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죽어야 할 습관 "순간의 판단"|
사람은 타인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우리는 매일을 스스로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정죄함을 생각하고 반성 해봐야 할듯 합니다.
우리는 거듭나기 전에 항상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내가 못하니 남도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님도 그렇고 교회의 교인들도 그렇고 믿기지도 않는거 억지로 믿고있다 생각합니다.
교회가 다 썩어 빠진것 같이 느낍니다.
목사님은 장사하고 있고 성도들은 헛된 양식 먹으며 이미지 관리 하느라 바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스로 회개했다 판단하고 거듭났다 판단해서 말씀이 좀 들린다 싶으면 또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나는 하는데 남들은 왜 못하냐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교회가 다 썩어 빠진것 같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목사님은 장사하고 있고 성도들은 헛된 양식 먹으며 헛된 믿음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함은 그 끝이 보이기나 할까요?
우리는 정말 거듭난게 맞을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이전의 내가 완전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변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과 똑같은데 무슨 근거로 거듭났다 생각 할까요?
예전에는 이해 안되던 말씀이 조금 이해 된다고 해서 거듭남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을까요?
거듭남이 믿음도 없이 갑자기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 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 하나님을 믿은것이 아니고 바로 나 똑똑한 자신을 믿었던 겁니다.
믿음없이 거듭남은 있을수 없고 더더욱 회개없이 거듭남은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절대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먼저 제 자신에게 스스로 부탁하고 성도님들께 부탁 드립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우리 부터 변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죽여도 계속 고개를 내미는게 우리의 연약함이며 죄성입니다.
내가 변하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달라 보이고 모든 세상이 다 달라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전에 나는 죽고 주님의 능력으로 다시 산 나는 보는 눈도 달라져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사님들도 사람이고 직분있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도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진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분들도 매일 자신의 연약함과 싸우며 내 생각과 달리 죄성이 드러나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생활을 하고 계실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배로 커집니다.
하지만 나와 똑같다는 생각을 가지면 분노도 작아 질 것이고 실망도 작아 질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나는 맘에 드는 이 교회 저 교회 찾아 다니면서 인생 다 끝날 것입니다.
이렇듯 보면 우리도 그들과 다를바 없는 사람과 교회에 의지하는 연약한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죄하기 시작하면 필히 그 정죄는 나에게 불화살이 되어 돌아옵니다.
불화살에 맞아 방황하는 영혼들은 신앙생활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인생이 황폐 해질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을 사람에게 의지해 이 목사, 김 목사, 박 목사 여기저기 찾아 다니게 됩니다.
내 맘에 드는 교회나 목사님을 못찾게 되면 자극적인 이단에 빠져 영육이 전부 죽을수도 있습니다.
거듭남과 구원은 개인적인 역사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우리 믿음을 좌지우지 못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듣고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의 설교나 안수에 내가 변했다면 나는 또 다시 사람의 설교나 안수에도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데 왜 사람에 의해 믿음이 좌지우지 되어야 합니까?
이런 경우는 은사 받았다며 기뻐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내가 내 힘으로나 타인의 힘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말씀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해 믿어보자는 생각 때문에 믿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부인하고 목사님 부인하고 홀로 개인적인 신앙생활 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 안에서 설교를 듣고 교제하며 삶속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하자는 것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자는 의미입니다.
거듭나 내 마음이 변하면 분명히 생각도 반대로 변합니다.
이미지 관리하며 믿는 것이 아닌 믿고 싶은데 잘 안되는 불쌍한 영혼으로 보일 것입니다.
탐욕을 없애고 싶은데 영육이 연약해 콘트롤 못하는 불쌍한 영혼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돈 많고 권력 부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닌지 알고 있으니 그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걱정되어 불의의 목회자를 못보겠어서 정죄밖에 못하겠다면 말을 삼가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정죄가 정죄를 낳는 법입니다.
정죄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넷을 낳고 넷이 여덟을 낳고 여덟이 열 여섯을 낳습니다.
믿음없는 성도들은 정죄를 보고 자신도 뭔가를 알았다는 생각에
교회만 가면 트집잡을 궁리만 하고 믿음생활은 뒷전에 둘수 있습니다.
남들이 못보는 것을 내가 보고 있으니 자신이 슈퍼맨이라도 된듯 사도라도 된듯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성도들이 그럴듯한 이단에 빠진다면 그 정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말 한마디로 사람의 영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성도 들먹이며 정죄하는 사람은 이렇듯 믿음생활에도 관심이 없거니와 성도들 생각은 눈꼽 만큼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세라며 말들이 참 많습니다.
