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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改新敎) Protestantism 란 무엇인가?

예림의집 2010. 3. 15. 07:28

개신교 (改新敎) Protestantism


16세기초 북유럽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한 교파.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종교전쟁을 거친 이후,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전세계에 다양한 형태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개신교 운동의 역사

개신교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1529년 슈파이어 의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계열의 독일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함께 3년 전 마르틴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허락하였던 관용정책의 대부분을 무효화하였다. 1529년 4월 19일에는 독일의 14개 자유도시와 6명의 루터파 제후들이 대표가 된 이 결정에 대한 항의서가 발표되었다. 이 항의서는 자신들이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결정이 자신들을 구속할 수 없으며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황제에 대한 복종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온 그리스도교를 포괄하는 공의회나 전독일민족의 총회를 개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항의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이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에 의해 채택되었고 점차 종교개혁의 교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독일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신봉자들은 복음파(Evangelicals)라는 이름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Huguenots)라는 이름을 선호하였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루터(1483경~1546)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울리히츠 빙글리(1484~1531)의 제자들, 나중에는 장 칼뱅(1509~64)의 제자들도 일컫게 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특히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추종자들은 개혁파(Reformed)라는 이름을 더 좋아했다.

16세기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주로 종교개혁시대에 나타난 2개의 큰 사상, 즉 루터파 및 개혁파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나 17세기초 잉글랜드에서는 영국국교도들이 비정통으로 간주한 사람들, 곧 침례교도들이나 퀘이커교도들과 대비되는 '정통 프로테스탄트'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인임을 주장하나 가톨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단 동방교회는 제외), 즉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가톨릭 성향의 영국국교도 모두를 포괄하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썼다.

유니테리언파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이같이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00년 이전이었다. 예를 들어 1689년의 영국 관용조례는 '영국국교회를 반대하는 폐하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의 의무를 면제하는 조례'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례는 잉글랜드에서 '정통 국교반대자'로 알려진 견해들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였을 뿐, 유니테리언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 내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여전히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논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 당시의 사전들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의 사전(1755)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종교개혁 초기에 로마 교회의 오류에 항거한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세 후기 교회의 상황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중세 후기 세계 내의 오랜 발전과 수많은 소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를 개관하기는 쉽지 않다. 가톨릭 사가(史家)들은 16세기의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이전에 또한 그들과 전혀 무관하게 얼마나 많은 개혁이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반면,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은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밝히기 위해 중세 후기 교회를 극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 결국 종교개혁을 타락한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새 시대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15세기에 변화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전기(前期) 종교개혁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개신교의 선구자가 아니었으며, 후에 나타난 종교개혁 때문에 그들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건들은 '전기 종교개혁'적인 사건들이 아니었으며, 그 나름의 정체성(正體性)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부터 북으로 독일·프랑스·영국 전역에 걸쳐 15세기 교회 내부에 개혁의 발전과 소요가 있었다는 데 대해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여왔다. 이와 같은 개혁과 소요의 일부는 교황·성직자·수사(修士)·수녀 등의 권력남용을 겨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경건한 사람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1484~92 재위)가 바티칸에서 자신의 사생아들의 결혼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해서 그를 증오하였다.

그들은 또한 타락했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를 멸시하였다. 대중은 교황이 엄청난 재원을 끌어들여 사치스러운 건물들을 짓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하였다. 교황에 대한 혐오감은 민족주의 정신이 고개를 들면서 더욱 커졌다. 독일·프랑스·영국 정치에 오랫동안 개입하였던 교황들은 각국의 전제군주들이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자 권력약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주들은 교황과, 대부분의 경우 지역 교회의 성직자 대표들에 대해 이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고개를 든 이때에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맥락 안에 완전히 남아 있으면서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데 참여하였던 새 세대의 신학자들이 나타났다. 오컴의 윌리엄(1349? 죽음)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안에서 종교개혁자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수도회가 대부분 포기했던 청빈의 이상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의 일부로서 교황 요한네스 22세가 이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황권과 제국이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 관계가 있는 정부 혹은 영역으로 보았다. 교회가 이단의 위험에 처할 경우, 평신도들은(제후와 평민 모두)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하므로 당면한 개혁에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권력과 중세 교회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던 이와 유사한 투쟁에 가담하였다. 위클리프 역시 민족의식을 교회개혁에 이용하였다. 그의 도구는 성서의 도덕률이었다. 위클리프는 이의 번역을 추진하였으며 1380년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모두 이 번역본을 볼 수 있도록 조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의 귀중한 영적 권위는 계속 인정하였다.

