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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서론

예림의집 2010. 6. 17. 11:47

◐이사야서◑

 

이사야는 종종 “선지자의 왕자”라고 불린다. 이사야서의 장엄한 흐름과 공의와 구속의 주제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때문인데, 메시야와 메시야 시대에 대한 위대한 예언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사야서는 성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39장까지는 유다와 주변 국가들의 부도덕과 우상 숭배에 관한 심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나머지 66장까지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예샤이아(yeshaiah)에서 비롯된 이사야라는 이름은 이 책의 내용을 적절히 요약하고 있다.

 

저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다른 저자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없다. 이사야서의 통일성은 현대에 와서 학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학자들은 이사야서 1장부터 39장까지는 이사야 자신의 작품이지만, “제2 이사야”라고 불리는 40장부터 55장까지는 바벨론에서 무명의 선지자가 썼고, “제3 이사야”라고 불리는 56장부터 66장까지는 팔레스틴에서(B.C. 약 460-445) 또 다른 무명의 선지자가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이사야서를 문체, 역사, 신학이라는 중요한 차이에 따라 1장에서 39장까지와 40장에서 66장까지로 나누고, 더 나아가 40장에서 66장까지를 바벨론 포로기를 반영하는 부분과 포로기 이후를 반영하는 두 부분으로 각각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사야의 통일성에 반대하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주장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에 반대하는 강력한 주장들도 이사야의 문학적 통일성에 의하여 전개될 수 있다. 각 부분들마다 약간의 차이점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차이점들보다는 이사야서 전체에 걸친 문장 양식의 유사성들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여기에는 사상, 이미지, 수사법, 독특한 표현들, 지방색 등의 유사성들도 들어간다. 전반부가 좀 더 간결하고 이성적인 서술인 반면, 후반부는 화려하고 감성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심판과 위로라는 서로 상이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이사야 선지자가 베벨론 포로와 고레스 통치 하의 귀환을 예언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사야서의 일부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시대보다 나중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이 불가능하다는 독단적인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이런 이론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 있었고,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삶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모든 것이 예언되고 성취된 것을 생각하면, 다수의 저자가 기록했다는 이론보다는 한 명의 저자가 기록햇다는 생각이 그나마 문제를 감소시킨다.

이러한 합당한 이유로,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에 예루살렘에서 예언했던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자신의 이름을 딴 이사야서의 저자라고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이사야는 뛰어난 유대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가 받은 교육은 인상적인 어휘와 문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사야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외세와의 동맹을 반대하는 그의 권고들은 언제나 잘 수용되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도 역시 선지자였으며, 그는 적어도 두 아들의 아버지였다(7:3, 8:3). 이사야는 대부분의 생애를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유대의 구전은, 악한 왕 므낫세의 통치 동안에 박해자들이 이사야를 두 번 톱질했다고 말한다.

 

기록 연대

이사야의 긴 사역은 B.C. 약 740년부터 680년까지 이른다(1:1). 그리고 이사야서는 분명히 이시기에 기록된 예언서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웃시야 왕 통치(B.C. 790-739) 말기에 사역을 시작했으며, 요담(B.C. 739-731), 아하스(B.C. 731-715), 히스기야(B.C. 715-686) 왕의 통치기를 거쳐 계속 사역하였다. 37장 38절에 기록된 산혜립의 죽음(B.C. 681)을 보면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보다 몇 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의 왕위는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폐지하고 분명히 이사야의 사역을 방해했던 그의 사악한 아들 므낫세에게 B.C. 686년에 계승되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기간에,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의 통치 아래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동쪽 정벌을 끝낸 후 서쪽으로 눈을 돌려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북 이스라엘(B.C. 722-21)을 비롯한 많은 작은 나라들을 정복했다. 비록 남 유다에서 사역했던 이사야였지만, 동시대에 살았던 호세아, 미가와 마찬가지로 그도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를 예언했다. 남 유다도 이웃 형제인 북 이스라엘의 죄들을 좇고 있었다. 사마라아와 북 이스라엘의 명망 이후, 그는 그 당시 가장 직접적인 위협이었던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제와 문학적 구조

이사야서는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심판에 대한 예언(1-35장), 역사적 삽화 또는 에피소드(36-39장), 위안과 위로의 예언(40-66장)이다.

이사야의 메시지는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의 “황금기” 이후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선포되었다. 농업과 상업의 성공으로 인한 번영과 군사적 성공은 부도덕, 과음, 우상 숭배,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 탐욕, 사람들의 욕망에 영합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수반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이사야는 (1) 믿음을 통한 구원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윤리적 생활의 필요 (3) 인간의 죄와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1-35장) (4) 회개한 남은 자들에게 임하는 구속의 확신을 강조했다.

이사야서의 기본 주제는 “구원이 주께 있다”는 뜻인 이사야의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이사야서에 26번 등장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선지서들에는 모두 합해도 7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구약 전체에서, 이사야서보다 구원에 관한 예언이 더 많이 언급된 곳은 시편뿐이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역의 모든 측면을 설명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유년기, 온화한 인격, 순종, 메시지, 기적, 고난과 거절과 대속적 죽음, 그리고 승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