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본질 (1)
16세기 종교개혁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중심(missa)의 예배의식을 설교중심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후 설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서의 저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그 효시(嚆矢)이며 세례요한의 광야 설교, 사도행전의 베드로, 스데반, 바울의 설교는 그 진수(眞髓)와 요체(要諦)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설교란, 종교의 교의(敎義)를 설명하는 것이며 단단히 타일러 가르치는 것이라고 사전에 풀이하고 있듯이 기독교의 설교는 성경을 텍스트(Text)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마 28:20) 그러므로 설교는 논리적 연설이나 학문적 강의가 아닌 성경의 권위로 권면과 견책이 따라야 하며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자들과 개별적인 교제(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하며 성령충만으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전제적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개신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는 교인들의 영적 삶의 질이나 향상보다는 제도적 교회의 성장과 기복을 위한 율법적 신앙심을 심어 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편집해서 설교합니다. 인간의 선과 부귀영화를 위한 가르침이라면 성경이 아니라도 타 종교나 위인들의 경전에서도 보다 실감나는 내용을 찾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건강과 재물과 명예의 축복을 위하여 심적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주지 않고 위로와 평안을 느낄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기술적으로 각색하여 교인들을 크고 넓은 문으로 인도합니다.(마7:13)
교인들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신앙적 상식으로 인식케하고 소위 성직자인 설교자에게 올곧은 비판을 하는 것은 불신이며 교만임을 경고(?)하기 위하여 설교 기술자인 부흥강사를 초빙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된 <400인의 선지자와 시드기야>의 말로 교인들의 마음을 훔치기도 합니다.(왕상22:11) 그러한 부류의 설교는 기술적인 화술에 미혹되어 듣는 순간에는 감동되어 본의 아닌 어떤 약속이나 결심을 하게 되지만 그 뒤 시간이 흐르면 실제로 신앙 향상이나 참 신앙 상식으로 유익하게 남는 것은 없습니다.
이는 달변과 최면적인 수단에 의한 방법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특정인이나 집단의 유익을 충족시키는 기복신앙으로 유혹하는 설교 기술입니다. 요즘은 설교학이라는 학문적 차원에서 기술적인 설교를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설교는 학문도 아니고 기술도 아닙니다. 따라서 강연, 연설, 웅변도 아닙니다. 설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외쳐 전파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권면과 대화로 표현하는 성도의 믿음, 소망, 사랑의 행위가 아닌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으로 결신이나 서약을 받아내는 설교는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나 제자들의 설교의 핵심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러>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고 회개의 열매를 스스로 갈구하는 운동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히 4:12) 베드로의 설교는 듣는 이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를 외치면서 회개하고 세례 받는 자를 하루에 수 천 명이나 더 했고, 스데반의 설교는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운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설교자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죽이는 상황을 유도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교회를 제도적으로 성장시키려 하거나 그들 자신이 안정된 환경에서 전도를 하려 하거나 또는 성도들에게 기복 신앙을 심어 주려는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교는 교회의 제도적 확립, 양적 성장, 그리고 목회자의 생활안정, 권위적 위상 보장, 교인들의 위로, 치유, 축복을 위한 내용으로 참 설교의 본질을 상실한 영적 생명력이 없는 말씀으로 설교를 위한 설교에 지니지 않습니다. 진정한 웅변은 웅변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파스칼의 말과 같이 진정한 설교는 설교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 나름대로 준비한 최선의 설교라 할지라도 교인들의 <마음을 찌르는> 생명력이 없음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평소 목회 사역자들이 교인들을 보고, 느끼고 평가하는 요소가 그 교인들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라는 데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즉 교인들의 참 모습이 아닌 외모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소 교인들과의 진실한 신앙적 교제가 없으므로 그들의 중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책과 징계의 짐은 하나님께 돌리고 교인들로부터 부담 없는 목회자로, 존경받는 지도자로 존재하려는 까닭입니다.