보헤미아에서는 프라하대학의 강사가 되었던 얀 후스가 바로 이 대학을 사치에 물든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기지로 삼았다. 그 역시 민족감정을 이용하였으며 교황은 세속의 칼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고 논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대담한 고발 때문에 결국 그는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도덕적 반발과 민족감정을 결합시킨 경건 이외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도 중세 후기 교회에 나타난 또 하나 소요의 징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로렌초 발라(1407~57)가 자신의 정교한 역사탐구 기술을 이용하여 교황에게 막대한 권력과 넓은 관할지역을 준 문서들이 상당수가 위조임을 폭로하였다. 독일에서는 요하네스 로이힐린(1455~1522)이 성서에 쓰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연구하였으며, 학자들이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69~1536)가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대한 지식과 풍자적인 필봉을 통하여 교회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중세 후기 교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요인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27/28 죽음)나 요한 타울러(1361 죽음)의 정신을 통해 꽃핀 신비주의였다. 심오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교회의 제의와 관행들 대부분을 도외시하고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하고자 했고 또한 그것을 주장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헌신주의자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저술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고위층 사람들을 공격하였지만, 평민들의 가톨릭주의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헌신이 미신적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희생시킨다고 보았다. 순례자들이 성자의 유골을 모신 사당을 찾고 교구민들이 성자의 유골을 경외하는 관례들은 일종의 이교(異敎)가 그리스도교로 치장하고 침투한 것으로 여겼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평민들로 하여금 사실상 구원을 팔아먹고 있었던 교회에 착취당하도록 만들었다. 16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는 그러한 개혁을 향해 스스로를 개방할 수 없었고 그것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

독일·스위스·프랑스의 종교개혁

루터의 역할

루터는 이전의 개혁자들이 교회의 생활을 공격하였다면 자신은 교회의 교의를 공격하였고 이 점이 서로를 구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은 성직자들의 죄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지만, 그는 구원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도식에 환멸을 느꼈다. 스콜라 신학은 사람들이 고백과 고해성사에 의한 사면을 통해 죄를 하나하나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인지(認知)할 수도 없음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상처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천연두를 치유하려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성 전체가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반면, 교회는 인간이 병들어 있기는 하나 각 개인의 선행으로 악행을 보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솔직하였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칼로 나무를 베듯이 저주받은 자를 지옥으로 가도록 선고하리라는 생각은 그를 공포로 가득채웠다. 그는 수도원 생활이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산 이상의 공덕(功德)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수사가 되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죄많은 난쟁이와 같은 자신이 하느님의 가차없는 정의와 위엄 앞에 설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를 수 없었다. 끊임없이 고해실에 의존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의 근본적인 죄성(罪性)을 깨닫게 하였을 뿐이다.

그후 그는 인간을 그토록 약하게 만들어놓은 다음 스스로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인간을 저주하는 신의 선의(善意)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구원은〈시편〉 연구를 통해서 왔다. 그는〈시편〉22장이 특별한 것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시편〉22장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구절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바로 그때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죄많은 인간과 일치시켰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무지개 위에 앉아 있었던 심판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버림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거기서 하느님의 진노와 하느님의 은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였고, 하느님은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표어가 된 신앙의인론(信仰義認論)의 교의였다.

루터는 1517년 모든 성인의 날에 95개조를 내걸었다. 여기서 그는 3가지 주요논점들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재정 오용에 관한 것으로, 그는 만일 교황이 독일 민중의 빈곤을 알고 있었다면 그가 치는 양들의 피와 가죽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짓지 않고 재 속에 그냥 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교의적 오용이었다. 예를 들면, 교황은 연옥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있더라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가없이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종교적 오용을 공격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보물은 복음이므로 성인들의 공로를 기리는 보물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인데, 교황권이 루터의 입장을 이단으로 선고하였을 때 루터는 이에 맞서 교황들의 무류성과 공의회들의 결정을 부정하고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선언하였다.

루터는 여러 지역에서 후원을 받았다. 이미 널리 확산되어 있었던 자유주의적인 가톨릭의 복음중심적 개혁은 성직자들의 축첩, 부당한 재물 취득, 성직 겸임(한 사람이 영국·독일·프랑스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몇 개의 성직을 차지하는 행위) 등의 도덕적 오용을 바로잡으려 했고, 성자와 그 유물에 대한 숭배, 종교적 순례 등과 연관된 대중의 미신을 조롱하였다. 개혁운동의 대표자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황 레오 10세가 교황직의 종교적 측면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루터는 급속히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1520년까지 루터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연기하였다. 교황권의 세속화가 루터를 구해준 셈이다. 그리고 루터는 세속화된 교황권을 무너뜨렸다.

