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예림의집 2010. 11. 3. 12:05

세상에 살면서 평생토록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니겠는가?조금만 빚을 져도 허덕거리는데 평생을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인생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우리는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다”(롬 8:12)라고 피력하고 있다.

 

      특히 로마서 1:14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문자에서 무엇을 빚을 지고 있는지 앞 뒤 문장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또한 관주로 연결해 보면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는 말씀은 무엇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로마서 4:4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개역개정판에는 보수로)으로 여기거니와”로 되어 있는데 3783 o\feivlhma(오페일레에마) ‘빚, 빚진 어떤 것, 부과금, 실수’라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언급하는 빚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한 이 단어가 마 6:12에 주기도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는 문장에서 죄가 빚으로 용서가 탕감으로 번역되어져야 하는데 아직도 변함없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장에서 빚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 단어는 3784 o\feivlw(오페일로오) 빚진, 빚지다, 채무 하에 있다, 의무에 불성실하다, 직분을 다하다, 매어 있다, 의무를 지다, 죄 짓다, 필요하다, 해야 한다, 덕을 보다, 당연히 하다 √3786, cf 3785

3785 o[felon(오펠론) 내가 원하노라, 내가 해야 한다, 원하다, 오! 저런,

하나님에게 소망한다. 3784에서 유래 (고후 11:1)

3786 o[felo"(오펠로스) 유익, 얻음, 이익이 됨 (약 2:14)

o\fevllw(오펠로우) to heap up ‘축적하다, 모으다, 이익을 얻다’라는 다양한 뜻을 담고 있기에 여러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어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이 단어를 아무리 유추해 본다고 하더라도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 중 마 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른 종의 비유가 나온다. 24절에 빚은 3781 o\feilevtm"(오페일레테에스) 빚진 자, 소유주, 채무자, 게으른, 범죄자, 가진 자, 죄인 3784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27절에 “주인이 그(빚)을 탕감하여”에서 사용된 빚은 1156 da;neion(다네이온)빚 dano"(다노스)gift(선물), cf√1325 di;dwmi(디도오미)주다, (모험. 발생, 위탁, 허락, 방해, 관리, 제공, 취, 발언, 생산)하다, 넘겨주다, 만들다, 힘을 갖다, 놓다, 받다, 앉히다, 보이다, (손으로, 손바닥으로)때리다, 겪다(막 8:6, 눅 12:32, 행 2:19)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졌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탕감을 받았다면 자기 친구에게 백 데나리온을 꿔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빚을 갚지 못하도록 옥에다 가두어버렸다는 것이 아주 괘심하고 부당한 행위를 꼬집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단어들을 분석해 보면 빚을 탕감 받았기에 주인에게 굽실거리며 아양을 떨라는 차원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당당하게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악랄한 방법으로 더 나쁜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법을 이용하여 오히려 사람들의 목을 조이는 짓을 서슴지 않게 행하고 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양 거들먹거리며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실행해야 되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하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 일부가 목사로 살아가지 않고 그 보다 더 높은 위치에 거하고자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 너무나 가관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목사라는 호칭에서 나온 유머가 “목적 없이 사는 존재를 목사”라고 할 만큼 목사의 권위가 하염없이 추락되어 있다. 진정한 목사는 나무(木) 죽을 (死) 십자가 나무에서 죽어야 목사가 되는데 거기에 덜 죽어서 돌아다니는 시체와 다름없다. 심지어 목사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러워 목사 호칭을 떼었으면 할 정도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 중세기 교회역사에서 교황의 타락과 그에 따른 사제들의 문란한 생활은 하늘을 찔러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무리 종교개혁이 일어났더라도 왜 지금에 와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물론 기독교가 가질 수 있는 특권 속에 성숙해 진면도 있다. 그러나 지붕을 벗길 수 있는 믿음을 찾아 보기 힘들어 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내 생각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짐승의 속성들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벗겨내야 되는 데 오히려 더 많은 생각과 고민에 빠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더욱 똑똑해지고 영리해져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지지 않고 이 세상의 정보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하나님 앞에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까지도 바보가 되거나 어리석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귀사탄이 더욱 영리해져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하나님 앞에 계산적인 신앙을 갖고 있음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계산적으로 축복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시는가?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지혜가 필요하고 지식정보로 인해 판단력과 통찰력도 필요하다. 심지어 하나님 이름을 빙자하여 예언을 해서 미래를 알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기도하고 신통력이 있는 무당 짓을 하는 거짓선지자들에게 찾아가 돈을 바치면서 얄팍한 앞 일을 점쳐 보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있다.

 

     그들을 찾아 가지 말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 속에 직관력을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런 신통력을 가진 그들이 죽어버리면 누구한테 가서 알아보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본질과 원형을 찾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낮은 차원에서 머물다가 껑충 뛰어 높은 차원으로 올라서 넓고 높은 세계를 맛보게 된다.

 

    또한 자신의 심령뿐만 아니라 타인의 심령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방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털도 안 뽑고 닭을 잡아먹기를 원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을 원하는 놀부의 심보를 버려야 한다. 그냥 바보처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겠지만  바보는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진정한 바보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빚진 자는 과연 무엇에 빚진 것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빚진 자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마땅히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기독교라는 미명아래 얼마나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지 말 안 해도 다 알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선교’라는 단어가 “용서”라는 원어에서 나왔는데 “멀리 보낸다”는 뜻이 있다. 누구의 잘못을 바다 저 멀리, 하늘 저 높이 던져 버리는 것이라면 용서를 마땅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탄만 하지 말고 개혁을 해야 되겠다고 외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상한테 가서 찾으려고도 하지 말라. 이미 말씀을 하셨는데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찬 것을 보여주려고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독특한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냥 평범한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데도 희한한 것을 해보려고 안간 힘을 써보지도 말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도 이것 말고 다른 것을 해보려고 난리다. 생명과 영생이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해야 되는데 썩는 양식을 위해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는지 너무나 한심하다.

 

     진정 개혁을 외치기 전에 회개하자고 성토하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목회자가 마땅히 할 일을 찾아 나선다면 빚진 자로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시고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찾을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함께 탄생하시고 십자가에서 함께 죽으시고 함께 부활하시어 함께 보좌에 앉아 있음을 믿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빚을 갚는 것이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뜯어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그 믿음이 바로 빚진 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영적으로 중풍병자가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의 일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믿고 남을 믿으며 세상의 정보나 지식에 끌려가고 있는 중풍병자들이 즐비하다.

 

    성경공부하자고 하면 무엇이 그리 바쁜지, 중풍병자를 찾아 예수님 앞에 인도하자 하면 무슨 핑계가 그렇게 많은지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목회자 네 명이 없는가? 아브라함 시대 소돔 땅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전국에 각 도마다 네 명만 있어도 아니 한국 안에서 네 명만 있어도 중풍 병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기적들이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빚진 자는 빚을 크게 탕감 받아 본 분 외에는 없을 것이다. 과연 나는 얼마나 탕감을 받았는지 처음 사랑을 살펴봐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