목회자들이 일등 신자로 여기는 교인들은, 그래서 직분을 맡기는 교인들은 목회자들에게 겸손한 태도로 인사를 잘하고 목적을 위한 선물이나 선심을 베풀고 교회의 모든 의식적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자들이며, 목회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시야에 잘 띄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목소리가 작은 자들은 목소리가 큰 자들로 인하여 밀려나고(눅23:23) 진실하고 상식적인 자들은 자기 과시에 능한 몰상식한 자들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교회 밖의 삶에서 이웃들에게는 이기적인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목회자들 앞에서는 그 꼬리를 감추고 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변신하고 있으니 그들과의 삶의 현장에서의 교제가 없는 목회자들이 어찌 그러한 교인들의 실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외모로만 볼 수 있는 교인들의 모습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밖의 삶에서는 직접적인 이해관개가 없는 목회자들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어리석은(?) 교인들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들의 삶의 실상을 모르는 강단 위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우이독경일 뿐이며 교인들의 삶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고 하는 설교만이 교인들의 마음을 찔러 <어찌할꼬>를 외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삶의 실상을 알 수 있었기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지게 할 수 있었고(행 5:1-11) 바울은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양심을 외면하는 행위의 실상을 알고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딤전 1:19-20) 설교자는 모든 교인들과 가능하면 교인들의 이웃들과도 사귐으로 귀를 기울여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회중을 상대로 하는 강단설교보다 심방설교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가령, 뇌물을 받고 부정한 행위를 했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불의한 행위를 하고도 법적 처벌을 모면하거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정직하게 살라" 또는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주어(主語)가 없는 문장과 같은, 상대가 모호한 간접적인 강단설교로는 그들의 마음을 실감나게 두드릴 수가 없습니다. 설교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해설이나 강론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교회적인 절실한 권면과 경책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잠6:23)
설교의 대상이 회중이 아닌 개별적인 공무원, 기업인, 은행원, 교사, 건축업자 등으로 “교사들은 절대로 촌지를 받지 말라”“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민원을 처리하지 말라”“건축업자들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부실공사를 하지 말라”“누구든지 불의한 수입으로는 결코 십일조를 하지 말라”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지적될 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을 찌를 수가 있습니다.(눅 3:10-14)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내용과 대상이 불확실한 설교는 교인들에게 위인전을 들려주는 것과 같으며 명심보감이나 목민심서 등을 풀이하여 주는 교양서적의 해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좋은 말로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잠29:19)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지난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둔한 존재로(막 8:17) 매일매일 매순간마다 일깨우지 아니하면 죄를 범하고 살면서 그 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연달아 보고서도 곧 떡이 없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인도하신 것을 잊고 범죄에 범죄를 거듭했습니다. 이는 그들만의 실상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그들과 같이 마음이 둔한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충만을 위하여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설교는 누구나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알 수 있는 것으로 성경을 읽어 보지 못한 불신자나 초신자들이 들어야 하는 수준의 내용을 장로, 권사, 집사등 신앙 경력이 수년, 수십년인 교인들이 주일마다 듣고 아멘, 아멘 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초등학교의 교과목을 가르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는 구약의 속죄제사로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실감하는 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설교는 강의도 아니고 연설도 아니고 웅변도 아니기에 설교를 뒷받침하는 자료도 해박한 지식이나 풍부한 예화나 웃기고 울리는 재담이 아닙니다. 참다운 설교는 교인들과의 격의 없는 교제에서 얻어 낸 체험적인 사례들이 자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설교 원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밀레도라는 곳에서 삼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일깨어 기억하라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목회 방법을 전수시키고 있습니다.(행 20:31)
삼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함은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며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교제하면서 그들의 구체적 허물을 눈물로 훈계한, 허상이 아닌 그들의 삶의 실상을 체험하면서 성실한 목회를 수행하는 목회자로서의 실효성 있는 설교 방법이었음을 엿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하게 요구되는 설교는, 앵무새와 같이 되풀이되는 항상 같은 내용의 설교가 아니며 구호나 표어 같이 재창하는 설교가 아니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러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어찌할꼬>를 외치는 설교라야 합니다.(롬 16:17-18, 눅3:10-14)
그리고 오늘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설교는, 설교자들이 설교의 대상인 교인들을 이미 성화된 교인으로, 칭의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 복음 선포와 교인들의 사회적 삶에서의 영육간의 축복만을 되풀이 할 뿐 욕심과 죄악을 분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파수꾼의 외침(겔33:1-20)이 배제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을 찌르는 설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로 단정하고 있기에 회개를 위한 <마음을 찌르는> 설교는 불필요하고 구원은 <떼어 논 당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회중은 거짓 선지자(삯군)를 위한 역군으로 동참하는 셈이 됩니다.(렘5:31)
믿음이 들면 들수록, 주의 자녀로 살면 살수록 성화되어 간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가 중함을, 더욱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부정이 아닌 긍정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르는 날까지 죄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절감하지 못하면 절대로 자기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보이려는 것, 덕망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 섬김을 받으려는 것, 무명한 협력자가 아닌 유명한 인도자가 되려는 것, 사사건건 생색을 내려는 것, 자신을 무시하고 억울케하면 참지 못하는 것 등은 모두 입술로만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하면서 죽어 마땅한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지 못하는 강한 자기 긍정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으로 이방 전도를 위한 사도로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날이 갈수록 자신을 강하게 부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너무나 훌륭한 사도지만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절감하면서 (롬 7:24) 사역초기에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갈 1:1, 고전 15:9)> 중기에는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엡3:8)> 말기에는 <죄인중의 괴수로(딤전 1:15)> 자신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례적인 겸손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이 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들이 진심으로 교인들을 사랑한다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만 소개할 것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도 아울러 전해야 할 것이며(신 6:15, 롬 1:18, 2:5) 형식적인 죄목 나열과 그에 대한 의례적인 사죄 기도가 아닌, 진실한 회개와 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불의를 행하는 자, 거짓을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로 생활하고 헌금을 하는 자,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아 챙기는 자, 피 흘리는 꾀로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자들로 전제하고 설교한다면 진정 마음을 찌를 수 있는 설교가 가능할 것입니다.(사33:15-16, 1:10-17) 권면과 징계가 없는 기독교의 사랑이란 위선일 뿐입니다.(히12:8)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기와 권위에 연연하지 말고 스데반과 바울과 같이 자기 목숨을 걸고 목회에 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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