1520년 여름 그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언문 일부를 공표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향한 연설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은 루터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던 황제를 포함한 독일의 지배계급에게 사도의 청빈과 소박함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하자고 호소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해 시민 권력을 향해 외친 이 호소는 황제들이 부적격한 교황들을 폐위하고 대체시켰던 중세 초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권이 불과 400년의 연륜을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 재위)의 교회개혁이 교회에게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가장 저열한 사제도 가장 훌륭한 왕보다 인류를 위해 더 좋은 일을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가 행정 영역에 간섭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인 행정장관들을 포함해 모든 신자들이 다 사제라는 교의를 가지고 이에 대처하였다. 평신도는 직업상 교구 사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누구나 사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통치자는 그 자신이 사제이기 때문에 비록 교회가 그를 영적으로 파문하더라도 교회를 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가들은 교황권을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이 교의에 동의를 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일시에서는 중세기 종파들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사(聖事)를 다루는 또다른 1편의 논문 〈바빌론 유수 The Babylonian Captivity〉를 썼다. 이 제목은 성사가 교회에 포로로 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루터는 성사의 수효를 7개에서 2개로 줄였다. 7개의 성사는 성세성사(세례)·성체성사(성만찬)·고해성사·견진성사·신품성사·혼인성사·병자성사였다. 루터는 성사를 그리스도가 제정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이 엄격하게 성사로 인정되었고 고해는 고백으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루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성만찬에서 사제의 기원 때 빵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형된다고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실제로 임재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물체와 "함께, 그 안에, 그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제단 위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곳에 있다면 왜 특별히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여 하느님이 말씀의 선포와 성사의 거행을 자기계시의 두 방식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신자들의 눈이 열린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에게 굴복하기는커녕 교회법 사본 1부와 그의 굴복을 요구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는 즉각 파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후견자였던 작센의 제후인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공정한 자기변호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의회로 끌려갔으며 자신의 책들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만일 그가 성사를 다룬 책을 부인하였다면, 다른 논점들은 협상의 여지가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의 정당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책들에서 펼친 교설들 가운데 일부라도 부인하는지, 또 오랫동안 전해온 가톨릭 교설들을 감히 거부한 그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루터는 우쭐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또 악의를 가지지도 않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나는 성서와 명석한 이성에 의해 유죄평결을 받지 않는 한(물론 저는 교황과 공의회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만) 나의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가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어느 것도 철회할 수도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그후 황제는 루터를 황제의 금령 아래 두었고 공식적인 파문칙서가 공표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현명왕 프리드리히는 곧 루터를 은신처로 피신시켰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채에서 1년 동안 은신하였다. 이 강요된 은둔 기간에 그는 〈신약성서〉 전체를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토착적이면서 날카롭고 힘찬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독일어는 관용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번역본의 반포만큼 그의 가르침에 대중이 추종하도록 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자유주의 가톨릭 개혁자들은 루터의 역설에, 자신의 성서 해석이 옳다는 루터의 확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사람이 한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주하는 폭군으로 만드는 예정론을 루터가 수용한 것에 대해서 주춤하였다. 독일 민족운동이 붕괴되자 루터의 측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개신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이 개신교의 형태들은 전체적으로 '종교개혁 좌파'나 '급진적 종교개혁'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어떤 용어로도 명확한 분류는 가능하지 않다.

가장 급진적인 스위스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은 울리히 츠빙글리였다. 그는 음악을 비롯한 여러 감성적 효과들을 종교의식에서 추방하였으며, 주의 만찬을 기념적·선언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칼뱅의 역할

개신교의 또 하나의 형태는 칼뱅주의로, 이는 프랑스인 장 칼뱅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인문학과 법학 교육을 받았으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전향한 결과 프랑스를 떠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젤에서 27세의 나이로 〈기독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초판을 발표하였다. 계속 이 책은 증보되어 수세기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성서의 유일 권위에 대해서는 루터와 근본적으로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스위스 급진파와 루터파 견해의 중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은 보편적이며 부활한 주와의 진정한 합일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칼뱅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회중의 시편 찬송을 좋아했는데, 바로 이 점은 프랑스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와 신대륙 장로교의 특징이 되었다. 예술에 관해서는 성인들의 상(像)과 십자가상(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십자가는 허용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칼뱅주의가 종교의식에서 음악과 예술에 소원하다는 일반적인 견해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반면 칼뱅은 하느님의 심판의 공포를 보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선택받을 자들에게는 닥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일생 내내 신앙과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근사치에 가깝고 입수가능한 시금석들을 갖고 있었다.