글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이 주님 손을 잡아 끌고 올것만 같습니다.
성경 구절 들먹이며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이야기는 하는데 그들은 언제 오실지 알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지만 진짜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복음 전할 생각은 일단 최선이 아닌듯 하고 자꾸 무서운 이야기만 하며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믿음도 없이 뭔가를 하면 주님께서 인정하십니까?
노력으로 천국티켓 얻을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 한 부분이 세상 이길힘도 없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무조건 이기라고 하면 이겨 지냐는 말입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항상 최선이고 순서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 분별하라고 하면 분별이 될리가 없습니다.
일단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래야 뭔가를 보고 분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려움에 시작된 믿음은 강압이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또 하나 깨어 준비하면 환난 전에 들림받아 안전하게 보장 받는다는 이야기들을 하십니다.
크게 관심없는 이야기 이긴 하지만 일단 그 이야기가 맞다고 칩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대체 깨어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예언 성취보며 긴장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까?
주인이 외출 했는데 일은 뒷전에 미루고 계속 먹고 자고 있다가 곧 온다는 전화받고 긴장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요행입니다.
이런 종은 주인이 늦어 다른 종이 예전 경험 얘기하며 오늘 안오실것 같다 하면
그말에 넘어가 또 일은 뒷전에 미루고 다시 먹고 자기만 합니다.
갑자기 주인이 닥치면 용서를 구하지요.
이렇듯 두려움에 의한 강압적인 믿음은 누가 잡아 뽑으면 바로 뽑힙니다.
진정 깨어있는 종은
주인이 외출을 해도 묵묵하게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고 쉴때는 쉬며 주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에 의한 믿음은 누가 옆에서 무슨 말을 하건간에 주인의 말만 믿고 순종합니다.
이런 믿음은 절대로 뽑히지 않습니다.
너무 멀리 간듯한 두서없는 글이지만 이것이 교계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부작용이 정죄로 부터 시작 될 수 있다는 것 그냥 눈감고 보고만 있을 일은 아닙니다.
나에게 정죄의 마음이 드는 순간 내 정죄로 인해 교계가 이렇게 되었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싸움하며 정죄 안하는 사람없습니다.
정죄하며 자기 못났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여기에 설득 당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똑같이 정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버려야 할 사람의 악행인 판단과 정죄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 처럼 이단, 삼단이 당당하게 활개치는 영적전쟁이 치열한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있는 정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권면이며 책망입니다.
사랑없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빛되신 예수님 안에 어두움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이단 분별은 걱정 안해도 된다는 뜻 입니다.
달리 이단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예수님 믿음위에 0.1% 이라도 더해서 가르치면 이단입니다.
믿음은 절대로 부자연 스럽지 않습니다.
무슨 무당이 신내림 굿 하듯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절대로 사람의 인생을 황폐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단은 사람의 육 뿐만 아니라 영까지 죽이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다 버리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이 진정 자유롭고 행복 해지기를 누구보다도 원하십니다.
성경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세요.
불행했던 삶이 변했으며 자유했으며 행복해 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참된 종이 됩시다.
주님께서 날 사랑하시듯 충성으로 주님의 일을 묵묵히 하며 기다리면 분명히 칭찬 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때가 안전하다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안전하다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항상 말세소동이 일어나면 이단이 판을 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악한 술수입니다.
아이러니 합니다.
그렇게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왜 하지말라 하시는 두주인을 섬기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상이 빗나가면 말을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세상에 섞여 즐기고 먹고 놀고 자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그들이 몸으로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상이 맞으면 천국에 갈수 있다 생각하고 예상이 틀려도 물질을 챙겼으니 나는 손해 볼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도 사상이 같고 그 사람을 믿으니 똑같이 행동합니다.
권면하는 형제를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까지 다 보시는 주님은 그들을 보고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이야기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때부터 예수님 믿음만 지키고 다른 어느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이 긴장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봐서 깨어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지키는 삶이 깨어있는 삶이고 분별하는 삶입니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다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라면 그 사람은 긴장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의 성취를 보며 기다리던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기쁨에 항상 하듯 말씀에 순종하며 예비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예언의 성취를 보며 인생이 죽을것에 두려워 하며 주님 발 앞에 복종하길 원하시지 않습니다.
무섭게 진노로 사단과 그 졸개들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 진노는 자녀에게 하시는 진노가 아닙니다.
부탁드리고 이 문제로 항상 기도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나의 죄를 알고 온마음 바쳐 회개 하셔야 합니다.
회개해야 거듭나고 주님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 피난처 되시는 주님안에 거하시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저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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