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성화의 은혜

예림의집 2009. 5. 26. 13:26

<본문 요약>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첫째,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둘째, 다른 사람의 죄를 경계하라고 하셨다. 셋째, 기꺼이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탁월한 생각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아울러 우리의 공로를 내세워 그분의 사랑을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행동하신다. 의무에 복종했다고 해서 하늘나라의 가족이 되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 노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없다. 또한 의무를 행하고 선행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건 선행을 내세워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움직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자랑할 만한 모든 일을 버리고 오직 은혜에 호소해야 한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선행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선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세로 선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축복하실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도 내세울 수 없다면 나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믿음과 성품이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과 지혜로 그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행과 공로를 쌓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러한 은혜의 본질을 알아야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주고자 하시는 기쁨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영적 필요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주저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겸손한 자세로 그분의 도움을 간절히 요구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간절한 요청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정직한 고백과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다. 정직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한다면 과거의 잘못이아 미래의 실패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신다. 계명에 순종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만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공로를 세워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행위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유익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즉 자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구세주에 대한 사랑에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를 행할 수 있으며 이로써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 심지어 이 믿음조차도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물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행위나 결심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마음과 행위가 점차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 한다. 성화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심령을 옭아매는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점점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성화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따라서 나도 역시 그분과 함께 그곳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우리의 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업적을 이루었든 간에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기 때문에 내 행위와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다 죽어 버렸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수치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우리의 신분과 상태를 비롯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계속해서 내 생명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 나는 그분과 연합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죽었던 나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며 점차 성령이 원치 않는 죄를 거부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과 새로운 성품을 갖게 된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겸손히 우리의 뜻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을 의지해야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대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겸손히 회개하는 심령 위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에 의해 변화된 심령으로 은혜의 수단을 통해 영적 생활을 이끌어 나갈 때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된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달성한 업적과 영적 은사를 과시하는 한편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것은 무시해 버리는 교만한 삶을 살게 된다. 참 회개는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 일어난다.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참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며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않고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그분의 선하심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시작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 때, 또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죄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죄를 증오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춰 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회개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죄를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점진적인 성화를 이룰 수 있는 회개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에게 있는 죄의 현실 심지어 우리의 의조차도 악하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할 때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 자체가 은혜이다. 죄에서 놓여나기를 갈망할 때 하나는 죄를 고백하려는 마음과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죄는 영혼을 죽이는 독약과 같다. 회개하는 심령은 죄를 은폐 혹은 축소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기도를 통해 겸손히 고백하고자 한다. 회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회개란 용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이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에는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 참 회개란 용서를 받을 만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 회개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을 겸손히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그분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성령이 함께하시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삶에서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인간은 약점으로 가득한 존재이며 죄의 권세 아래 놓여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죄의 유혹을 극복하며 그분의 은총에 다가갈 수 있다. 나에게만 특별한 시험은 없다. 누구나 비슷한 감정과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유혹에 끌리기도 한다. 인간이 시험을 받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 욕망,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내가 당하는 시험이 특별하다고 믿게 한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기가 어려워지고 결국 그로 인해 더욱더 낙심케 되기도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 죄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인간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또한 시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이라도 시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시험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할 때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새롭게 각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탈출구를 제공하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존재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공급해주신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무장하고 기도로 호소하며 조언을 구하고 실패를 뉘우치고 서로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정직한 눈으로 면밀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죄에 빠질 위험을 발견하는 순간 기꺼이 그곳에서 발을 빼야 한다. 하나님은 단지 경고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것을 피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더욱더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가르칠 때에는 행위의 중요성을 무시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 은혜를 가르칠 때는 그와 동시에 신자로 하여금 그가 경건치 못한 태도나 언어 습관 혹은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여가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성찰하는 삶의 자세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은혜와 거룩한 삶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은혜는 거룩한 삶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거룩한 삶은 은혜의 샘에서 솟아난다. 구세주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를 이기셨으며 만민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원수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우리를 대신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사랑의 법을 통해 우리는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과 인간이 만든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성령은 신자에게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결국 신자 상호간의 차이는 최소화되고 서로의 사랑이 더욱더 풍성해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을 구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진실하심이 드러나야 하며 서로를 구별 짓는 교만과 편협함이 사라져야 한다. 