칼뱅은 지극히 내적이고 또 무행인 거듭남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후에 칼뱅주의는 원래 칼뱅의 입장에서 벗어나 선택의 표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칼뱅에게는 3가지의 시금석이 있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츠빙글리와 견해가 같다. 둘째는 엄격하게 훈련된 그리스도교적 품행이며, 이것은 재세례파와 같은 견해이다. 셋째는 성례전에 대한 사랑이다. 유아세례는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말한 성례전은 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이 3가지 시금석을 갖추었다면, 그는 선민(選民)임이 분명하므로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주로 헨리 8세의 정치적 의지에 의해 영국에 퍼졌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곤경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1534년 그 자신이 국교회 수장(首長)이라고 선언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성격과 지위, 로마 가톨릭과의 경쟁이 정치적인 쟁점이었던 300여 년 동안 보다 근본적인 발전은 개신교 교회 내부에서 일어났다. 청교도 혹은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와 비국교도들은 장로교 및 회중교회 형태의 교회 조직과 예배를 발전시키고 이를 확립하였다.

예배의 단순성과 하느님에 대한 개인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한 영국 청교도는 경건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과 동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경건주의는 수많은 종파들과 운동이 생겨나게 했으며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의 종교', 곧 하느님의 은혜를 신자들이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결국 형제단(Unitas Fratrum) 또는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로 불리는 경건주의 집단은 영국 사람 존 웨슬리에게 영감을 주어 감리교 운동을 창시하게 하였다. 이 감리교 운동은 복음주의로 알려진 보다 일반적인 현상의 주요표현이었다.

옥스퍼드의 링컨 칼리지 학생시절에 웨슬리는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생단체를 결성하였고, 선교를 위해 그루지야를 여행했으며, 모라비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경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일생을 영국에서 복음주의적 설교를 하는 데 바쳤다. 그는 분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교구체계는 자유로운 복음설교와 평신도 설교자에 관한 웨슬리의 계획을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1744년 웨슬리는 제1차 설교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감리교협회의 치리기관인 연례 대회가 되었고, 1784년에는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감리교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가 조금은 소홀히 여기는 감정과 양심을 중시하였다. 감리교 운동은 은혜의 교의에 새롭고도 헌신적인 자극을 주었으며, 한때 경건주의에서 나타났으나 17세기 중반 이에 대한 반동이 일어났을 때 일시적으로 쇠퇴한 바 있던 도덕적 진지함을 중시하는 전통에 합리성을 부여하였다. 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은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사가들, 즉 필립 도드리지(1702~51)와 찰스 웨슬리(1707~88)를 낳았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서구사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한 개신교 운동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규정한 미국 헌법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었던 자유로운 교회가입의 정신, 유럽에서 끊임없이 도래한 이민자들의 종교적 혼합, 영국에서 지배했던 '교회와 왕'의 동맹에 대한 반작용, 계몽주의의 세속 정신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과 더불어 세속의 국가이념은 수많은 유럽 자유주의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반성직주의자들의 이상이 되었다. 미국의 유형은 나폴레옹의 유형보다 유럽 개신교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국교화된 개신교 교회에 익숙했던 독일·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스위스·영국·스코틀랜드의 세속국가들에서는 한동안 국교 폐지의 강력한 요구가 없었다. 이 모든 나라에서 독립교회 혹은 비국교도 교회의 교인들은 19세기 동안 완전한 관용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19세기 동안 국가와 국교회 사이의 형식적 연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외가 있다면, 영국국교회가 소수파로 존재하였던 아일랜드(1871)와 웨일스(1914~19)뿐이었다. 그러나 국교회는 최소한 외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 영국·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 등 3국에 남아 있었다.

