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예수님 손에 붙들린 보리떡

예림의집 2012. 1. 22. 09:33

예수님 손에 붙들린 보리떡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병을 낫고자 온 병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큰 표적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 앞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밥 때가 훨씬 지나도록 그들은 갈 수 없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너무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갈급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빌립에게 식사문제에 대하여 물으셨습니다.

나처럼 계산 빠르고 현실주의자인 빌립은 자기의 수준에서 재빨리 계산하여 도저히 불가능한 액수를 제시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한복음 6장 7절)" 안드레는 아이의 보잘것없는 보리떡 5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내놓으며 믿음 없는 염려를 했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한복음 5장 9절)"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서 그들은 쓸데없는 계산, 염려, 불가능을 붙들고 믿음 없음을 확실하게 증명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들이 귀신들려서 예수님께 나아온 아버지처럼,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제게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긴박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기보다는 믿음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도 없으면서 있는 척 의뭉 떨지 말고 내 마음 속에 예수님 임재해 주시라고 깊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착각하고 살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 버리셨건만 여전히 내 안에 계시는 줄로 착각하고 내 맘대로 하면서, 내 뜻을 이루려고 부단히 열심을 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자기를 속이고 있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버린 줄도 모르는 삼손이 "이번에도 내가 떨쳐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리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잘 아시므로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신 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붙들고 하나님께 축사하신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 손에 붙들리자 남자 어른으로만 세어서 오천 명 쯤 되는 사람들이 실컷 먹어 배를 부르게 하신 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을지 짐작이 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러 오면서 도시락을 준비해 온 어른이 한 명도 없었다니, 물론 그들 중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능히 자기들의 식사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 기대하고 왔을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단 한 개의 그 아이의 도시락은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인 모양입니다. 그 어머니는 그 보잘것없는 도시락이 예수님의 손에 드려져서 큰 역사를 이룰 줄 알았을까요? 저는 조금이나마 그 어머니의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올 수 없었겠지요. 가난한 과부였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일을 하러 가야만 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저는 그렇게 상상해 봅니다. 진심으로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어머니는 일을 해야만 했겠지요. 그래서 아이를 대신 보냈을 겁니다. 그랬기에 그 아이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겠지요. 그 아이의 도시락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에 어느 마을에서 예수님께 찾아와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며 울었던 이름 모를 여인이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처럼,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날 아침 보잘것없는 보리떡 도시락을 꾸리면서 자기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을 것 같습니다. 삼백 데나리온 되는 향유나 두 렙돈 쯤 되는 보리떡 도시락이 예수님에게는 같은 가치를 지니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자기의 가장 귀한 마음을 드린 것이니까요.


두 렙돈 쯤 되는 보리떡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될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주님은 보리떡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축사를 하셨습니다. 보잘것 없다고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고 맛도 없는 거친 보리떡이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께 먼저 드려지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니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낮아지고 부서지고 아무 존재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그때서야 하나님은 그를 쓰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는 출애굽기를 읽을 때마다 모세의 삶을 생각하면서 은혜가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학식이 필요했겠지만 하나님이 그를 쓰시기 위해서는 그는 낮아지고 부서지고 자신이 철저히 파괴되어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설적이십니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를 들어서 쓰십니다. 보리떡 같이 볼품없고 가치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수백 명의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보리떡이 되어 <소칠 마을>에서 <수암 마을>까지(우리 교회 구역) 열 마을의 수백 명의 사람들의 영혼에 들어가 양분이 되려는 열망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