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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도둑맞았다면..

예림의집 2008. 12. 24. 12:15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도둑맞았다면..

 


    성탄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아니면 이웃과 함께 카드도 전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관행이 되어 버렸다. 또한 교회나 각종 단체에서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아니면 주변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보내는 것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관례처럼 여기고 있다. 

지난 번 “성탄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나”라는 글을 보고 여러 댓글과 조언들이 있었다. 아기 예수가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없는데도 이웃을 배려하며 희생하는 예수님의 참 모습으로 여기며 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절을 추구한다면 다시 한 번 성탄절 의미를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아기 예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자아나 개인행동마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선한 사람을 찾아 온 것도 아니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 온 것도 아니다.

 이 땅에 악한 존재들에게 보여줄 표적으로 오신 분이다. 눅 2:12에 언급한 표적은 마 12:39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다. 표적과 이적, 징조와 마크(mark)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세메이온(shmei/on)은 단순히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된 것처럼 주님과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 외형적으로 표출된 것을 표적, 이적, 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상태도, 우리라는 상태가 바로 세메이온(shmei/on)의 상태, 즉 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 마구간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표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 왜 하필 짐승들이 기거하는 마구간이며 누워있어야 하는 곳이 구유에 머무셔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편 49:12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20에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는 말씀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짐승이다. 그래서 12지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며 그 운명에 좇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4:22에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악한 존재이기에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며 우리에게 오셔서 그 악에서 구하시려는 것이다. 사 1:3의 말씀처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신학교를 나오고 석사, 박사를 따고 아주 높은 지식에 도달해도 하나님을 더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훌륭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이 풍부할 줄 알았는데 더욱 빈곤해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성탄절을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으며 성탄절을 이용하여 다른 목적에 좇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성탄절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퇴색되어 있으며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문화가 발전되어 왔다. 물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구제품도 나누어 주고 선물도 주며 그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도움과 경제적인 빈곤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하는 일들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악하고 게으르며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우리를 사람으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신의 성품에 들어가는 차원에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짐승의 속성에 가득 차 있는 내 마음 속에 탄생하신 것에 먼저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탄생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해 벌거벗은 우리의 몸에 가죽 옷을 입혀 주시는 은혜가 바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의 완성이요,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의 평화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무리 예수의 탄생만을 외친다고 해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또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만 바라보고만 있다고 해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다.

 12월 25일을 기념하고 생일을 축하한다고 해서 성탄절 의미와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분이 오신 목적에 부응하지 못하며 아무리 기념하고 축하한다고 해서 성탄절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팎에서 캐럴을 부르고 찬송을 부른다고 할지라도 본래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부른다면 하나의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찬송을 해야만 한다.

 성탄절 전야를 기하여 교회에서 각 기관별로 행사를 하며 선물을 주고받고 새벽 찬송을 부르는 등 밤새도록 지낸 후 막상 25일 성탄절 예배 때에는 비몽사몽간에 오락가락하는 희비곡선을 드나드는 광경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신격화된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수준으로 격하시켜서 자기들의 쾌락의 도구로 자신의 즐거움꺼리화가 되어버린다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탄절의 본질을 망각하여 만들어낸 성탄문화를 올바르게 바꾸지 않는 이상 교회는 육적인 성탄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제일 먼저 경배하러 온 목자들처럼 아기 예수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동방박사들보다 못한 성탄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과 함께 언제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어디서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누구와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무엇을 위한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왜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어떻게 성탄절을 보내야 할 것인지 질문해 보라. 365일 동안 성탄절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곳 그 어디나, 어렵고 힘들고 지친 이웃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악한 존재와 함께, 구제품을 들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눌 수 있으며, 카드나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성탄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과 한 몸이 되는 옷을 입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얻는 평화가 되는 것이다.

현재 성탄절의 문화를 다시 한 번 고찰한다면 변질된 성탄절 문화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잘못된 성탄절의 관행을 한국교회는 과감하게 바꿔야 할 것이다. 이웃과 함께 해야 할 성탄절에 이웃이 과연 누구일까?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가 강탈당한 물건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찰해 봄이 어떨지........ 어쩌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도둑맞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