재통합을 위한 운동

종교개혁 이후 재통합을 향한 가장 중요한 법령이 제정된 것은 19세기초였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국가들은 한 교파 이상을 허용하면서 서서히 만인에 대한 관용 쪽으로 움직여 그들이 훌륭한 시민인 한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다. 한편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특히 새로운 합리주의 학파, 혹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 학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도들을 서로 분리시켜온 교리들이 그들이 동의한 진리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개신교 팽창의 시대

이런 형태로 세속국가는 개신교(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팽창과 다양성을 지원한 셈이지만 동시에 모든 교회들과 긴급한 새 문제들을 놓고 대결하게 되었다. 헌법으로 국가와 종교를 분리시킨 미국의 유형은 과거의 회중교회 전통과 계몽주의의 이념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그 의도가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유형은 보다 역사가 깊은 유럽 교회들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래로 국가와 교회가 동맹관계에 있었던 개신교 국가들에서 그 효과는 이중적으로 나타났다. 첫째, 국가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교파들에 대해 더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둘째, 국가교회는 모든 형태의 국가 통제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해 더 강력한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루터교가 지배적인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에 독립을 향한 강력한 운동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의 복음파 운동은 목회자들을 교구에 임명하는 것과 관련하여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안을 왕실과 정부가 거부하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스코틀랜드 교회는 토머스 찰머(1780~1847)의 지도 아래 국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독립교회를 창설하였다(1843). 이 두 교단은(1929년 최종적으로 재통합될 때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속 유지되었다. 스위스에서는 개혁파 신학자 알렉상드르로돌프 비네(1797~1847)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위해서 압력을 가했으며 1845년 자유교회(Free Church)를 창설하였다.

세계에서 미국 개신교 영향력의 향상

16세기 이래 개신교 정치권력의 두 중심은 독일과 영국이었다.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독일이 통일되고 영국이 세계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19세기에는 개신교의 정치적 역량이 종교개혁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했다. 그러나 1860년경 제3의 세력이 미국에서 출현하였다. 1820년 이후 미국의 개척 상황은 다양한 개신교 세력을 확장시켰고, 1832년 부흥운동집단들로부터 형성된 그리스도의 제자회와 같은 교파들이 등장하였다. 이와 때를 맞추어 개신교 교파들은 미국의 경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미국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며, 따라서 한동안 미국에서 가장 큰 단일 교파는 로마 가톨릭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도력과 문화의 기조는 앵글로색슨적·자유주의적·개신교적인 것으로 유지되었다. 대체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미국 루터교가 확장되었으며 마침내 루터교의 본산지인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 버금가는 비중을 지닌, 루터교적 생활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터교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유럽의 경건주의 집단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미국의 루터파 교회는 독일 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과 계율을 갖게 되었다. 미국 그리스도교의 부흥운동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으며, 개인적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개념이 미국적인 생활방식에 깊이 침투하게 하였다.

선교의 확산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세력, 미국 세력의 증가, 유럽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오랫동안의 평화 등으로 인해 개신교 교회들은 가장 위대한 팽창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새로 생겨나는 도시들에서 개신교 교회들은 전례없는 규모로 사회봉사를 전개하였다. 병원, 고아원, 금주운동, 노인보호, 젊은이들과 성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확대, 교회학교, 도시 빈민지역에서 청소년 및 성인 클럽 운영, 19세기 새로운 도시생활이 필요로 하는 무수한 조직체들의 설립이 그것이다. 개신교 교회들은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 개신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는 반투족이 주로 개신교 교인들의 동맹체가 되었다. 인도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신생 인도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힘을 끊임없이 증가시켰다. 중국의 그리스도교는 항구도시와 17세기 로마 가톨릭 선교의 잔류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었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재정 지원과 중국내지선교회 설립의 재정 지원을 받았던 다양한 복음파 집단들은 중국 내지(內地) 깊숙히 들어가 회중을 만들었다. 일본은 1630년 이래 그리스도교에 대해 폐쇄적이었으나, 1859년 재개방 이후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일본 그리스도 교회들을 창설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중앙·남아메리카에 개신교를 소개하였다. 주요한 개신교 교파들(루터교·장로교·성공회·회중교회·침례교·감리교)은 모두 세계적 규모의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들의 조직체를 여러 나라의 극히 새로운 요구들을 충족시키도록 조정하는 데 상당한 긴장을 겪었다.