사랑의 범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들이 걸어가야 할 안전한 길이다. 사랑의 길로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사랑의 길로 행해야 한다. 성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 길은 거룩한 삶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희생을 감수하고 고귀한 영적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에도 마귀로부터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럴 때 가장 격렬한 영적 전투가 시작될 수 있다. 영적 전쟁은 항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영적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해 오던 가정과 교회가 폭풍우처럼 불어 닥치는 변화의 물결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컴퓨터는 모든 인간관계를 멀리 한 채 혼자만의 세상을 즐기게 하고 도박, 게임, 음란, 십대를 유혹하는 대중매체, 무너지는 주일성수 성경지식의 부재 등과 같은 현상이 가정과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복음만을 가지고 현대의 방탕한 문화적 상황에 맞서 싸우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일 수 있다. 영적 승리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하지만 성경은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건전한 가르침을 받고 교회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며 건강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명하는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용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분이 요구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신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그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그분의 의로 옷을 입고 그분의 가족에 속한 아들과 딸이 되고 그분과 온전히 연합하여 사상을 받는다. 우리가 비록 실패하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다시 힘을 내어 영적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하나님과 불변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비록 쓰러졌어도 싸우려는 의지를 다시 회복해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더욱 가까이 이끌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멀리 할 것을 요구하신다, 죄를 지으려는 성향을 버릴 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좀 더 온전히 닮아 갈 수 있다. 하나님은 때도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 이점을 기억할 때 우리는 고난이 우리를 징벌하기 위함도 아니고 아무런 뜻 없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징계는 자녀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올바른 성품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시련과 고난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고난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겪는 고난은 맹목적인 징계가 아니다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슬픔과 기쁨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신다, 그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헛된 욕망을 버리게 된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시기도 하신다. 진정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면 고난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수치와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감내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은 타자를 위한 고난이었다. 고난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게 해준다. 육체의 고통을 받거나 비난을 당하거나 모든 것을 잃게 되거나 배신을 당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오 주 예수여 이제 저는 주님이 누구신지 또 저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주님은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으셨지만 저를 위해 그 모든 고통을 당하셨다. 일시적인 징계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넓혀 준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기꺼이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 징계를 당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증거이다. 징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준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우리에게 복종하는 법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신자의 삶에 은혜로 역사한다. 우리는 징계를 통해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뛰어 넘어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의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에 열정을 갖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불타오르는 열정과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즐거이 행하기를 바라신다. 기쁨이 없는 복종은 오히려 거룩한 삶을 무력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동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생겨난다. 하지만, 사랑의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로 하나님을 섬길 경우에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보지 못하면 은혜는 사라지고 행위로 인해 의를 얻으려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죄책감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죄를 뉘우치는 마음을 짊어지고 가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확신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가 죄책감으로 인해 낙심하여 기쁨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할 자는 바로 사탄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거나 자책하는 마을을 갖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낙심에 빠져 머리 숙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탄식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는 역할로 끝나야 한다. 그 이상의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한다. 죄책감은 그리스도를 구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사죄의 은총을 받은 이후부터는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려서는 안 되며 은혜에 대한 감사를 통해 그분을 기뻐하며 섬기는 삼으로 나아가야 한다. 죄책감은 죄를 고백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할 수는 있지만 그 뒤부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종의 삶을 살아가야만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겔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그분을 지속적으로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성숙한 기독교인을 분별할 수 있는 척도는 개인적인 유익을 얻으려는 헛된 시도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죄를 저지른 신자를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잔인함과 경멸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이유는 그분 자신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섬길 수 있다 이러한 기쁨 없이는 참 예배와 헌신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먼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할 때만 사랑으로 그분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복종을 통해 선행을 장려하고 영광을 얻으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룬 업적을 통해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성령의 감동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귀중하게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기뻐하시며 그것을 통해 영광을 얻으신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 안에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동기와 능력을 부여하시며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할 때 축복해 주신다. 일시적인 축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복종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물질적인 번영을 삶의 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복종에 대한 보상으로 항상 물질적인 축복만을 생각한다면 복종은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로 변질될 수 있으며 결국 참된 헌신은 불가능하다. 신앙의 행위는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거래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깨달음으로써 선행이 지니는 의미와 축복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영원하리라고 약속한 세 가지 일 곧 의로운 행위, 의로운 사람, 하나님의 의로운 돌보심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로운 행위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손만대, 곧 영원히 계속될 약속이며 후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와 같은 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축복의 증거라곤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순간에도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의 행위가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인을 영원히 기억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를 존중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행위가 마치 그분의 행위인 것처럼 하신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 덕분에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그분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그 주권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 우리는 결코 행위에 근거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룬 사역을 근거로 우리의 복종의 행위를 받아들이신다. 우리의 작은 행위조차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그분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위한 행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그 보배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영원히 붙드신다.

