았는데 교회의 예배를 참석할 때마다 아무리해도 목사님 말씀이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목사님 말씀만 들리면 믿어지겠지 하고 차츰차츰 앞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 봐도 전혀 말씀이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머리만 지끈거리고 아파서 예배에 참석한 날이면 몸살이 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 그렇게 세월을 보냈는데 몇 년 전에 어떤 계기로 자기 몸속에 신(귀신)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기에게 전도를 그만하라고 하였다. 그녀는 “저는 제 몸속에 어른을 모시고 있어요.” 라고 했다. 우리는 어안이벙벙하였다. “아, 요즘에도 저런 일이 있다니. 신 내렸다는 얘기는 옛날에만 있는 일인 줄 알았더니.” 그리고 감사하였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저주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어느 분은 봉사도 열심히 하고 교회의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데 예배 시간만 되면 꾸벅꾸벅 존다. 그녀는 몇 십 년을 그렇게 존다. 초보 신자가 안타깝게 여길 정도로 그녀는 존다. 졸고 나서는 그 일을 만회하려고 그러는지 더욱 더 열심히 봉사를 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건 영적인 일이므로 설명해도 안 되고 비난으로도 안 되고 경고로도 안 되고 오로지 그녀의 영이 치유를 받아야 하는데 말씀을 안 들으니 영의 치유도 안 일어난다.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닐 뿐이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어찌 되었든 예배 시간은 안 빠지고 참석한다는 것이다.

 

     우찌무라 간죠가 말한 세 가지 저주 중에서 셋째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엄청 많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금 항아리를 집안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런 부류가 아닌지 장담할 수는 없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이후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나의 오빠네는 둘이 맞벌이로 작은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재산을 갖고 살고 있지만 자기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어느 날 친정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야야, 늬 올캐가 저번에 나보고 10만원을 꾸어달라고 하더라.”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 화가 나서 “아니, 둘이 그렇게 벌어서 돈 다 뭐 했길래 가난한 어머니보고 돈을 꾸어달래요?” 라고 했더니 그 당시 큰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그 대금을 치르느라고 돈이 궁하다고 하였다.

 

 

 

     오빠네는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다가 다시 다른 새 아파트를 분양받기를 반복하였다. 항상 이전의 것 보다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곤 했다. 어디까지 가야 끝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겠지 라고도 생각했다. 어머니로부터 오빠네가 새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고 그들의 삶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오빠네가 아파트가 몇 채인지를 알지 못한다. 아무튼 그것에 관심도 없고 도시 사는 사람들 아파트 몇 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기니까 아예 나에게는 말을 안 해준다. 가끔 어쩌다가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듣고는 내가 핀잔을 하니 어머니도 내 앞에서 그런 얘기를 안 하려고 하신다.

 

     내가 아는 사모님이 저번에 만났을 때 자기들 남매 얘기를 했다. 마침 그 전날 남동생이 신축한 큰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는데 목사님인 남편이 이사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왔다는 것이다. 어찌나 넓은지 거실이 운동장만하고 앞 쪽의 통유리로는 멋진 풍광이 훤히 펼쳐져있어 정말이지 잠시 동안은 부럽더라는 것이었다. 그 사모님은 미 자립 시골교회의 조립식 사택에서 사는데 잠간 아삽처럼 실족할 뻔 했더란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시73:2~5)”

 

     그들 남매는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는데 그분은 친어머니보다도 더 자상하게 그들을 신앙 안에서 사랑으로 키우셨단다. 특히 아들이고 더 어린 남동생에게는 딸이고 누나인 자신에게 보다도 더 신경을 쓰셔서 보살폈다고 한다. 대부분 어렵게 살던 그 시절에 자기네들은 새 옷, 새 가방, 새 신발, 새 장난감 등을 다 누리며 어린 시절을 보내어 가난이 뭔지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메이커 신발을 신고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자기네들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새어머니가 자기가 배 아파 낳지 않은 의붓자식들에게 의붓어미 표시 안 나게 얼마나 노심초사하시면서 그다지 넉넉지 않은 살림을 하면서도 자기네들에게는 보족함 느끼지 않게 하느라고 고생을 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노라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어머니에게 잘 해드리려고, 조금이나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끔 동생과 만나 대화중에 언뜻 언뜻 동생의 말에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자기에게 안 해준 것들을 기억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평생 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 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불행하다.” 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사랑, 똑같은 보살핌,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동생은 어린 시절의 부모님에 대한 섭섭했던 것만을 기억하고 지금도 더 달라고 칭얼거리는 반면, 누나는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에 감사하여 늘 되새기면서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 예배를 드리는 날, 아버지께서 딸에게 “너희들 교회 차가 오래 되어 시동이 자주 꺼지곤 해서 올해에는 꼭 차 한 대 사주려고 맘먹었는데 부득이하게 이 아파트 사느라고 다 들어가서 못 사주게 되어 미안하다.” 라고 하시더란다. 동생네는 전에 살던 아파트도 넓고 좋았는데 더 넓고 새로 지은 아파트를 분양받느라고 돈이 모자라 부모님이 살던 낡은 아파트를 처분하여 합치자고 하여 두 아파트를 팔아서 이번에 졸지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을 물질로 채워서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은 밑이 뚫린 항아리임에 틀림없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사해바다처럼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너무 짜서 먹을 수도 없고 고기 한 마리 살 수 없는 불모의 바다가 되듯이, 인간의 마음도 채우기만 하고 흩어 구제하지 않으면 짠 자린고비가 되어 아무도 그와 사귀지 않으려 하여 금 항아리를 글어 안은 채 평생 외롭게 살아간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4~25)” 성경은 우리에게 바르게 사는 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악한 인간은 성경 말씀을 읽기는 읽어도 눈을 감아버리고, 듣기는 들어도 귀를 막아버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싫어하여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게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