19세기 개신교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

19세기(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 비판은 2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知的)인 것이다. 급속한 도시성장과 공업발전은 종교생활과 소원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였고 많은 정치 지도자들은(특히 유럽에서), 교회는 노동계급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할 사회질서의 보루라고 주장하였다.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의 일부는 무신론적이거나 최소한 이신론적이었으며, 교권과 왕권 사이의 동맹을 의심하는 만큼 독립교회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1818~83)와 같은 사회·경제 사상가들은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며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에 만족해서는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만족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한 응답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그리스도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적어도 이론적으로) 노동자들이 사회적·경제적 정의를 누릴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노동자들을 위해 더 많은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들을 향해 양심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견해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관점과 이념은 정치적·신학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달랐다. 베를린의 왕실 설교자였던 아돌프 슈퇴커(1835~1909)는 반유대인적인 급진적 정치가였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소설가였던 찰스 킹슬리(1819~75)는 노동계급을 깊이 동정하고 이해했던 온정적인 보수주의자였다.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인물은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1805~72)였다. 그는 1853년 추방당할 때까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신학자였으며, 그후 런던의 목회자로 있다가, 말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 도덕철학 교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소수의 성공회 신학자들의 지적인 지도력 못지않게 노동자들의 종교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한 것은 개신교급진파, 특히 침례교와 원시감리교였다. 어떤 경우에는 이들의 노력으로 사회주의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실제로 사회주의 정당에 표를 던지지 않더라도 복지국가로 이끌어가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설득하였고,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 많이 의식하도록 교육하였다. 미국에서 사회복음은 19세기말에 교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회복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는 침례교회 월터 라우셴부쉬(1861~1918)였다.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자신의 이름에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많은 정당들이 나타난 데 반해,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모든 정당들이 그리스도교인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세속적임을 표방한 정당들이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의 개신교

개신교의 흐름

1914~18년의 전쟁은 유럽이 자신의 문명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이미 쇠잔해진 자기만족의 환상을 깨뜨렸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교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약화시켰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한 정부가 1917년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그리스도 교권 세계에는 새로운 부정적 압력이 가해졌으며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노동계급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그후 40년 동안 개신교 교회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야 하였다.

1933~45년 동안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은 유럽을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 때문에 나치는 초기에 많은 독일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멸이 그 뒤를 이었다. 1933년 가을부터 교회문제(특히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아리안 조항)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고자 한 교인들과 마르틴 니묄러의 지도 아래서 교회문제에 관해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려던 교인들 사이에 당파적 분열이 일어났다. 국가의 보조를 받는 남부(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루터교 교회들의 지원에 힘입어 니묄러 그룹은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형성할 수 있었다.

고백교회가 1934년 5~6월에 바르멘 노회(老會)를 소집하면서 교단의 분열은 분명해졌다. 한동안 고백교회는 독일 전역에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교회성 장관 한스 케를 휘하에 공리공론적인 성격이 적었던 교회 정부를 수립하자 고백교회는 이 정부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교회 정부는 나치 정부가 강제로 세운 것이므로 협력할 수 없다는 니묄러파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바트 왼하우젠 노회(1936. 2)에서 고백교회는 다시 분열되었으며 다시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후 특히 극단적 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확고히 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교회들은 점증하는 압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말기에 일부지역에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주교 테오필 부름은 나치 정권의 비인간적 행위에 저항한 지도자였다. 하인리히 그뤼버 목사는 체포될 때까지 유대인들을 피난시키고 보호하는 뷔로 그뤼버(Buro Gruber)를 운영하였다. 몇몇 교회 지도자들, 특히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군대는 동유럽을 장악하였으며 독일은 분단되었고 이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억압을 받았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발트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에서 소개(疏開)되거나 추방당했다. 루터교 공동체들은 그곳에 남아 있었으나 스탈린 통치하에서 특히 심한 박해를 받았다.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의 루터교도들과 헝가리의 개혁파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덜 받았지만, 그 수효는 크게 줄었다. 신학자 요제프 흐로마트카의 지도를 받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개신교도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개신교도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더 많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신교에 가장 큰 손실은 독일 분단이었다. 승전국들의 결정에 따라 예전에 독일어권이었고 대부분 루터교가 성했던 넓은 지역이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독일인 약 800만 명이 추방당했다.

