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준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에 모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무효입니다. “나 혼자 잘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혼자서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사랑을 주고받아야 신앙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을 멈추면 그 기간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이좋게 잘 맺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 선상에 있는 계명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주 똑똑하고 박식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배웠을 것이고, 좋은 학교를 거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율법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율법에 관하여 묻고 신앙하는 중요한 원리를 잘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10:27) 이렇게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아주 간단히, 그리고 명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 머리로만 똑똑한 소리 내지 말고,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영국에는 “성경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으로부터는 더 멀어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식만 많아져서 머리가 자라고 가슴속에 담겨야할 사랑이 자라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주는 속담이라고 생각됩니다. 신학교에 가도 비슷한 내용으로 풍자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붙어서 입학하고, 학교 다닐 때는 연기만 피우다가, 졸업할 때는 재만 남긴다.”라고 풍자하기도 합니다. 신학생이 다 그런 것이 아니지요. 다만 지식만 자라가고 마음의 자세는 갖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기숙사 정문에 ‘생활 즉 목회’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목회는 목사의 지식이 아니라 목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삶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영적지도력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이것이 신앙의 참 모습입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은 “성경을 일천 독 하는 것보다 그 말씀이 어떻게 그 삶을 스치고 지나갔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인은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에 갈급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기에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필요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율법교사처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와 같이 잘 알고, 잘 대답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을 내려놓고 “잘 알고 있구나. 그렇게 살아라”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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