자신의 노력을 근거로 하나님께 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 존재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정의가 아니라 은혜에 호소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아무리 늦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귀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목적은 일찍 시작한 수고나 늦게 시작한 수고에 의해 똑같이 성취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각자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대해 나름대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일찍 시작하든 늦게 시작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 기준에 상관없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 언제 시작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늦게 시작하든 일찍 시작하든 상관없이 용기를 내어 그분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언제라도 일할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아무리 작은 역할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나 재능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보상 원리를 규정지을 수 없다. 우리 눈에는 불공평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성품을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할 때 기뻐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 복종의 책임은 우리의 것이지만, 의의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죄는 우리가 짓고, 형벌은 그리스도가 담당했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정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가지 추구해 온 삶의 방향과 행위를 단번에 바꾸는 것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는 관점을 잘 익혀야 한다. 성화를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복종의 책임은 우리의 것이지만, 의의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불공평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죄는 우리가 짓고, 형벌은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서평>

성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 책을 읽으면서 성화라는 것을 단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화란 끝내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되는 것,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 삶에서 온전히 완성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그 때에는 반드시 그리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화의 길의 나의 어떠한 의지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로 역사하심으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성화의 길은 참으로 복합적이고 주밀하고 상호 관계적이다. 우리는 먼저 이 성화의 여정에 들어 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길은 비록 좁은 길이고, 힘들 길이지만 영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뻐함으로 이 길에 동참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와 역사가 함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바라보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과정 속에서 의도되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분을 닮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정확히,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끝인다면 지식으로서의 예수, 전기로서의 예수를 아는 것에 그칠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녹아 날 수 있는가? 그분의 눈물, 기도, 분노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 동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가? 그분의 십자가에 나 자신을 함께 메달 수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도 참 기쁨으로 다가오는가? 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십자가 앞에 설 때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회개라는 것은 그저 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나는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죽고, 날마다 눈물로 고백하고, 뉘우치고 돌이키고, 다짐하고, 돌아선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며 또 회개한다. 회개할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과 기쁨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유혹에 약하며,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한다. 또한 점점 더 죄에 민감해 지는 나를 발견한다. 아프다. 슬프다. 이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유일한 방법은 세상과의 단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유일한 방법은 날마다 하나님께 무릎 꿇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보존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주님께 나를 완전히 복종시킬 때 진정한 자유함을 찾을 수 있다. 조금씩 그 자유의 법을 몸으로, 마음으로 익혀가고 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 하나님의 군사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며 사는 것은 더욱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내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전력으로 쏟아 붇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 것 같다. 아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시는 것 그것이 이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대로 나에게 징계를 하시는데, 특히 나에게는 매우 구체적이고 민감하게 징계하신다. 나의 감정, 생각 하나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때로는 말씀으로, 병으로, 훈계로, 영적 체험으로 나에게 징계하신다. 어떨 때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고, 은혜이다. 지난 한 학기 동안 나는 하나님의 징계 속에 살았다. 여러 가지 영적 갈등과 고갈, 사역문제, 말하지 못한 범죄들,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도를 구한다. 아마도 하나님은 내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 몰아붙이실 작정이셨을 것이다. 한 학기를 마무리 하는 지금에서야 하나님께 항복하는 나는 참으로 바보인가보다. 요즘 모든 일이 은혜이고 감사이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성화의 은혜”라는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나의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고 것 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성화의 모든 과정들, 곧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의 순간들과 주님을 닮으려고 하는 기특한 마음을 품었을 그 때, 하나님께 눈물과 간절함으로 회개하던 순간들, 죄의 유혹들과의 처절한 싸움들,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자유 하던 그 아름다운 순간들, 영적 전투와 생존을 향한 처절한 투쟁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비틀거리는 그 순간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장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는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불공평함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성화의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예수님을 닮고 있을까? 아직도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의 그 자리는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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