1945년에 구성된 동독(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 비텐베르크와 개신교의 고향이 되는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였다. 동독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대부분 개신교도들(70%)인 주민들을 통치한 유일한 국가였다. 한동안 루터 교회는 동독과 서독 사이의 주요연결고리였다. 루터 교회의 연례모임인 '교회의 날'(Kirchentag)은 잃어버린 독일 통일의 유일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으로써 동독 교회들은 고립되었다. 자금·교육·교회건축 등과 관련된 정부의 압력, 민족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형태의 청년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개신교도들은 용감하게 활동하였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450주년 기념식은 개신교 교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 이전만 해도 철저한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혁명 이후 40년 동안 침례교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침례교 조직의 유연성과 단순성은 대처하기 어려운 법적 조건 아래서도 적절히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침례교 공동체들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몇 년 동안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60년 이후 다시 예전과 같은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물질적 손실과 1947년 이후 영국의 종말은 과거 영국이 지배하던 지역들의 개신교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더 이상 해외 교회들에 과거와 똑같은 규모로 자금과 인적 자원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일부지역에서는 교회 정부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에서는 영국의 지위가 변화됨으로써 그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던 지도력의 변화과정이 촉진되었다. 부족한 재정 및 인력자원의 일부는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보충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더 이상 유럽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과거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비롯된 조급함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는 이른바 젊은 교회들이 세계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점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기술발전 시대의 세속화 추세는 낡은 유럽 교회들을 공격하였으며, 젊은 교회들이 목회활동을 펼치는 지역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개신교, 이를테면 서남아프리카나 나미비아의 루터교와 남아프리카의 성공회를 비롯해 남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손실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지역의 개종자와 인구 성장은 개신교 교회의 범위와 기질을 변화시켰고 그 규모도 증가하였다.

개신교의 종말이 예견되었던 세계 여러 지역들에서도 개신교는 놀랍게도 살아 남아 다시 등장하였다. 1948~49년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결정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1951년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유럽인 선교사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국 교회는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교회는 가혹한 억압에 시달렸으며,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른바 문화혁명 시기에 더 심했다. 중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었고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기와 1980년대에 중국이 서방을 향해 부분적으로 다시 개방하고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는 신중한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 개신교도들과 서방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개신교도들과 그밖의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교인들이 과거 20년 동안 가혹한 억압과 박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계 교회들 가운데서 생동적인 집단을 대표하고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형태의 개신교

20세기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운동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토양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 토대도 부분적으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 운동들에 가담한 모든 구성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진보적이고 왕성한 신앙표현은 보다 급진적인 외양을 띠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가운데 3가지 주요운동들은 보통 오순절운동·근본주의·복음주의라고 일컬어진다. 오순절운동은 개신교가 역사적 본거지인 유럽을 넘어서서 확산하는 데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순절운동

이 운동은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미국에서 웨슬리파 성결운동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01년 캔자스의 토피카와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 운동을 특징짓는 다양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운동의 핵심은 ' 방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억제없이 하는 말의 형태이다. 그들이 말하거나 노래하는 음절들은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이 첫 오순절 때의 예수의 제자들처럼 인식가능한 외국어로 말한다고 주장했고 거기서 이 운동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오순절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물의 세례를 넘어서는 '제2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기도 하며 예언도 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른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기적적인 치유가 사도 시대 이후 중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치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오순절운동은 '성서의 띠'인 남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고, 농촌의 가난한 백인들이나 도시의 흑인들 사이에서 발전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하느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등 급속하게 성장한 교파들을 통하여 가장 가시적인 형태의 개신교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점차 중간계층에게로 수용되었다. 1960년 이후 오순절운동은 성공회·루터교·장로교와 같은 그리스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회로 확산되었으며, 이 교회들에서 오순절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은사운동'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오순절운동은 카리브 연안, 남아메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지역에서는 수많은 예언 운동들이 분출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은 감성적 형태의 예배와 치유활동을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오순절운동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이 지역국가들에서 민중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였다. 1세기 전 선교사들이 이룬 토대 위에 집을 지은 오순절운동가들은 일부 해방운동들과는 달리 반미적이거나 반유럽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고 '피안'(彼岸)을 강조하여 정치를 회피하거나 보수적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정권들과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

2번째 주요운동인 근본주의는 19세기 후반 '전천년왕국설'(前千年王國說)과 성서무류성을 다소 합리주의적으로 변호한 사상을 서로 결합시켰다. 이 운동의 이름은 1910~15년 미국에서 발간된 〈근본주의자들〉이라는 소논문에서 따온 것이다. 근본주의는 미국에 있던 교파간의 분쟁 때 형식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9~20년에 공식인정을 받았다.

