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찰스 시므온이 1789년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갓을 때 그는 크리스찬도 아니었고,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반드시 성찬식에 참여해야 하는 것을 안 그는 기도문과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햇고, 얼마 안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한 신앙인이 되었다. 때가 되자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 남기로 결심하고 성삼위교회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초기 교구신자들의 큰 반대를 이겨내고 순수한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캠브리지 대학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학생들을 초청하여 주일 오후마다 토론 및 기도를 하고 세게를 향한 비전으로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도전하였다. 그의 제자 중 몇몇은 지역사회의 소년, 소녀들에게 복음으로 접근하고자 예수가(街)에 주일학교를 만들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하여 담당목사를 임명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는 복음에 열렬한 학생들 중 상당수를 이 담당 목사직에 임명되도록 훈련시키고 장려하였다. 이들 중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많이 알려진 이는 훌륭한 언어학자인 헨리 마틴으로, 짧았던 경력중에도 여러 아시아어로 성경을 번역한 바 있다. 시므온은 또 한 최초의 영국국교회 선교조직인 교회선교사회(CMS)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시므온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1848년에는 개인기도를 위한 캠브리지 연합이 형성되었고, 9년 후 데이빗 리빙스턴이 대학을 방문했을 때는 캠브리지 선교연합이 설립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러한 토대 위에 캠브리지 기독대학생연합이 형성되어 곧 다른 영국 대학들과 다른 나라에 번져 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학생회(IVF)와 국제기독학생회(IFES)의 선조였던 것이다.
188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인 전도자로서, 중학교 3학년 중퇴자이자 영국 문법사용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구두 수선공 D. L.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비록 서론은 별볼 일 없이 시작되었지만 한 주간동안 열렸던 집회의 결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수많은 학생이 개종하였으며 상당수는 영국 국교회 선교연합을 섬기기로 지원하였다. 그 때에 무디의 영향을 받았던 학생 중 가장 잘 알려진 자들이 바로 "캠브리지 7인" 이다. 운동과 사회활동에 있어 우두머리엿던 높은 가문의 일곱 우등생들은 20년전에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세워진 중국내지 선교회에 지원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 전역을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을 선교에 헌신하도록 도전하였고, 그 후 1885년에는 중국선교사역을 위해 출항하였다.
한편 대서양 다른 한쪽 즉, 미국 해외선교운동은 18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에 의해 유아기 때 해외선교에 드려진 유망한 청년 사무엘 밀즈는 그해 윌리암즈 대학에 입학하였다. 경쟁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에 다른 학생들을 초대하여 기도에 동참케 하곤 했다. 그들이 대학 가까이의 들판에서 만나곤 하던 1806년 8월 어느날, 돌아오던 길에 폭풍우가 불어와 건초더미 아래 피하였다. 그들은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교회의 선교적 의무에 대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소명을 위해 개개인의 헌신을 결단하였다. 이 건초더미 기도모임으로부터 미국 교회의 해외선교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년 후 그들은 윌리암즈 대학에 형제회를 결성하여 세계복음화를 위한 헌신에 다른 학생들을 초대하였다.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모임이 형성되었고, 1810년에 이르러 밀즈, 이도니람 저드슨과 몇몇의 학생들이 뉴 잉글랜드의 교회지도자들에게 탄원서를 내어 미국선교연합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엿으며, 그들이 직접 가기를 자원하였다. 그 결과, 비록 대다수 조합교회주의자이나 장로교인과 개신교 기독인들을 포함한 미국 해외선교 이사회가 설립되었다. 1812년 2월에 저드슨 가족, 뉴엘 가족과 세 사람이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밀즈 자신은 해외로 나가지 못했다. 그는 1816년 미국 성서공회 설립에 기여하엿고, 뉴욕의 빈민들을 위해 일하엿다. 선원들에 관심 있던 그는 해양성서공회 설립도 도왔고, 인디안을 이한 선교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엿다. 미국 노예들을 위한 그의 관심은 미국 식민협회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 협회의 목적은 노예를 복음화 하고 해방시켜 전도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35세 나이로 일찍 죽었지만 미국학생 선교운도의 아버지라 불리우기에 합당하다.
건초더미 기도회의 학새생들에 의해 설립된 '형재회' 는 계속 성장하였다. 1810년과 1870년 사이에 525명의 학생이 앤도버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들 중 반이 해외로 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그 이념은 다른 대학과 신학교로 번져 나갔다. 영국의 평시도로 인해 새로이 형성된 YMCA가 1851년에 미국에 들어오면서 이들운동에 합세하게 되었다. 이는 도시로 올라오는 청년들과 젊은 여성들을 위해 설립되었다. 1856년 YMCA는 여러 대학에 지부를 세우기 시작햇고, 1877년에는루터 이셔드라는 프린스턴 대학 출신 청년이 대학 "Y" 의 간사로 임명되었다. 목표는 학생들을 전도하는 것과 그들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와 성경공부, 전도 및 사회실천이 강조되었다. 위셔드는 해외선교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건초더미 기도회에 대해 알게된 그는 직접 그 건초더미 현장을 순례하며 눈 위에 무릎꿇고 추수하시는 주님께 다시 한번 자신을 드렷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느 곳, 어느 때든지 가서 어떤 것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앤도버 신학교 '형제회'의 구성원이었던 1846년에 인도로 갓던 로열 월더는 30년 동안 선교사역 후에 건강이 나빠져서 프리스턴 대학에 돌아와서 당대에 가장 중요햇던 '선교잡지'(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를 만들었다. 그의 달 그레이스는 홀크산 대학에 재학 중 학생들에게 선교 관심을 불러 일으켯고, 그의 아들 로버트도 또한 프리스턴 대학에서 다른 학생들과 기도 모임 및 성경공부로 모이면서 특히 해외선교에 대한 자극을 주었다. 그레이스가 독방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그들은 매일 함께 모여 기도했고, 또 주일 오후엔 더 긴 시간의 만남을 갖곤 했다. 로버트는 학생들로 하여금 다음의 선언문에 서명하도록 격려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대로 세계의 아직 복음화 되지 않은 곳으로 갈 의지와 소망이 있음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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