근본주의가 발흥하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되어 보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교회들에 수용된 일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이 두 운동이 침례교와 장로교 북부 지회의 신학교와 사무국, 선교부, 설교단들을 전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본주의의 대가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설을 부인하고〈창세기〉의 기사가 과학적이라고 옹호하였던 1925년 스코프스 재판은 침례교와 장로교 간의 교파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와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투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그들의 성서학교와 라디오 프로그램, 출판사업은 살아 남았다. 1940년대 초반에 그들은 재결집하여 서로 경쟁력 있는 몇 개의 근본주의 조직체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체들은 추종자들을 얻었고, 남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사기도 드높아지면서 분명한 자기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수동적이던 정치적 태도를 버리고 개방적 참여로 특히 1980년과 1984년에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유세를 지원하여 방향을 바꾸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적 복음전도자 제리 폴웰이 창설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와 같은 집단들은 텔레비전 전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 역량을 모아 낙태반대,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을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이상과 강력한 국방예산을 지지하였다.

복음주의

수십 년 동안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인물들의 목회와 〈크리스천 투데이〉 등의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이 집단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예수의 육체부활 등의 주요교리에서는 근본주의와 일치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성서 무류설을 주장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점차 그것이 과연 성서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는 최선의 방법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근본주의가 강조하는 전천년왕국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다.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보다 온건했다. 그들은 그 본질상으로는 고전적인 형태의 근본주의자들과 같았지만 그 스타일은 달랐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종파화되었으며 무례하고 남을 몰아세우며 비판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942년 복음주의자들이 전국복음주의협의회를 세웠을 때, 그들은 그들이 중도파와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했던 것만큼 근본주의 우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좋은 태도를 지닌 근본주의자들로 보기보다는 19세기 개신교의 주류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보기를 더 좋아했다.

이를 위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점차 문화·사회·정치 세계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교를 짓는 대신 자유로운 인문대학을 지원하였고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심지어 급진적인 정치 프로그램에 참여하였으며, 보수적인 개신교가 군국주의 및 자유 분방한 자본주의와 스스로를 지나치게 일치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또한 미국과 그밖의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 경향을 띠고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 지도자들과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강단에 서는 것을 환영하였으며, 근본주의자들이 기피했던 여러 종파의 그리스도교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운동가들이 제3세계에서 동반자를 구했다면, 복음주의자들은 국제 운동들을 형성하고 많은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들 자신의 교회에 칩거하는 데 반해, 수백만 복음주의자들은 주류를 이루는 교파들과 지속적인 연관을 맺으며 점차 완전한 주류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독특한 교리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하는 열정을 생동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개신교 내의 신학운동

개신교 신학 전통 안에는 모종의 반작용도 관찰된다. 이러한 반동은 부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에 대해 전반적인 의문이 제기된 데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후대의 발전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사회관을 정립하고자 했던 나치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인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한계로 축소시키고, 객관적인 진리를 주관적인 감정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맹렬히 비판한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운동의 최초 회원들, 전통 복음파, 성서의 무류한 말씀을 고수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근본주의자들로 지칭된 많은 사람 등을 포함한 모든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똑같은 이유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진영 안에서도 반작용이 일어났다. 1918년부터 바젤의 카를 바르트와 취리히의 에밀 브루너는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모든 신학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신정통주의라고 하는 이 신학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사유(思惟)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성서의 참된 지상권(至上權)을 재주창하고 종교개혁의 진정한 원리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에서 라인홀드 니부어는 사회와 인간에게 적용된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철학만큼 이에 반대하는 것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옛 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독일 마르부르크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미친 영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약성서〉의 핵심 진리를 드러내고 신앙에 대한 〈신약성서〉의 의의를 보다 완벽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를 시도하였다.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파울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들은 유럽의 사태 발전을 미국인들에게 해석해주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발언한 위대한 신학자들의 세대를 넘어서 지속되지 못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개신교 신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비록 위르겐 몰트만 같은 몇몇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요소들을 취하여 이들을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혹은 '해방신학 ' 등 다양한 운동과 결합시키기는 하였지만, 이제 유럽은 새로운 신학운동의 주도권을 잃었고, 하느님이 억눌린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는 사실의 증언을 강조하는 제3세계 신학자들과 성서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미국의 여성·흑인 신학자들은 과거의 강단신학에 내장되어 있었던 가부장주의·엘리트주의·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해방신학을 채택하고 있는 운동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운동들은 개신교 사상을 특수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접근법은 문화적 상황들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는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신학·흑인신학을 등장시켰다. 이들 신학에서는 성서해석이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집단이 갖고 있는 '전이해'(preunderstanding)에 의해 착색된다고 생각되었다. 또 하나의 접근법은 '이야기 신학'에 초점을 맞추어 추상적인 신학에서 사람 중심의 구체적 이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오순절운동과 근본주의의 발흥은 개신교 전반에 걸쳐 성령론과 종말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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